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열전: 커넬 샌더스] 실패는 있어도 포기는 없다... 1008번 거절 끝에 KFC를 세우다
[IT동아 강일용 기자] 할랜드 데이비드 샌더스(Harland David Sanders), 우리에겐 커넬 샌더스(샌더스 대령)로 더 잘 알려진 그는 맥도날드의 레이 크록과 함께 패스트푸드 업계를 개척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1952년 KFC(켄터키프라이드치킨)를 창업해 미국 남부에서나 먹던 음식인 치킨을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리는데 성공했다.
직접 만든 조리법으로 62세에 창업...특별한 성공담
그의 이름에 붙어있는 커넬(대령)은 군대 계급이 아니라 주지사가 미국 남부의 신사들에게 붙여주는 경칭이다. 미스터(Mr)나 서(Sir)보다 높은 존경의 의미를 담고 있다. 커넬 샌더스는 1935년 켄터키 주지사에서 '켄터키 대령'의 명칭을 받았고, 1950년 그의 친구이자 주지사인 로렌스 웨더비를 통해 다시 한 번 켄터키 대령으로 위촉되었다. 켄터키 대령으로 위촉된 후 샌더스는 할랜드라는 그의 본명 대신 커넬이라는 경칭으로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커넬 샌더스가 특별한 이유는 세 가지다. 첫 번째는 KFC의 기원이 된 '오리지널 치킨'의 조리법을 스스로 창안한 점이고, 두 번째는 그 자신이 KFC의 대표 모델이 되었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수 많은 실패도 굴하지 않고 늦은 나이에 창업에 도전해 세계 제일의 치킨 프랜차이즈를 일궈냈다는 점이다.
오리지널 치킨은 1952년 최초의 KFC 매장이 미국 유타주에서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많은 고객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대표 메뉴다. 커넬 샌더스는 백후추로 양념하고 고온의 압력솥에서 기름으로 치킨을 삶는다는 자신만의 독특한 조리방식을 개발해 KFC를 굴지의 프랜차이즈로 키워냈다.
커넬 샌더스의 이름은 몰라도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 KFC의 모델인 하얀 양복과 지팡이를 든 노신사가 바로 커넬 샌더스 본인이기 때문이다. 커넬 샌더스의 얼굴과 모습은 그가 세상을 떠난지 38년이 흐른 현재에도 KFC 매장과 광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친근하고 다정한 이웃 할아버지 같은 그의 모습은 KFC가 미국의 가정식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여지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KFC는 커넬 샌더스가 62살의 나이로 창업한 기업이다. KFC를 창업하기 전 커넬 샌더스는 원래 진행하던 다양한 사업이 모두 망하고, 소액의 국가 연금으로 연명하던 암담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런 비참한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특기를 살려 창업에 나섰고, 결국 미국 최고이자 세계 최고의 치킨 프랜차이즈를 일궈내는 데 성공했다.
실패, 실패, 실패... 실패로 얼룩진 샌더스 대령의 삶
커넬 샌더스는 1890년 미국 인디애나 주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여섯 살일 때 그의 아버지가 죽었고, 기운 가세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 위해 어린 커넬 샌더스도 농장 일을 도와야 했다. 어머니의 재혼과 새 가족들과의 갈등으로 커넬 샌더스는 14살이란 어린 나이에 독립해 다양한 일을 시작했다. 미국 전역을 떠돌며 보일러 점검원, 보험 판매원 등 다양한 일을 닥치는대로 했다. 심지어 먹고살 고민을 덜기 위해 출생 서류롤 조작해 16살이란 나이로 군대에 입대하기도 했다(적성에 맞지 않아 금방 전역했다).
<청년 시절의 샌더스. KFC홈페이지>
철도를 까는 노동자로 일하기도 했고, 소방관으로 일하기도 했다. 힘들게 일하면서도 가정을 꾸려 1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낳았다. 1920년 코로넬 샌더스는 그의 인생에서 최초의 사업에 도전했다. 오하이오 강을 오가는 정기연락선을 운행하는 것이었다. 사업자금이 모자랐던 그는 창업자이면서도 투자자들에게 고용된 직원의 형태로 일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내 오하이오 강에 다리가 생기고 자동차라는 새로운 교통수단이 떠오르면서 최초의 사업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두 번째로 선택한 사업은 주유소였다. 당시 막 보급되기 시작했던 자동차에 주목한 것이다. 사업은 순조롭게 성장했다. 하지만 1929년 전 세계 경제에 대공황이 찾아오면서 손님이 뚝 끊기고, 그의 주유소 사업도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실패에 굴해 주저앉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다시 주유소 사업에 도전했다.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기름만 파는 단순한 주유소 대신 손님들에게 식사까지 함께 제공하는 자동차 카페를 시작한 것이다. 다른 주유소와 차별화된 경쟁력을 갖춘 커넬 샌더스의 자동차 카페는 금새 유명해졌다.
음식에 대한 자신감이 생긴 커넬 샌더스는 이내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된다. 주유소를 그만두고 레스토랑으로 전업한 것이다. 그의 레스토랑인 '샌더스 카페'는 금새 지방의 맛집으로 유명해졌다. 당시 유명 음식평론가였던 던컨 하인즈도 샌더스 카페에 방문해 후기를 남기고, 미국 전역의 레스토랑 안내서인 '즐거운 식사를 위한 모험(Adventures in Good Eating)'에 샌더스 카페의 이름을 올려주었다. 레스토랑으로 번 돈을 활용해 근처에 부지를 매입한 후 여행객들을 위한 모텔 사업도 시작했다.
하지만 1939년 샌더스 카페에 큰 불이나 모든 것이 불타버리면서 커넬 샌더스의 삶에 또 다른 위기가 찾아왔다. 모텔에서 번 돈을 근근히 모아 1941년 레스토랑을 재건했다. 하지만 그의 모텔 사업은 미국 정부가 제 2차 세계대전을 대비해 민간에 가스를 공급하는 것을 중단하고 이에 맞춰 관광객들이 줄어들면서 어쩔수 없이 그만두어야 했다.
이러한 어려운 시기를 헤쳐나가기 위해 커넬 샌더스는 신 메뉴 개발에 매달렸다. 샌더스 카페의 주요 메뉴는 '미국 남부식 닭고기 튀김'이었다. 이 닭고기 튀김은 닭고기에 여러가지 양념을 바른 후 후라이팬에 기름을 둘러 볶아내는 방식으로 만드는 음식이었다. 맛은 제법 괜찮았지만 닭을 볶는데 30~40분 넘게 시간이 필요했다.
커넬 샌더스는 이 시간을 단축할 방법을 찾기 위해 많은 연구를 진행했다. 이내 고온의 압력솥에 기름을 넣고 기름으로 닭고기를 삶아 내면, 닭고기 튀김을 기존의 방식보다 훨씬 빠르게 만들 수 있으면서, 살코기는 더욱 촉촉해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만의 비밀 조리법이 완성된 것이다. 여기에 백후추를 중심으로하는 11가지 허브와 스파이스를 더해 튀김의 맛을 살려내는데 성공했다.
<1930년대 샌더스 카페 내부 모습. 출처 KFC>
수 많은 실패를 경험한 커넬 샌더스에게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다. 그가 레스토랑을 차린 지방 국도를 대신할 새로운 도로가 생기면서 샌더스 카페에 찾아오는 손님이 급격히 줄어든 것이다. 사업은 이내 몰락했고,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아내와 아이들마저 살 길을 모색하기 위해 그를 두고 떠났다. 결국 1950년 샌더스 카페를 폐쇄하고 만다.
60살이 넘은 그에게 남은 것은 정부에서 주는 얼마 되지 않는 연금, 낡은 포드 자동차, 몇 벌밖에 없는 양복뿐이었다. 실패만을 거듭한 커넬 샌더스의 수중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사실 제일 중요한 자산이 하나 남아있었다. 레스토랑의 경쟁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개발한 치킨 조리법과 비밀 레시피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조리법과 레시피를 활용해 다시 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1008번이나 거절당한 샌더스식 조리비법
자신이 직접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것은 많은 실패를 맛봤으니 포기했다. 대신 자신의 개발한 조리법을 다른 레스토랑에 전수하고, 이 대가로 이익의 일부를 받는 사업 형태를 떠올렸다. 가장 기초적인 형태의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미국 전역을 떠돌며 자신의 조리법을 팔고 다녔다. 무려 1008번의 거절을 당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조리법을 알아봐줄 사람을 찾아다녔다. 마침내 1952년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에서 피트 하먼이라는 사업가를 만나게 되었다. 피트 하먼은 자신의 동네에서 보기 힘든 닭고기 튀김에 많은 관심을 보냈고, 마침내 커넬 샌더스의 조리법을 구매하기로 결정했다.
피트 하먼은 커넬 샌더스가 개발한 닭고기 튀김을 단순히 남부식 닭고기 튀김이라 부르지 않고 소비자들의 기억에 남는 이름을 붙이고 싶어했다. 커넬 샌더스가 켄터키 대령이라는 애칭을 쓴다는 점에서 착안해 그가 고안해낸 음식을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KFC)'이라고 부르고 판매에 나섰다.
세계 최대의 치킨 프랜차이즈 KFC는 이렇게 태어났다. 솔트레이크시티에 위치한 피트 하먼의 KFC 매장은 반세기가 넘게 흐른 지금까지도 KFC 1호점으로 영업 중이다. KFC 1호점에 방문하면 커넬 샌더스와 피트 하먼이 함께 찍은 사진과 커넬 샌더스의 기념품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일종의 미니 KFC 박물관인 셈이다.
KFC 오리지널 치킨을 도입한 피트 하먼의 레스토랑은 급격히 성장했다. 도입한 그해에만 매출이 3배 이상 증가했고, 오리지널 치킨의 판매량이 그 매출 가운데 75%를 차지했다. 피트 하먼의 KFC 매장이 성공하는 것을 본 다른 사장들도 커넬 샌더스에게 조리법을 구매하고 오리지널 치킨 판매에 나섰다. 커넬 샌더스는 KFC 매장에서 팔리는 치킨 1부위당 0.04달러의 로열티를 받았다.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에 위치한 피트 하먼의 KFC 매장 앞 샌더스와 하먼이 나란히 선 동상. 출처 플리커>
다시 재기하는데 성공한 커넬 샌더스는 1959년 회사 본사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KFC 프렌차이즈 확대에 나섰다. 1962년에는 자신의 조리법을 보호하는 특허까지 받을 수 있었다. 600개가 넘는 매장을 설립하며 승승장구하던 커넬 샌더스에게 투자하겠다는 사람들까지 나타났다.
존 브라운 주니어와 잭 머시라는 투자자였다. 둘은 커넬 샌더스에게 KFC를 미국 전역을 아우르는 대규모 프랜차이즈로 성장시키자고 제안했다. 사실 70살이 넘는 나이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던 커넬 샌더스는 많이 지친 상태였다. 결국 둘에게 KFC 사업에 대한 모든 권리를 200만 달러(현재 기준 1800만 달러로 치면 약 192억 원)에 매각하고 KFC CEO에서 물러난 후 홍보대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KFC의 CEO 자리는 그의 조리법을 최초로 구매해준 피트 하먼에게 넘겨주었다.
1967년 피트 하먼의 사업 감각을 바탕으로 KFC는 미국 전역에 3500여개가 넘는 매장을 설립하게 된다. 이에 맞춰 주식 시장에도 상장해, 어엿한 대규모 프랜차이즈로 성장하게 되었다.
하얀 옷을 입은 이웃집 할아버지... KFC의 대표 모델이 되다
오늘 날 우리가 생각하는 KFC와 커넬 샌더스의 이미지는 동그란 안경과 염소 수염, 그리고 흰색 양복으로 대표된다. 이는 1950년 커넬 샌더스가 KFC 치킨의 조리법을 팔러 다니며 입었던 복장에서 유래된 것이다. 당시 가난했던 커넬 샌더스는 여러 벌의 양복을 구매할 여력이 없었다. 때문에 거래처를 다닐 때에는 언제나 여름용 하얀 양복만 입고 다녔다. 그런데 이 하얀 양복과 패션이 생각보다 거래자들에게 긍적적인 인상을 주었고, 이는 곧 커넬 샌더스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CEO에서 물러나 KFC의 홍보대사가 된 커넬 샌더스는 1년에 20만 마일을 이동하며 미국 전역에서 KFC 홍보를 수행했다. 새롭게 오픈한 KFC 매장에 방문해 KFC 매장의 이미지 모델로서 활동했다. 또한 많은 TV 광고에 직접 출연해 미국 전역에 KFC와 자신의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모든 KFC 매장에 커넬 샌더스의 동상이 세워졌다. 누구나 쉽게 방문할 수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이라는 콘셉트를 내세웠던 KFC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같이 친근한 인상을 주는 커넬 샌더스의 모습이 시너지 효과를 내어, 사람들에게 KFC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주는데 성공했다. 이를 본 다른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도 다양한 마스코트 캐릭터를 내세웠지만, 실존 인물인 커넬 샌더스만큼의 효과를 거둘 수는 없었다.
친근한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커넬 샌더스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겨울에는 하얀색 양털 양복을 입었고, 여름에는 가벼운 하얀색 양복만 입고 다녔다. 하얀 머리색에 맞추기 위해 콧수염과 턱수염을 하얗게 염색하기도 했다.
맛이 없으면 음식점이라고 할 수 없다... 이웃집 할아버지의 유일한 고집
커넬 샌더스는 KFC를 판매하고 CEO에서 물러나면서 투자자들에게 한 가지 중요한 약속을 받았다. "누가 최고경영자가 되든, 조직이 어떻게 변하든 나는 관심 없습니다. 하지만 딱 하나, 음식의 맛이 떨어지는 것은 결코 참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CEO라기 보다는 오너 쉐프에 더 가까운 인물이었다. 수천 개가 넘는 매장의 음식 품질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개별 KFC 매장이 별도의 메뉴를 개발하는 것을 금지하고 오직 치킨과 샐러드만 판매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사장에 따라 매장의 자율성을 인정하는 당시 프랜차이즈 업계에선 보기 드문 결정이다. 이는 곧 그 유효성을 인정받아 프랜차이즈 업계의 표준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실제로 커넬 샌더스는 자신의 말이 제대로 지켜지는지 매장을 순회하며 직접 확인하기도 했다. 1979년 KFC의 대표 메뉴인 그레이비 소스의 맛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는 "하나님의 끔찍한 저주다(커넬 샌더스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당대 최고의 기독교 명사인 빌리 그레이엄 목사와도 친분이 깊었다)"며, 해당 매장의 그레이비 소스를 모두 쓰레기통에 버리고 본사 경영진에게 항의하기도 했다.
커넬 샌더스는 1980년 90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그는 1000여명의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하얀 양복을 입고 무덤에 묻혔다. 그가 죽을 당시 KFC는 전 세계 48개국에 약 6000여 개의 매장을 갖추고 20억 달러의 매출을 기록하는 대규모 프랜차이즈로 성장한 상태였다. 한국 최초의 KFC 매장은 그가 죽고 4년 뒤인 1984년 서울 종로 2가에 설립되었다.
커넬 샌더스가 죽은 후 KFC는 펩시콜라에게 매각되어 펩시콜라 외식 사업부인 '얌! 브랜드'의 일원이 되었다. 최근에는 패스트푸드로 건강에 좋지 않다는 논란에 수시로 휩싸이고 비슷한 브랜드가 여럿 등장하면서 성장은 정체를 겪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그럴수록 KFC는 커넬 샌더스 대역 광고모델를 등장시켜 맛에 대한 고집을 환기시킨다.
별 정성없이 뚝딱 만드는 음식이라는 인상이 강한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에 대한 비판과 지적이 커질수록 커넬 샌더스의 고집을 그리워하는 사람들 또한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
글 / IT동아 강일용(zero@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