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위한 선제적인 준비", 한국은행이 그리는 현금없는 사회

정연호 hoho@Itdonga.com

[IT동아 정연호 기자] 현금 없는 사회가 오고 있다. 한국은행(한은)에 따르면, 2018년 가계지출 중에서 상품/서비스를 구입할 때 현금 결제 비중은 19.8%다. 현금을 사용하는 이가 5명 중 1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간편결제 시스템으로 신용카드 또는 결제정보를 스마트폰에 등록해 단말기 접촉/바코드 결제를 할 수 있으니, 굳이 현금을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어졌다. 이러한 현금 없는 사회로의 진입은 한국뿐 아니라 이미 전 세계의 추세다.

출처=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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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금 사용률이 점점 떨어지면서, 전 세계 중앙은행에서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연구/개발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CBDC란 국가의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 화폐로, 말 그대로 일반화폐를 디지털화 한 것이다. 법으로 인정하는 법정화폐인 만큼 조건 없이 사용할 수 있으며, 중앙은행이 액면가만큼의 화폐와 교환할 수 있도록 보증한다. 짧은 시간 동안에도 가격이 크게 변하는 암호화폐와 달리, 가치 변동이 적은 실물화폐에 연동되기 때문에 CBDC의 가치는 안정적이다. 실체만 없을 뿐 일반 화폐와 동일하다.

CBDC 연구에 선도적인 국가로는, 디지털 경제 전환을 수년간 추진했던 스웨덴과 중국을 들 수 있다. 스웨덴은 올 2월까지 법정화폐인 크로나(SEK)의 CBDC인 ‘이-크로나(e-Krona)' 시범 서비스를 진행했고, 시범 서비스를 이미 끝낸 중국은 2022년 2월 북경 동계올림픽을 디지털위안화의 상용화 시점으로 잡았다.

한국도 나서는 CBDC 시범 서비스

한은도 오는 8월부터 CBDC 시범 서비스를 진행한다. 다만 한은은 CBDC 상용화엔 선을 그었다. 클라우드 가상공간에서 CBDC 전반적인 업무를 점검할 뿐이라는 것. 한은은 지난달 CBDC 시범 서비스 용역 사업 입찰 공고를 냈으며, 입찰 참가자는 한은이 설계한 CBDC 시스템을 가상공간에 구현하게 된다. 현재 빅테크 기업인 네이버, 카카오 등과 더불어 주요 시중은행들도 이번 CBDC 사업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출처=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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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범 서비스는 내년 6월까지 총 2단계에 거쳐 진행된다. 오는 8월부터 시작하는 1단계 서비스는 실제 서비스 환경과 유사하게 만들어진 클라우드 가상공간에서 진행되며, 발행/유통/환수 등 CBDC 기본 기능을 검증한다. CBDC 제조/발행/환수 업무를 한은이 담당하고, 은행과 빅테크 기업 등 민간이 이를 유통하는 협업 방식을 가정하고 실험 환경을 만들 방침이다.

실험단계는 '허가형 분산원장'방식으로 진행된다. 허가형 분산원장은 권한을 부여받은 참여자만 거래를 검증하고 원장을 기록하는 방식으로, 신뢰할 수 있는 기관이 블록체인의 거래 장부를 공동으로 관리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허가형 분산원장에선 거래 기록을 위조하려 해도 네트워크에 존재하는 모든 기록을 위조해야 하니 현재 기술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기록 관리 기관끼리 서로를 감시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의 기관이 거래를 관리하는 단일원장 방식은 보안에 취약하기 때문에, 분산원장이 CBDC 관리에 더 유용하다.

이어 2단계 서비스를 내년 6월까지 끝낼 예정이다. 이 단계에선 국가 간 송금 기술/강화된 개인정보보호/통신불능 상황에서도 오프라인 결제가 가능한 기술/디지털 자산 구매 등 확장된 기능에 필요한 기술을 적용해보고, CBDC 관련 정책을 검토하는 과정을 거친다.

한은은 독자적으로 CBDC 기술을 연구하기 위해서, 오픈소스 기반 플랫폼을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한은 관계자는 “참여하는 특정 기업도 블록체인 플랫폼 및 디지털화폐를 보유할 수 있는데, 시범 서비스 과정에서 CBDC 생태계가 해당 기업에 종속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오픈소스로 개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CBDC 플랫폼을 오픈소스로 발전시켜 참가하는 민간 기업의 플랫폼이 과도한 관심을 받는 상황을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미래를 위한 선제적인 준비

앞서 말했듯, 이번 시범 서비스는 CBDC 도입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한국은 간편결제 등 전자지급결제 인프라를 잘 갖춘 국가이므로, CBDC를 발행할 유인이 그렇게 크지 않다. 다만 CBDC 도입 논의가 세계적으로 속도를 내는 만큼, 한국도 CBDC를 도입하는 흐름에 편승할 가능성이 있다는 게 한은의 입장이다. 결국, CBDC를 미래에 가능한 시나리오 중 하나로서 선제적인 검토만 하겠다는 것.

사실상 현금거래는 상당히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CBDC라는 미래를 거스를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김성훈 한국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의 ‘현금 없는 경제:의미와 가능성’ 보고서는 “나라별로 차이는 있지만, 현금 거래로 발생하는 직접적 비용만 GDP 1~2%에 이른다. 현금 없는 사회에선 매년 그만큼 경제가 더 성장한다”고 밝혔다.

미국의 경우 2012년 한 해 동안 현금을 사용하면서 지불한 비용이 민간부문에서만 1,000억 달러(원화 112조 8,500억 원)에 육박한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더욱 효율적인 새로운 형태의 화폐가 나타난다면,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럽다.

또한 지하경제가 양성화되면서 세율인상 없이도 재정적자 폭을 완화할 수도 있다. 김 부연구위원은 “한국의 지하경제 규모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인 16~18%를 상회하는 25.6% 정도로, 한국이 현금 없는 경제로 이행할 때 세율인상 없이 대략 20~64조 원의 세수를 추가확보 할 수 있다”고 말했다. CBDC는 거래 기록이 남아 세금을 정확하게 매길 수 있으므로, 지하경제 규모가 큰 나라일수록 현금 없는 경제로 이행할 때 얻는 세수 증대 효과가 더 커질 것으로 추정된다.

CBDC 도입에 앞서 해결해야 할 과제도 있다. 우선 거래 기록이 모두 저장되기 때문에, 개인의 사생활을 보호하기가 어렵다. 해외에선 CBDC가 정착되면 국가기관이 개인의 금융거래 감시/사찰이 가능하리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지급수단을 이용하지 못할 디지털 취약계층이 경제활동에서 배제되지 않도록 섬세한 접근도 필요하다. 여기에 더해, CBDC 도입으로 민간은행이 위축될 시, 은행대출이 감소해 투자가 위축되고 은행대출 의존도가 높은 자영업자에게 피해를 미칠 수 있단 점 역시 함께 고려해야 한다.

지금까지 한은은 CBDC가 사회에 미칠 파급효과를 꾸준히 연구해왔으며, 앞으로도 여러 시나리오를 점검하며 관련 연구를 계속 진행할 것으로 보인다. 머지않은 미래에 찾아올 변화라면, CBDC로 가는 길에 앞서 대비를 철저하게 해야 할 것이다.

글 / IT동아 정연호 (hoho@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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