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금융 전환기, 디지털자산 위한 신용평가 필요"
[IT동아 한만혁 기자] 글로벌 주요국에서는 스테이블코인, 토큰증권, 자산 토큰화 등 디지털자산의 법제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미국은 지난 7월 스테이블코인 발행 요건을 규정한 지니어스법(GENIUS Act)을 시행했고, 유럽연합(EU)은 암호자산시장법(MiCA)을 통해 스테이블코인 발행사에 대한 인가 요건을 마련했다. 국내에서도 디지털자산 기본법 입법이 추진 중이며, 원화 스테이블코인 관련 규제도 조만간 마련될 전망이다.
이처럼 디지털자산이 제도권으로 빠르게 편입되는 시점에서 무엇보다 중요해지는 것이 디지털자산에 대한 신용평가다. 시장의 신뢰도와 안정성을 높이고 이용자 보호를 강화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9월 21일 디지털금융 신용평가의 중요성과 평가 방법론을 논의하는 ‘디지털 파이낸스, 디지털금융 인프라의 전환’ 컨퍼런스가 열렸다. 이번 컨퍼런스는 스테이블코인, 토큰증권, 자산 토큰화 등 디지털자산이 금융 인프라를 빠르게 바꾸는 전환기에 시장의 신뢰를 어떻게 만들고 평가할 것인지를 논의하기 위해 마련됐다.
컨퍼런스를 개최한 한국신용평가(KIS)는 1985년 2월 설립된 국내 최초 신용평가사로, 2001년 12월 글로벌 신용평가사 무디스(Moody's) 계열로 편입된 이후, 축적된 평가 노하우에 무디스의 평가 시스템을 더해 국내 자본시장의 선진화를 주도하고 있다.
디지털 금융자산의 위험 요소 줄이려면 ‘신용평가’ 필요
이날 컨퍼런스에서 정혁진 한국신용평가 평가정책본부 실장과 김홍미 한국신용평가 금융·구조화평가본부 실장은 디지털 금융자산의 새로운 리스크 유형과 신용평가 필요성에 대해 설명했다.
정혁진 실장은 “온체인으로 전환된 디지털 금융자산과 일반 채권은 발행사가 같고 신용등급이 같아도 신용위험이 다르다”라며 “이는 디지털 금융자산에서는 채권 권리를 기록, 이전, 원리금 지급 경로가 일반 채권과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전통 금융에서는 권리의 기록과 이전은 한국예탁결제원이, 지급은 은행 등 지급대행 기관이 담당한다. 반면 디지털 금융자산은 이 같은 인프라를 블록체인 위에서 자동 실행되는 스마트 컨트랙트(Smart Contract)로 대체한다. 문제는 이렇게 인프라가 대체되는 과정에서 사고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클라우드 장애로 블록체인상 거래 처리가 지연된 사례, 서로 다른 블록체인 네트워크를 잇는 브릿지(Bridge)에서 스마트 컨트랙트의 취약점이나 승인 키 관리 허점을 노린 공격으로 자산이 유출된 사례가 대표적이다.

정혁진 실장은 “지금까지는 플랫폼에 장애가 생기더라도 전통적인 지급 경로나 원장으로 복귀할 수 있는 대체 절차를 마련해 디지털 리스크가 크게 불거지지 않았지만, 블록체인의 속성상 효율성을 추구하다 보면 이런 대체 절차들을 선택적으로 축소할 수 있고, 그에 따라 디지털 리스크도 보다 명확하게 드러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를 방지하기 위해 신용평가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김홍미 실장은 새롭게 열리는 스테이블코인 시장에서 신용평가가 규제와 혁신 사이의 균형점이 될 수 있다고 제시했다. 그는 “디지털자산 법제화의 핵심 원칙은 이용자 보호와 금융시장 안정장치를 마련하는 것인데, 새롭게 열리는 원화 스테이블코인 시장의 경우 규제가 지나치게 강하면 사업자의 창의성을 억눌러 혁신을 가로막을 수 있고, 반대로 지나치게 느슨하면 이용자 보호 장치가 약해져 문제가 생길 여지가 있다”라며 “규제로 모든 것을 통제하는 대신 사업자에게 적절한 자율성을 부여하고, 그 자율성에 따른 위험을 신용평가로 시장이 판단하게 하는 방식이 해법이 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용자는 신용평가 결과를 바탕으로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내리고, 사업자는 더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스스로 위험을 관리하도록 유도하는 구조라는 설명이다.
국내 실정에 맞는 신용평가 기준 마련해야
그렇다면 이런 신용평가는 어떤 기준과 방법론으로 이뤄질까. 김홍미 실장은 우선 이미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평가 체계를 갖추고 있는 글로벌 신용평가사의 사례를 설명했다. 무디스는 스테이블코인의 상환 가능성을,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법정화폐와의 1대1 가치 연동, 이른바 페깅(Pegging) 유지 능력을 평가 대상으로 삼는다. 그는 “상환 가능성이 높아야 1대1 페깅이 가능하고 반대로 상환 가능성이 떨어지면 페깅 유지가 어려워지는 만큼, 두 지표는 사실상 같은 위험을 측정한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글로벌 신용평가사들의 방법론을 종합해 보면 스테이블코인 신용평가의 핵심 요소는 ▲준비자산 신용위험 ▲준비자산 시장위험 ▲유동성위험 ▲거버넌스 및 운영위험 ▲기술위험 등 다섯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김홍미 실장은 “현재 한국신용평가는 디지털자산 기본법 입법 일정에 따라 평가 방법론을 준비하고 있다”라며 준비 과정에서 핵심적으로 고려하고 있는 3가지 사항에 대해 소개했다. 첫째는 법 제도의 구체적인 기준이다. 준비자산 허용 범위나 가중 평균 만기 자본 규제 등 디지털자산 기본법 세부 내용에 따라 평가 기준점과 접근 방식이 달라질 것이다. 둘째는 시장이 요구하는 정보로, 해외 평가 체계를 참조하되 국내 금융시장에 맞는 평가 체계를 별도로 마련할 계획이다. 셋째는 결제 인프라의 발전 방향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해 평가에 반영하는 것이다.
김홍미 실장은 “글로벌 신용평가사들이 준비자산에 초점을 맞추는 것과 달리 우리나라는 시장 초기 단계인 만큼 신뢰성과 안정성이 중요하다”라며 “시장 안정성과 신뢰성을 위해 초기에는 규제 준수 및 보안 역량을 갖춘 은행권이 시장을 주도하고, 신뢰성 확보 이후 핀테크 기업으로 확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혁진 실장은 “온체인 금융자산이 늘어나는 전환기일수록 신용평가의 역할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라며 “디지털 파이낸스 시대에도 신용평가사는 위험을 면밀히 식별해 금융시장에 신뢰성 높고 비교 가능한 등급과 평가 의견을 계속 전달하겠다”라고 말했다.
시장 초기, 안정성·신뢰성 확보 위해 보수적으로 접근해야
미래에셋증권 홍콩법인에서 디지털자산 전략을 담당하는 손성임 상무는 홍콩의 디지털자산 정책과 규제 방향, 생태계 구축 과정을 소개하며 디지털금융 시장 성장을 위한 제도화의 조건을 제시했다.
홍콩은 디지털자산을 차세대 금융 인프라로 보고 2022년 11월 전반적인 정책 방향을 정한 뒤 정부 주도로 시장 참여자들과 함께 규제 방향을 논의하며 생태계를 발전시켜 왔다. 가장 큰 특징은 기존 시스템과 규제 틀 안에서 디지털자산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손성임 상무는 2023년 홍콩에서 발생한 가상자산거래소 제이펙스(JPEX) 사기 사건도 언급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홍콩 정부는 관련 비즈니스를 위축시키는 대신 오히려 규제를 확장하는 방향을 택했고, 더 안전하게 규제를 정비해 나가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는 설명이다.
그 결과 홍콩은 이제 개념검증(PoC) 단계를 넘어 실제 자금을 조달하는 상용화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손성임 상무는 전했다. 홍콩 정부는 2025년 11월 토큰화 채권을 통해 100억 홍콩달러(약 1조 8860억 원) 규모의 자금 조달에 성공했고, 민간 금융사들도 토큰화 예금과 스테이블코인, 디지털 채권, 토큰화 머니마켓펀드(MMF) 등으로 활용 사례를 넓혀가고 있다.

손성임 상무는 홍콩 시장이 이처럼 활성화된 배경으로, 블록체인과 스마트 컨트랙트를 완전히 새로운 시스템으로 보지 않고 기존 금융 인프라와 시장 참여자를 함께 끌어들여 시스템을 확장해 온 방식을 꼽았다. 규제 측면에서는 ‘동일 상품, 동일 위험, 동일 규제(Same Product, Same Risk, Same Rule)’라는 원칙 아래 기존 법체계를 그대로 수용하면서 통일된 규제를 정비해 온 것이 주효했다는 설명이다.
이어 손성임 상무는 홍콩 사례에서 볼 수 있는 세 가지 시사점을 설명했다. 먼저 증권형 디지털자산이 발행되고 결제되며 청산되는 전 과정을 하나의 일관된 체계 안에서 구축해야 한다는 점이다. 다음으로는 기존 금융 인프라와 시장 참여자를 최대한 활용하며 함께 논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들었다. 마지막으로는 사고가 발생했을 때 시장이나 비즈니스를 위축시키기보다 규제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대응해, 생태계를 더 안전하고 확장적으로 구축하는 데 초점을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손성임 상무는 시장 초기 단계에서는 보수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맞다는 견해도 밝혔다. 기존 시장 참여자가 전통 금융 인프라와 유사한 방식으로 참여하려면 프라이빗 블록체인(허가받은 참여자만 접근할 수 있는 폐쇄형 블록체인)이 적합하다는 것이다. 다만 유통이 활발해지려면 결국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퍼블릭 블록체인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손성임 상무는 “현재 국내 규제는 프라이빗 블록체인만 허용하고 있는데, 향후 퍼블릭 블록체인 허용에 대한 구체적인 타임라인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라고 제언했다. 아울러 “한국 상품에 대한 글로벌 시장 참여자들의 수요가 많은 만큼 규제만 갖춰진다면 빠르게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라며 “정책 방향을 서둘러 정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스테이블코인과 토큰증권, 자산 토큰화는 이미 금융 인프라의 변화를 이끄는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국내에서도 디지털자산 기본법 입법과 2027년 전자증권법 시행을 계기로 토큰증권과 원화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릴 전망이다. 다만 이 시장이 지속적으로 성장하려면 무엇보다 신뢰성과 안정성부터 갖춰야 한다. 즉 안전성을 유지하면서도 시장 혁신을 저해하지 않는 장치가 필요하다. 이번 컨퍼런스에서는 그에 대한 해법으로 신용평가를 제시했다. 규제와 혁신 사이의 간극을 메울 핵심 장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용평가사가 내놓는 비교 가능하고 신뢰할 수 있는 위험 정보는 앞으로 규제 당국의 통제와 시장의 자율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완충 장치로서 그 역할이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IT동아 한만혁 기자 (mh@itdong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