[CEO 열전: 앤서니 탄] 하버드 출신 부잣집 도련님이 동남아 최대 운송사업자가 된 비결

강일용 zero@itdonga.com

[IT동아 강일용 기자] 전 세계 차량공유서비스 시장은 이제 삼파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미와 유럽에서 강세를 보이는 '우버', 중국 시장을 점령한 '디디추싱', 그리고 말레이시아를 중심으로 동남아에서 맹위를 떨치는 '그랩(Grab)'이다. 지난 2012년 말레이시아 출신 사업가 앤서니 탄(Anthony Tan, 36)이 설립한 그랩은 단순 콜택시 앱을 넘어 차량 공유와 운송, 금융 서비스 등을 제공하는 동남아시아 최대의 스타트업으로 거듭났다. 미국의 경제지 포브스에 따르면 그랩은 동남아시아 지역의 유일한 유니콘(기업가치 10조 이상의 비상장 기업)이고, 앤서니 탄은 3억 달러의 자산을 보유한 말레이시아 50대 부자 가운데 1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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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랩 공동창업자 앤서니 탄(출처=앤서니 탄
인스타그램)
그랩 공동창업자 앤서니 탄(출처=앤서니 탄 인스타그램)

지난 3월 우버는 자사의 동남아 사업을 그랩에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우버와 그랩의 최대 투자자인 소프트뱅크의 의향이 반영된 결정이다. 소프트뱅크는 우버가 북미. 유럽 등에 집중하고, 동남아는 그랩에게 맡기길 원했다. 우버 동남아 사업부를 인수함으로써 그랩은 동남아 최대의 운송기업으로 떠올랐다. 그랩은 소프트뱅크와 디디추싱으로부터 각각 10억 달러 규모의 투자를 유치한 것을 시작으로, 지난 1월 현대차로부터 수백억 원대의 투자를 받는 등 수 많은 투자 유치를 통해 유니콘의 반열에 올랐다. 심지어 얼마 전 추진한 20억 달러 규모의 투자 유치에 SK그룹이 공동투자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왜 이렇게 아시아의 많은 기업들이 그랩의 미래를 밝게 보고있는 것일까. 이는 그랩이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베트남, 캄보디아, 미얀마 등 약 6억 명 이상의 인구를 보유한 동남아 차량공유 서비스 시장에서 나라별로 70~90% 정도의 점유율을 확보한 1위 사업자이기 때문이다. 동남아 8개국 195개 도시에서 500만 명 이상의 운전자를 보유하고 있고, 앱 다운로드 횟수도 1억 회가 넘는다. 2만 5000달러의 초기 자본금으로 시작한 그랩은 이제 6조 원 이상의 가치를 지닌 회사로 평가받고 있다.

HBS 졸업한 도련님... 모바일 콜택시 사업에 뛰어들다

앤서니 탄은 말레이시아의 택시 시스템에 불만을 토로하는 친구의 말을 듣고 그랩 사업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탄은 말레이시아의 부유한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할아버지는 택시 기사였고, 할아버지는 일본 자동차를 수입해 말레이시아에 판매하는 '탄청모터스'의 창업주였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아 탄청모터스를 경영하고 있었다. 탄도 현재 운송사업에 종사하고 있으니 자동차와 깊이 관련된 집안 내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셈이다.

그랩 서비스
그랩 서비스

부유한 집안의 자제 답게 탄은 미국 유학을 떠나며 견문을 넓혔다. 미국 시카고대에서 예술/과학을 공부한 후 하버드비즈니스스쿨(HBS)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이후 말레이시아로 귀국해 가업을 물려받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유학 시절 사귄 친구의 불평불만이 탄의 삶을 180도로 바꿨다. 2011년 HBR 동기생이 그를 만나기 위해 말레이시아에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말레이시아 택시 서비스에 대한 악평을 했다. 택시를 잡는 것도 어렵고, 택시기사가 제대로 목적지를 향해 운행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으며, 택시 요금은 기사 마음대로 결정하는 등 중구난방이 따로 없다고 지적했다. 사실 당시에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의 택시 서비스는 세계 최악이라고 악명 높았다.

탄은 친구의 불만에서 사업 기회를 찾았다. 말레이시아인들에게 그러한 불편한 서비스는 당연한 것이었다. 택시 서비스란 원래 불친철하고 체계가 없는 것이란 관념이 머리속 깊이 박혀있었다. 정부, 민간단체, 기업 누구도 이를 개선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탄은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한 서비스를 출시하면 말레이시아, 나아가 동남아 운송시장에 혁신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랩 서비스
그랩 서비스

탄은 HBS에 다니던 시절 사업경연대회에 제출했던 자신의 아이디어 '마이텍시(MyTeksi, 말레이어로 '나의 택시')'를 떠올렸다. 콜택시 서비스였던 마이택시는 당시 지도교수로부터 아이디어 자체는 우수하지만 현실에서 구현하기 어려울 것이란 평가를 받은 프로젝트였다. 2012년 6월, 탄은 마이텍시 프로젝트를 바탕으로 만든 그랩택시(Grabtaxi) 서비스를 쿠알라룸푸르에서 시작했다. 지금은 차량공유 서비스로 더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랩의 시작은 카카오택시 등과 유사한 모바일 기반의 콜택시 서비스였다. 지금도 그랩은 콜택시와 차량공유 서비스를 함께 제공하는 등 동남아 국가별 상황에 맞게 비즈니스를 진행하고 있다.

어려운 창업초기... 극복 비결은 영업의 기본 '발로 뛰어라'

처음부터 사업이 순탄하게 풀린 것은 아니었다. 탄이 처음 사업을 시작할 당시 그랩택시에 가입한 택시 기사의 수는 고작 40명에 불과했다. 지인들은 탄의 도전을 하버드 출신 부잣집 도련님이 경험 삼아 진행하는 취미 사업쯤으로 여겼다. 진지한 사업이라고 여기자니 걸림돌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말레이시아의 낮은 모바일 보급율이었다. 말레이시아의 택시 기사들은 저소득층이다 보니 스마트폰을 구비할 여유가 없었고, 당연히 최신 기술에 대한 이해도 낮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탄이 선택한 방식은 영업의 기본이라는 '발로 뛰는 것'이었다. 모든 서비스를 온라인에서 제공하더라도 오프라인 영업 없이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공항, 호텔, 주유소 등을 직접 돌아다니며 그랩 택시의 유용함을 설명하고 기사들을 모집했다. 그랩 택시에 운전자로 가입하면 승객과 수입을 모두 늘릴 수 있다는 얘기에 기사들이 하나둘씩 그랩택시에 합류했다. 이동통신사 임원들을 만나 그랩택시 기사들에게 스마트폰 구매 보조금을 지급하도록 설득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 끝에 그랩택시의 운전자는 빠르게 늘어났고, 많은 현지인과 관광객들이 모바일을 이용해 그랩택시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이를 바탕으로 말레이시아를 벗어나 베트남,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태국, 필리핀 등 동남아 주요 국가로 사업 범위를 확대할 수 있었다.

그랩은 우버와 경쟁하기 위해 현지화 전략을
내세웠다
그랩은 우버와 경쟁하기 위해 현지화 전략을 내세웠다

사업 지역을 확대하자 그랩은 원조 차량 공유서비스인 우버와 필연적으로 부딪치게 되었다.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탄이 선택한 전략은 '현지화'였다. 현지 법인과 지사장도 제대로 두지 않을 정도로 동남아 시장에 무신경했던 우버와 달리 탄과 그랩은 지속적으로 동남아 시장 사정에 맞는 서비스를 개발해서 선보였다. 2014년 더 큰 성장을 위해 탄은 그랩의 본사를 말레이시아에서 싱가포르로 옮겼다. 이와 함께 콜택시 서비스인 '그랩택시', 차량공유 서비스인 '그랩카'뿐만 아니라 카풀 서비스인 '그랩히치', 오토바이를 공유하는 '그랩바이크' 등도 함께 선보였다. 특히 그랩바이크가 동남아 사용자들에게 크게 각광받았다.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지에선 오토바이가 차를 능가하는 개인교통수단이기 때문이다. 자체 배달능력이 없는 현지 전자상거래 업체와 협력해 '그랩익스프레스'라는 배달서비스도 출시했다. 콜택시를 넘어 차량공유로 사업영역을 확대하면서 탄은 그랩택시라는 이름을 그랩으로 변경했다.

결제 방식도 현지화했다. 우버 등 경쟁서비스는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반드시 신용카드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동남아 지역에서 신용카드 보급률은 매우 낮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탄은 그랩에 현금 결제 시스템을 추가했다. 덕분에 지금도 그랩에서 이뤄지는 결제의 90%가 현금으로 진행될만큼 현금결제가 보편화되었다. 우버 등도 뒤늦게 이를 따라했지만, 시장은 이미 그랩이 장악한 후였다.

그랩은 동남아 환경에 맞춰, 현금 결제 방식을
도입했다
그랩은 동남아 환경에 맞춰, 현금 결제 방식을 도입했다

택시기사 등 운전자의 불만을 최대한 잠재우기 위해 수수료도 크게 낮췄다. 그랩택시의 수수료는 싱가포르에서 1건당 20센트, 태국에서 70센트를 받는 등 업계 최저 수준으로 알려져있다. 특히 운전자와 승객 모두에게 수수료를 받는데, 운전기사에게 받은 수수료는 대부분 보조금 명목으로 되돌려주고 있다. 이를 통해 운전자들이 부담없이 그랩을 설치해 운전자로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탄은 홍콩의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현지화'가 자신의 성공 비결이라고 강조했다. "그랩은 진출한 모든 국가의 규제, 고객의 요구 사항, 사회기반시설 등을 파악한 후 대응하고 있다. 그랩을 이용 중인 운전자와 승객을 만나 불만 사항을 듣고 이를 개선했다. 콜택시, 자동차 공유뿐만 아니라 오토바이와 자전거 공유 서비스를 선보일 수 있었던 비결도 이러한 현지화 전략에서 나온 것이다"고 말했다.

독점과 적자, 그랩이 해결해야할 문제

물론 이렇게 잘나가는 그랩에도 문제는 있다. 그랩이 동남아 최대의 운송사업자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탄은 세 가지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첫 번째는 시장 독점에 따른 규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정부는 그랩이 우버를 인수함으로써 현지 콜택시, 차량공유 시장에서 독점적 사업자가 된 것을 문제삼고 있다.

두 번째는 우버, 리프트, 디디추싱 등 선배 차량공유 서비스처럼 제대로된 수익 모델을 구축하지 못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제작년 그랩은 약 8200만 달러의 적자를 냈다. 작년와 올해에는 적자가 더 심화될 전망이다. 지속적인 투자 유치와 서비스 영역 확대로 버티고 있지만, 곧 큰 문제로 대두될 수밖에 없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탄은 핵심 사업인 운송을 넘어 금융으로 그랩의 사업 영역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 지난 해 11월 모바일 결제 서비스 '그랩페이'를 동남아 지역에 출시했다. 그랩과 현지 전자상거래 업체와 연동성을 바탕으로 신용카드 보급율이 낮은 동남아 지역에서 그랩페이가 신용카드의 자리를 대체하길 꿈꾸고 있다.

세 번째는 승객이 안심하고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를 만드는 것이다. 우버, 디디추싱처럼 그랩 역시 운전자와 승객간 분쟁, 자격 미달의 운전자 유치에 따른 사건 및 사고가 끊이질 않고 있다. 비교적 치안이 우수한 싱가포르에서조차 그랩 운전자가 여성 승객을 성폭행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틈만나면 그랩 운전자가 승객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성폭행을 시도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다. 어찌보면 차량공유 서비스가 제도권에 합류하기 전까지 짊어지고 가야할 원죄라고도 볼 수 있다.

탄과 그랩은 아이디어와 열정을 바탕으로 불과 6년 만에 6조 원대 기업을 만드는 성공담을 썼다.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 동남아 정부들이 낡은 시각에 사로잡혀 탄의 아이디어와 비즈니스를 규제했다면 결코 이뤄내지 못했을 일이다. (물론 탄이 합법 사업인 콜택시를 먼저 정착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차량공유 서비스를 개시하는 등 규제 회피를 위해 영리하게 사업을 진행한 것도 사실이다.) 수많은 규제 앞에 유망한 스타트업이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스러져가는 한국의 창업환경과 대조되어 씁쓸할 뿐이다.

글 / IT동아 강일용(zero@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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