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IT 행사의 숨은 주역... 과연 누구?

안수영 syahn@itdonga.com

국제적인 IT 행사나 외국 기업의 기자간담회가 열릴 때,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있다. 바로 통역사다. 이런 행사에서는 주로 전문적, 심층적인 주제를 다루기 때문에,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도 내용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통역사가 없으면 발표자와 참여자가 소통할 수 없으니 자칫하면 행사가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통역사들의 존재감은 매우 크다.

평소 IT 관련 취재 현장에서 통역사를 보며, 비좁은 통역 부스 안에 갇혀 어렵고 긴 내용을 들으면서 어떻게 실시간으로 통역하는지, 또 어떻게 IT 업계 행사의 통역 업무를 하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다. 이에 김세정 국제회의 동시통역사를 만나 IT 분야 통역사로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 봤다. 그는 업계에 잘 알려진 베테랑 통역사이며 한영 통역을 맡고 있다. IT 관련 국제 행사에 참석한 적 있다면 그의 목소리를 한 번쯤 들어 봤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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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통역사를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원래 학부에서는 정치외교학을 전공했고, 처음부터 통역사를 꿈꾼 것은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에너지 관련 회사에 입사했다. 외국계 회사였던 만큼 종종 통역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때 동시통역의 매력을 느꼈다. 그는 통역사가 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혀 회사를 그만두었고, 이화여자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 진학해 통역사가 됐다.

그는 주로 IT와 기술 업계 행사의 통역을 맡게 됐다. 원래 통역사들은 다양한 분야를 다루기 때문에 한 분야만 고집할 수 없다. 그러나 처음 IT와 기술 행사의 통역을 맡은 후 관련 분야의 일이 점차 늘었다. 다른 분야도 두루 다루지만, IT 분야 통역이 상대적으로 많아 자연스레 IT/산업 분야에 집중하게 됐다.

"IT 행사에 참석해 통역하다 보니 IT 지식이 많이 필요하더라고요. 게다가 IT는 변화 속도가 빨라서 항상 새로운 정보를 부지런히 찾아야 하죠. 평소 모르는 것은 체크해 두었다가 공부하고 책도 많이 읽고 있어요. 무엇보다 현장에서 일하며 IT 업계 동향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는 커뮤니케이션 능력 향상에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실제로 통역을 할 때는 외국어를 잘하는 것뿐만 아니라 관중들이 얼마나 내용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도 고려해야 한다.

"한 번은 제품 발표회를 하는데 분위기가 다소 지루했어요. 원래 행사에서는 참가자들이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질문도 하는데, 그날은 그렇지 않았어요. 문득 통역사가 행사장 한구석에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전달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안 되겠다 싶어 일어나서 연사와 함께 프레젠테이션을 했습니다. 위치만 바뀌었을 뿐인데 참가자들의 피드백이 굉장히 좋아졌어요. 통역도 커뮤니케이션이다 보니 청자들의 반응을 잘 살펴야 한다는 걸 깨달았죠."

'노트 테이킹', '메모리 트레이닝' 등 대학원에서 배운 내용도 십분 활용한다. 노트 테이킹이란, 연사가 하는 말 중에서 중요하거나 기억을 상기시켜 줄 만한 단어를 간단하게 적어두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선진국'을 표시한다면 '□' 모양 위에 'l'를 긋고, '개발도상국'을 나타낸다면 '□' 아래에 'l' 을 그린다. '성장하다(grow)'는 'g'로 표기하고, '급격하게 성장하다'는 'g'에 화살표 표시를 한다. 이런 방법으로 길고 복잡한 내용을 기억하고 이들을 조합해 말을 만든다.

"1분 30초~3분 가량의 이야기를 들은 뒤, 최대한 내용을 기억하고 요지를 파악하는 '메모리 트레이닝'도 많이 합니다. 통역대학원에서 배웠던 것이지만, 평소에도 이런 훈련을 게을리하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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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IT 행사의 숨은 주역...과연 누구? (2)

이해와 소통을 돕는 직업, 동시통역사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동시통역사는 상당히 흥미로운 직업이다. 그렇다면 실제 근무 환경은 어떨까. 동시통역사는 크게 특정 회사에 속해 있는 내부 통역사, 프리랜서 통역사로 나뉜다. 김세정 통역사는 프리랜서다.

"출퇴근 장소는 정해져 있지 않고, 대개 행사장을 전전합니다. 일하는 시간, 일하는 날은 불규칙해요. 예를 들면 행사가 많은 봄과 가을에는 바쁘고, 상대적으로 여름과 겨울에는 한가하죠. 일반 직장인과 달리 시간을 조율할 수 있는 건 장점입니다."

다만 프리랜서다 보니 조언을 받거나 의지할 만한 동료가 없다. 따라서 갑자기 당황스러운 순간에 닥치더라도 혼자서 잘 대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순발력, 감정 조절 능력을 발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통역은 상당히 뇌를 혹사시키는 일이다. 연사의 이야기를 들은 뒤 한국어로 말을 하는 '순차 통역'은 그나마 낫다. 그러나 연사의 말을 들으면서 동시에 한국어를 하는 '동시 통역'을 할 때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동시 통역을 할 때는 2명의 통역사가 20분씩 교대한다.

이런 어려움에도 행사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 큰 보람을 느낀다. 행사 주최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참가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이들이 행사 내용을 이해하는 데 일조했다는 뿌듯함을 느끼는 것이다.

"IT 관련 기술에서 가상 현실, 음성 인식, 클라우드와 같이 형체가 없는 개념은 얼른 이해하기가 어려워요. IT 업계 종사자라도 직접 그 기술을 사용해보지 않았다면, '대충은 알겠는데 명확하게 감이 잡히지 않는다'라고 느낄 수 있죠. 그런 이야기를 잘 전달하는 것이 중요한데, 종종 참가자들이 '확실히 알았다'라고 이야기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때는 정말 기분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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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IT 행사의 숨은 주역...과연 누구? (3)

또 그는 "항상 새로운 분야,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즐겁고 감사하죠"라고 덧붙였다.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새로운 것을 배우고, 열정적으로 일을 하게끔 만드는 원동력을 얻곤 한다.

"올림픽대로에 유조차가 쓰러지는 사고가 나는 바람에 회의에 30분 늦은 적이 있었어요. 아찔한 순간이었어요. 너무 죄송하다고 이야기를 하며 혼날 각오를 했죠. 그런데 한 외국 기업의 임원 분께서 "당신이 잠깐 없었던 사이에, 당신은 자신의 가치를 확실히 증명했다"라고 긍정적인 이야기를 해 주셨어요. 그 말을 듣고 정말 놀랐고 감동을 받았어요. 이렇게 좋은 분들을 만날 때마다 더욱 열심히 해야겠다고 느끼고, 또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일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

이렇듯 멋진 일을 하는 동시통역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김세정 통역사는 "일을 좋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라고 조언했다.

"동시통역사가 되고 싶다면 이들이 하는 일을 자세히 알아보고, 이를 통해 행복감을 얻을 수 있을지 고려하는 게 좋습니다. 영어를 잘 한다는 이유로 막연하게 통역사가 되겠다는 학생들을 보면 안타까워요. 업무에 필요한 소양은 일을 좋아하기만 한다면 충분히 갖출 수 있어요. 그리고 통역에서는 영어보다 한국어 실력이 더 중요해요. 원문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죠. 실제로 통역대 1학년 학생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내가 이렇게 한국말을 못 하는 줄 몰랐다"입니다(웃음)."

동시통역사가 되려면 다양한 분야에 호기심이 많아야 한다. 여러 행사에 참석하기 때문이다. 한 분야를 전문적으로 다루고자 한다면 동시통역이 잘 맞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대개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자기 제어와 생활 패턴도 고려해야 한다. 한 조직에서 안정적으로 커리어를 쌓으려는 이들에게는 통역사가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 전공은 무관하다. 실제로 통역사들의 전공은 영문학뿐만 아니라 식품영양학, 교육학, 경영학 등으로 다양하다. 불어불문을 전공하고 영어 통역을 하는 사람도 있다.

"최근 통역 시장이 많이 변하고 있어요. 요즘에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예전에 비해 통역에 대한 의존도가 그리 높진 않아요. 다만 전문적인 내용인 경우 영어에 익숙하더라도 한국어가 더 편하게 느낍니다. 그런 어려운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통역할 수 있는 실력을 갖췄을 때 차별점을 갖게 되는 거죠. 통역사가 되기 위한 진입 장벽이 예전보다 더 높아지고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이런 어려움을 이겨내려면 무엇보다 적성이 중요해요"

일을 좋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한 만큼, 김세정 통역사는 자신이 하는 일이 즐겁다고 말했다. 통역을 시작한 지 1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여전하다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재미있게 일하고 싶어요. 한 가지 바라는 점이 있다면, 앞으로는 한국 IT 기업들의 외국 진출을 지원하는 기회가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아직까지는 외국계 회사의 한국 행사 통역을 맡는 일이 더 많은데, 한국 IT 기업들이 성장해 외국에서 대형 행사를 개최하는 기회가 많아지길 바랍니다. 저 역시 그런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우리 IT 기업들을 해외에 알리는 데 최선을 다할 겁니다."

글 / IT동아 안수영(syahn@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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