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노키아 쇼크 극복한 핀란드를 배우다] 세계 최대의 아마추어 스타트업 대회, 슬러시

강일용 zero@itdonga.com

[헬싱키=IT동아 강일용 기자] 전 세계 스타트업들에게 스타트업 컨퍼런스는 꿈의 무대다. 행사에 참석한 IT 전문가, 스타트업 지원 담당자, 벤처캐피털, 언론 등에게 자사의 브랜드와 기술을 널리 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방방곡곡에서 스타트업 컨퍼런스가 열리지만, 그 규모만 놓고 보면 크게 2강 체재로 요약할 수 있다. 미국에서 시작된 테크크런치 '디스럽트'와 핀란드에서 시작된 스타트업 사우나 '슬러시'다. 흥미롭게도 두 행사는 모두 '부숴서 버무린다'는 뜻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무엇을 부수고 무엇을 버무린다는 것일까. 둘이 부순 것은 딱딱하고 재미없는 행사 방식이다. 정해진 순서에 맞춰 연사가 나와 강의를 하고 청중은 재미없는 강의를 듣다가 끝나면 성의 없게 박수를 친다. 이것이 우리가 기억하는 행사의 일반적인 순서다. 디스럽트와 슬러시는 이렇게 순서에 맞춰 진행하는 행사 방식을 거부하고 참가자들이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행사를 구성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행사에 토너먼트를 도입한 것이다. 참여한 스타트업이 자신의 아이디어와 아이템을 평가자들에게 소개하면 평가자들은 이에 대한 점수를 매긴다. 이 점수를 토대로 토너먼트를 벌여 최종 승자를 정한다. 스포츠 경기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흥미진진함을 스타트업 행사에 도입한 것이다.

핀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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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버무린 것은 연사와 청중이다. 스타트업, 투자자, 벤처캐피털, 언론 등이 모두 격식 없이 어울릴 수 있도록 다양한 화합의 자리를 조성한다. 전면 스테이지에서 토너먼트가 진행되는 동안 주변의 다양한 장소에서 스타트업과 관계자들의 미팅이 진행된다. 격식 없는 만남을 통해 스타트업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알아봐 줄 투자자와 언론을 찾을 수 있고, 투자자는 유망 스타트업을 발굴할 수 있다.

시리즈 순서
1. 핀란드 알람시계는 1시간 일찍 울린다… 5가지 핵심 경쟁력
2. 화려한 불쇼 레이저쇼 열리는 스타트업 경연대회…7주간 육성해 글로벌 무대위로
3. 스타트업 육성을 위한 핀란드의 디지털 라이트하우스 전략
4. 언제나 변해왔다, 노키아의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5. 헬스케어 산업의 요람
6. 나라 전체가 테스트베드, 기업 유치를 위한 새로운 기법
7. 핀란드의 강소기업을 만나다

같으면서도 다른 디스럽트와 슬러시

하지만 디스럽트와 슬러시는 같은 방향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행사다. 가장 큰 차이점으로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를 들 수 있겠다. 프로와 아마추어는 잘함과 못함의 차이가 아니다. 영리를 추구하느냐, 영리를 추구하지 않느냐의 차이다.

테크크런치 디스럽트는 CBS와 함께 미국 최대 규모의 미디어 기업인 오스미디어의 자회사 '테크크런치'가 주최하는 행사다. 테크크런치는 세계 최대의 스타트업 미디어라고 평가받고 있다. 즉, 기업이 중심이 되어 주최하는 행사라는 것.

슬러시는 기업이 주가 되어 주최하는 행사가 아니다. 핀란드 알토 대학의 창업동아리 ‘알토에스(Aaltoes)’에서 태어난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 '스타트업 사우나'가 기업과 참여자들의 후원을 모아 개최한 비영리 행사다. 스타트업 사우나라는 중심축이 존재하지만 행사 자체는 자원봉사로 참가한 핀란드 대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진행한다. 기업들은 후원을 할 수 있지만 행사에 아무런 관여를 할 수 없다. 실제로 작년 슬러시의 최대 후원자는 크래시오브클랜으로 유명한 핀란드의 게임 개발사 '슈퍼셀'이었는데, 슈퍼셀이 슬러시에 가져다 놓은 것은 크래시오브클랜 배너 한 장뿐이었다. 이 배너도 사실 원래는 없었는데 대학생들이 최대 후원자에 대한 예우(?)로 하나 만들어서 세워둔 것이다. 여기에 슈퍼셀은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슈퍼셀 직원들도 슬러시에 참가해 행사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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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토 대학의 살충제 창고를 개조해 사무실로 이용 중인 유럽 최대의 스타트업 엑셀러레이터 '스타트업 사우나'>

알토 대학은 헬싱키 대학에서 분리된 국립 공과대학이다. 우리나라의 카이스트나 포스텍(포항공대)과 비슷한 위상을 가지고 있다. 즉, 슬러시를 우리나라 상황에 맞게 설명하자면 카이스트 창업동아리가 개최한 스타트업 대회가 세계적인 위상을 가지게 된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행사 분위기도 슬러시가 디스럽트보다 훨씬 자유롭다. 디스럽트는 그래도 나름 형식과 절차에 맞춰 어울림과 만남이 진행되는 반면(물론 이쪽도 반팔 면 티에 청바지가 기본이다) 슬러시는 그러한 형식과 절차마저 최대한 배제했다. 토너먼트가 진행되는 스테이지 뒤편에는 형형색색의 레이저 광선이 돌아간다. 디스럽트가 자유로운 분위기의 행사라면 슬러시는 축제 그 자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나날이 성장하는 슬러시, 단일 행사 규모론 디스럽트 마저 추월

둘 중 굳이 누가 더 큰 행사냐고 묻는다면 아직까지는 디스럽트가 더 큰 행사다. 디스럽트는 샌프란시스코, 뉴욕, 런던, 베를린, 베이징, 도쿄 등 전 세계 주요 도시를 순회하면서 개최되는 대규모 연례 행사다. 매 행사마다 전 세계 130개국에서 1만 명 이상의 스타트업 관계자가 참여한다. 실리콘밸리의 주요 투자자들도 디스럽트에 참여해 전 세계 유망 스타트업을 발굴하고 있다. 아메리카온라인(AOL), 야후, 허핑턴포스트 등 내로라하는 인터넷 미디어를 자회사로 거느린 오스미디어(사실 오스미디어도 미국 최대의 이동통신사 버라이즌의 자회사다)의 자본과 인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슬러시는 자원봉사에 기대고 있는 비영리 행사이기 때문에 행사 규모를 확대하는데 한계가 있다. 하지만 매년 크게 성장하고 있고, 최근에는 디스럽트의 자리마저 위협하고 있다. 2011년 슬러시에 참여한 인원은 300여 명에 불과했지만 2016년에는 전 세계 130개국에서 1만 7000여 명이 행사에 참여했다. 참여한 스타트업은 2300여 개에 달했고, 벤처캐피털도 1100곳이나 참여했다. 디스럽트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행사인 디스럽트 샌프란시스코보다도 많은 인원이 참여한 것이다. 작년의 경우 전 세계에서 예선을 거친 100개의 스타트업이 2일 동안 토너먼트를 벌여 자사를 소개했다. 마지막 날에는 4개의 스타트업이 챔피언을 가리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 스피치를 진행했다. 이 결승전에 한국 스타트업인 스케치온과 샌드버드가 참여해 각각 2위와 4위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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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러시는 아직까지는 핀란드 헬싱키를 중심으로 열리고 있지만, 개최 도시를 점점 확대해나갈 계획이다. 상하이, 도쿄, 싱가포르 등에서도 슬러시가 개최된 바 있다. 캐롤리나 밀러 스타트업 사우나 최고경영자는 "슬러시는 자발적인 참여로 이뤄지는 축제이며, 스타트업 생태계 확대를 위한 열의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도와줄 용의가 있다. 비영리 행사이므로 브랜드 사용료 같은 것은 없다"고 서울에서의 개최 가능성도 열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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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리나 밀러 스타트업 사우나 최고경영자 / 사진 핀란드 공동취재단>

대학생 창업 동아리에서 시작된 역사

이러한 슬러시는 어떠한 경위로 시작되었을까.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앵그리버드로 유명한 로비오의 공동창업자 피터 베스터바카가 2008년 동료 4명과 함께 젊은 창업자 모임을 만든 게 발단이 되었다. 피터 베스터바카는 2010년 로비오를 설립하면서 알토에스에게 행사를 넘겨주었다.

알토에스는 2008년 알토 대학에 재학 중이던 학생들이 모여 만든 창업 동아리다. 2008년 신종 플루가 기승을 부릴 때 소독약을 보관하던 창고를 임대해 출범했다. 2010년에는 창업 지원 프로그램 '스타트업 사우나'를 출범하고 2011년에는 피터 베스터바카에게 건네받은 행사를 '슬러시'로 재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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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업 사우나라는 이름은 핀란드의 명물 '사우나'에서 따온 이름이다. 핀란드는 사우나의 원조이면서, 전국에 사우나만 300만 개가 넘을 정도로 사우나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국가이기도 하다. 사우나를 할 때 흘리는 땀처럼 열정을 다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스타트업들의 아이디어를 현실화하겠다는 의미에서 지은 이름이다. 스타트업 사우나는 출범 이후 불과 7년 만에 유럽 최대의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가 되었다. 그동안 222개의 스타트업이 2억 유로의 투자를 받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슬러시가 11월이라는 다소 생소한 기간에 여는 이유도 흥미롭다. 이 기간에 주목할만한 IT 컨퍼런스가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 주요 기업의 IT 컨퍼런스는 보통 4~6월 사이에 열린다. 겨울에는 별다른 행사가 열리지 않기 때문에 전 세계 스타트업과 벤처캐피털들이 11월에 열리는 슬러시를 주목한다. 일종의 틈새시장 공략이다. 사실 피터 베스터바카와 동료들이 행사 시기로 11월을 고른 것도 별다른 행사가 없어 장소를 무료로 임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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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업 사우나의 5단계 스타트업 육성 모델

슬러시는 스타트업 사우나가 육성한 스타트업의 데뷔 무대이기도 하다. 스타트업 사우나는 창업을 원하는 핀란드 청년들에게 다섯 단계에 걸쳐 도움을 제공하고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알토 소사이어티 프리십이다. 창업을 원하는 청년이 진정 아이디어와 열정을 갖추고 있는지 기초적인 확인을 진행한다. 알토 대학의 학생이 아니어도 되며, 아이디어와 열정을 갖춘 핀란드 청년 누구나 프로그램에 지원할 수 있다.

두 번째 단계는 '정션 (Junction)'이다. 기초 확인을 끝낸 참여자들을 모아 48시간에 이르는 해커톤(해킹+마라톤, 팀을 꾸려 주어진 문제를 단 기간 내에 해결하는 것) 행사를 진행해 관련 능력을 검증한다.

세 번째 지원은 스타트업 라이퍼스(Startup Lifers)다. 정션을 통해 능력을 검증받은 청년을 미국 실리콘밸리, 영국 런던, 독일 베를린 등에 위치한 벤처 기업으로 보내 1~2년 동안 인턴으로 근무하게 하면서 실무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네 번째 단계는 팀업(Team Up)이다. 유사한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들끼리 팀을 짜고 이들이 비즈니스 모델을 구체화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다섯 번째 단계는 스타트업 사우나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이다. 팀업을 통해 구성된 팀이 실제 스타트업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7주간 집중 육성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이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을 통과한 스타트업은 슬러시에 참가해 전 세계 투자자들에게 자신들을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스타트업 사우나의 다섯 단계 육성 모델은 반드시 처음부터 수료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역량이 된다면 누구나 중간에 참여할 수 있다. 이러한 스타트업 지원 비용은 알토 대학과 핀란드 기업의 지원으로 충당하고 있다.

캐롤리나 밀러 스타트업 사우나 최고경영자는 "스타트업 사우나는 핀란드 국내를 넘어 유럽과 실리콘밸리에서도 통할 수 있는 스타트업을 육성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라며 "특히 실리콘밸리 같은 큰 무대를 겨냥하고 글로벌 스타트업 육성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글 / IT동아 강일용(zero@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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