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CEO 열전] 닌텐도의 위대한 독불장군, 야마우치 히로시

김영우 pengo@itdonga.com

[IT동아 김영우 기자] 일본 닌텐도(Nintendo, 任天堂)는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유명한 세계 최대의 비디오 게임 업체다. 하지만 닌텐도 전체의 역사를 봤을 때, 이 회사가 '비디오 게임 업체'로 활약한 시기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최악의 상황에서 가업을 잇게 된 22세의 대학생

야마우치 히로시
야마우치 히로시

<닌텐도 전 CEO 야마우치 히로시(1927 ~ 2013)>

닌텐도는 1889년에 창업했으며, 초기의 주력 사업은 화투 및 트럼프 카드 생산이었다. 전자총 기반 게임 사업을 시작한 것이 1973년부터, 본격적인 비디오 게임기를 출시한 것은 불과 1977년부터다.

80년 넘게 화투와 트럼프만 만들던 닌텐도를 세계적인 명성의 비디오 게임 업체로 거듭나게 한 이는 바로 1949년부터 회사를 이끈 야마우치 히로시(Hiroshi Yamauchi, 山内 溥, 1927 ~ 2013)다.

하지만 그가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닌텐도의 세 번째 사장이 되었을 무렵, 그는 22세의 대학생(와세다대학 법학과)에 불과했으며, 사내의 분위기도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본래 닌텐도의 3대 사장이 되었어야 할 야마우치의 아버지(데릴사위)는 불륜여성과 눈이 맞아 집을 나간 상태였으며, 닌텐도의 직원들은 노동쟁의를 이어가고 있었다.

자유분방한 대학생이었던 야마우치 입장에서 이런 상태에서 가업을 이어받는 건 딱히 끌리는 일이 아니었다. 이에 그는 회사 경영에 간섭할 우려가 있는 사내의 인척들은 모두 물러나야 한다고 제안했으며, 할아버지가 이를 받아들여 실행에 옮김으로써 닌텐도의 사장직을 수락하게 되었다. 사장에 오른 야마우치가 과감한 사내 개혁을 추진하면서 사내의 노동쟁의도 진정되었고 신제품 개발도 진행되었다.

한 번의 성공에 취한 젊은 사장, 회사를 도산 위기로 내몰다

1953년, 닌텐도는 일본 최초로 플라스틱 재질의 트럼프를 개발해 눈길을 끌었으며, 1959년에는 미국 디즈니와 라이선스를 맺고 캐릭터 트럼프를 출시했다. 이를 통해 이전에는 단순히 도박용 도구에 그쳤던 트럼프가 온 가족을 위한 놀이도구로 거듭날 수 있었다. 플라스틱 트럼프와 디즈니 캐릭터 트럼프가 높은 인기를 끌면서 닌텐도는 업계 선두의 자리에 올랐다.

닌텐도
닌텐도

<2018년 현재도 팔리고 있는 닌텐도의 트럼프와 화투>

실적이 올라가고 자금 여유가 생기면서 야마우치는 다른 업종으로도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1960년에는 택시 사업에 진출하고 1961년에는 식품 사업을 시작하는 등, 그야말로 문어발식 사업확장을 했다. 하지만 새로 진출한 사업의 성과는 좋지 않았고, 트럼프의 인기마저 사그라져 닌텐도는 도산위기에 몰린다.

'놀이'의 가능성은 무한대

위기에 처한 야마우치는 자신의 실수를 반성하는 한편, 회사의 기반이었던 '놀이'에 집중하기로 하고 이러한 방향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장난감 사업 진출을 모색했다. 그리고 이 즈음인 1965년에 합류한 인재가 바로 '요코이 군페이(Gunpei Yokoi, 横井 軍平, 1941 ~ 1997)'다. 요코이는 본래 닌텐도 트럼프 공장의 설비 관리직으로 입사했다. 하지만 유달리 호기심이 많은데다 공학도답게 손재주가 뛰어나 가끔 자신만의 장난감을 만들어 사내에서 가지고 놀곤 했다.

닌텐도
닌텐도

<닌텐도에서 1966년에 출시한 '울트라핸드'>

이를 우연히 목격한 야마우치는 요코이가 고안한 몇 가지 장난감을 유심히 보다가 상품화를 결정했다. 대표적인 제품이 산업용 로봇팔에서 모티브를 얻은 '울트라핸드(1966년)'였는데, 이 제품이 큰 인기를 끌며 날개 돋친 듯 팔리면서 닌텐도는 도산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야마우치는 요코이의 성과를 인정해 그를 완구 개발부의 주임으로 앉히고 제품을 기획하게 했다.

뒤이어 1970년에는 태양전지를 센서로 이용해 목표를 조준하고 쏠 수 있는 광선총 장난감을 개발, 이 역시 큰 히트를 기록했으며, 1973년부터 닌텐도는 아예 넓은 공간에서 광선총 사격을 즐길 수 있는 게임장도 열어 이 역시 인기를 끌었다.

이에 힘입어 닌텐도는 광선총 게임장을 전국 단위로 확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 1차 오일쇼크가 전세계를 강타, 경기가 침체되자 닌텐도 역시 적잖은 손실을 입게 된다. 하지만 이를 통해 야마우치는 게임의 무한한 가능성을 깨닫게 된다.

남들과 조금 다른 길, 그리고 첫 번째 대성공

그리고 이 때를 즈음해 일본 타이토(Taito)사에서 개발한 업소용 게임인 '스페이스 인베이더(Space Invaders, 1978년)'가 전세계적인 대히트를 기록, 게임센터(오락실) 시장이 본격적으로 개막했다. 그리고 미국 아타리(Atari)사에서 개발한 가정용 게임기인 아타리 VCS(Video Computer System, 1977년) 역시 높은 인기를 구가하면서 게임 시장은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닌텐도 역시 스페이스 인베이더와 유사한 업소용 게임을 출시해 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1977년에는 단순한 게임 몇 가지가 내장된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인 '컬러 TV 게임(カラー テレビゲーム)'을 출시하기도 하는 등, 서서히 게임 전문업체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경쟁사의 것을 따라 하는 것 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더욱이 당시 업소용 게임 시장은 타이토, 가정용 게임 시장은 아타리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닌텐도는 다른 길을 모색해야 했다. 이 때 아이디어를 낸 것이 요코이 군페이였다.

요코이는 당시 보급이 본격화되던 휴대용 전자계산기의 기술을 응용한 휴대용 게임기를 개발할 것을 건의했고 야마우치는 이를 승인했다. 이를 통해 1980년에 첫 출시된 것이 바로 '게임 & 워치(Game & Watch)'다.

닌텐도
닌텐도

<1980년에 첫 출시된 '게임 & 워치(Game & Watch)'>

게임 & 워치는 한 기기당 한 가지의 게임만 즐길 수 있었고, 화면의 품질도 지금 기준에선 극히 조악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주머니 속에 쏙 들어갈 정도로 크기가 작아 어린이나 청소년도 손쉽게 가지고 다니며 즐길 수 있었으며, 전력 소모가 적어 배터리 수명도 길었다. 그리고 게임을 하지 않을 때는 알람 기능을 가진 탁상시계처럼 쓸 수도 있었는데, 시계가 귀하던 당시 상황에선 이 역시 호평을 받을 만 했다.

게임 & 워치는 출시되자마자 큰 인기를 끌었다. 더 다양한 게임을 즐기기 위해 여러 종류의 게임 & 워치를 사는 경우도 많았고, 청소년들 사이에선 자신이 더 많은 게임 & 워치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는 것이 유행이 될 정도였다.

해외에서도 높은 인기를 끌었는데, 일본에선 1985년에 단종되었지만 해외 시장에는 1991년까지 신제품이 출시될 정도였다. 게임 & 워치는 일본 내에서 총 1,287만대, 해외에서 총 3,053만대가 팔리며 닌텐도를 돈 방석에 올려놓았다. 이는 향후 닌텐도가 세계적인 게임 전문 업체로 발돋움하게 되는 중요한 기반이 된다.

설익은 게임시장에 닥친 위기

아타리가 개발한 가정용 게임기인 아타리 VCS(Video Computer System) / 출처 아타리 홈페이지, 위키백과 한편, 이 무렵 북미를 중심으로 한 게임 업계에 큰 위기가 다가온다. 가정용 게임기 시장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자랑하던 아타리가 급속히 무너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유 중 하나는 품질 낮은 게임의 범람이었다.

아타리는 매출을 올리는데만 급급했을 뿐이지 자사 게임기용 게임의 내용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온갖 업체들이 아타리 게임기용 게임을 개발해 출시했는데, 태반이 소비자 우롱 수준의 조악한 품질이었고, 성폭행을 소재로 한 음란 게임까지 아무런 제제를 받지 않고 버젓이 팔릴 정도였다.

더욱이, 워낙 다수의 업체들이 우후죽순 수준으로 수많은 게임을 출시하다 보니, 팔리지 않고 쌓이는 재고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되었고, 이는 게임 개발사뿐 아니라 판매점들에게도 부담이 되었다. 이런 공급 과잉의 와중에 게임의 품질 자체도 형편 없었으니 소비자들의 외면 속에 게임기 및 게임 소프트웨어의 판매량은 급격히 하락했다. 결국 1983년 전후부터 북미 게임 시장은 급속한 침체기에 빠졌는데, 일본에서는 이를 일명 '아타리 쇼크'라 부른다.

세계 정상에 우뚝 서다

한편, 이런 와중에도 업소용 게임 시장은 꾸준한 성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게임 & 워치를 통해 상당한 돈을 번 야마우치는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가정용 게임기 사업을 구상했다.

첫 번째 목표는 업소용 인기 게임을 가정에서도 양호한 품질로 재현할 수 있고, 소프트웨어 교환이 가능한 게임기였다. 반도체 회사인 리코(Ricoh)사와 협력을 통해 2년여의 개발기간을 거쳐 1983년에 일본에 첫 출시된 '패밀리 컴퓨터(Family Computer, 약칭 패미컴)가 그 결과물이다. 북미에선 '닌텐도 엔터테인먼트 시스템(Nintendo Entertainment System, 약칭 NES)'이라는 이름으로 1985년에 출시했다.

닌텐도
닌텐도

<패밀리 컴퓨터(1983년)는 세계적인 인기를 끌며 게임 시장을 장악한다>

패미컴은 당시 인기를 끌던 '동키콩', 제비우스' 등의 업소용 게임을 무난하게 이식할 수 있는 성능을 제공했으며, 십자모양의 방향키와 4개의 버튼을 탑재한 컨트롤러를 갖춰 대부분의 게임을 무난하게 조작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점은 소프트웨어 품질 관리였다. 닌텐도는 서드파티(외부개발사)에서 개발한 패미컴용 게임의 품질을 엄격하게 검증했으며, 게임 소프트웨어가 담긴 롬 카트리지 역시 닌텐도에서 전량 위탁 생산하는 방식으로 출하량까지 통제했다.

덕분에 패미컴용 소프트웨어는 안정적인 품질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공급 과잉으로 재고가 많이 남는 경우가 적어 판매점에서도 환영을 받았다. 아타리 쇼크로 크게 데인 적이 있는 북미 시장에서도 특히 높은 호응을 얻은 건 물론이다.

이와 함께, 닌텐도에서 자체적으로 개발한 게임 소프트웨어 역시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대표적인 것이 1985년에 출시된 액션 게임인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Super Mario Bros)'였다. 깔끔한 그래픽과 기발한 구성이 어우러진 이 게임은 단박에 패미컴과 닌텐도를 대표하는 최고의 인기 게임이 되었다. 그리고 이 게임의 개발을 주도한 미야모토 시게루(宮本 茂, Shigeru Miyamoto)는 이후에도 다수의 인기게임을 개발하며 닌텐도를 대표하는 간판 개발자로 자리매김한다.

적절한 성능과 디자인, 그리고 우수한 소프트웨어까지 보유한 패미컴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전세계 가정용 게임기 시장을 완전히 장악했다. 2003년 공식 단종될 때까지 패미컴은 전세계에 총 6,191만대에 이르는 압도적인 판매량을 기록한다.

거듭되는 성공 뒤에 드리운 그림자

이와 함께 1989년에는 게임 & 워치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요코이 군페이가 개발을 주도한 소프트웨어 교체형 휴대용 게임기 '게임보이(GameBoy)'를 출시, 역시 큰 인기를 얻었다.

게임보이는 낮은 화질의 흑백 화면을 탑재하는 등, 하드웨어의 성능은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다. 하지만 긴 배터리 수명에 튼튼한 내구성을 갖춘데다 본체 가격도 싼 편이라 어린이들의 '장난감'으로서는 최적이었으며, 패미컴 못잖은 양질의 소프트웨어가 다수 공급되면서 매력을 더했다. 가정용(거치형)에 이어 휴대용 게임기 시장까지 닌텐도의 천하가 된 것이다.

여세를 몰아 닌텐도는 1991년, 패미컴의 후속 모델인 '슈퍼패미컴(Super Famicom, 북미 제품명은 '슈퍼 NES)'을 출시해 인기를 이어간다. 슈퍼 패미컴은 16비트 CPU를 탑재해 8비트 CPU 기반의 패미컴보다 훨씬 높은 품질의 게임을 구현할 수 있었으며, 패미컴 시절에 호평 받은 다수의 인기 소프트웨어의 후속작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세가, NEC 등의 경쟁사들도 자사의 가정용 게임기를 내놓아 닌텐도에 대항했지만 닌텐도가 이미 구축한 높은 벽을 극복할 순 없었다. 다만, 이렇게 너무나 잘 나가던 닌텐도의 앞에 조만간 시련이 닥칠 것이라는 건 아무도 몰랐다.

영원할 줄 알았던 제국

1990년대 초반 야마우치 히로시가 이끄는 닌텐도는 그야말로 전성기를 구가했다. 패미컴과 슈퍼패미컴, 게임보이용 게임기와 소프트웨어는 날개 돋친 듯 팔렸으며, 이에 대항할 만한 경쟁사도 그다지 없었다.

특히 북미에서는 '게임기=닌텐도'로 인식될 정도였으니 그 위상을 짐작할 만 하다. 특히 서드파티에서 개발한 소프트웨어를 닌텐도에서 직접 품질 검증하고 출하량까지 지정하는 시스템, 그리고 소프트웨어가 담긴 롬 카트리지를 전량 닌텐도에서 위탁 생산하는 구조는 닌텐도에게 있어 높은 로열티 수익을 안겨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하지만 이는 서드파티 입장에선 일방적으로 불리했으며, 차츰 불만이 쌓일 수 밖에 없었다. 패미컴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혁신적인 시스템이 나중에는 불합리한 관행이 되고 만 것이다.

닌텐도
닌텐도

<일본 교토에 위치한 닌텐도 사옥>

더욱이, 닌텐도가 소프트웨어 매체로 롬 카트리지만 고집하는 것도 서드파티들의 불만을 가중시켰다. 시대는 한층 고화질, 고음질의 멀티미디어 게임을 원하고 있었지만 슈퍼패미컴용 롬카트리지의 저장 용량은 불과 수MB 남짓에 불과한데다 생산단가도 무척 높았다. 여기에 닌텐도에 지불하는 로열티까지 더해지면서 상당수 슈퍼패미컴 게임의 가격은 개당 10,000엔을 넘기까지 했다. 이는 서드파티 뿐 아니라 소비자 입장에서도 부담이었다.

또한 닌텐도는 서드파티들이 닌텐도가 아닌 경쟁사의 게임기용으로 게임을 출시하는 것도 엄격하게 통제했으며, 이를 어긴 서드파티에겐 닌텐도용 게임 제작을 허락하지 않거나 원하는 출하 수량을 승인하지 않는 등의 불이익을 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닌텐도가 거의 독점 수준으로 시장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드파티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닌텐도의 정책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오만이 부른 판단착오

700MB 가량의 고용량을 담을 수 있고 생산단가도 훨씬 저렴한 매체인 CD-ROM을 이용한다면 이러한 문제를 상당부분 해결할 수 있었다. 때문에 당시 협력 관계에 있었던 소니(Sony)가 슈퍼패미컴용 CD-ROM 추가 어댑터를 공동개발하자고 제안했으며, 닌텐도의 야마우치 역시 처음에는 이를 받아들여 제품의 시제품까지 개발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에 대한 야마우치의 생각은 차츰 회의적으로 바뀐다. 현재의 롬 카트리지 기반 시스템으로 서드파티들을 통제하며 손쉽게 고수익을 올릴 수 있는데 굳이 CD-ROM을 택할 이유가 크진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소니에서 향후 출시될 슈퍼패미컴용 CD-ROM 소프트웨어에 대한 라이선스 권리까지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다간 게임 시장의 주도권을 빼앗길 우려가 있다고 야마우치는 판단했다. 결국 1991년 6월, 닌텐도는 소니와의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대신 필립스와 계약을 맺겠다고 발표했다.

소니 플레이 스테이션 1
소니 플레이 스테이션 1

<1994년 소니가 출시한 플레이스테이션 SCPH-5001 / 출처 위키미디어>

닌텐도의 이런 결정에 소니는 당연히 크게 분노했으며, 계획을 바꿔 닌텐도를 이길 수 있는 자사의 독자적인 CD-ROM 게임기를 개발하기로 한다. 그리고 이는 소니가 1994년 '플레이스테이션(PlayStation)'을 출시하면서 현실화된다. 플레이스테이션은 CD-ROM을 탑재한 것 외에 당시로선 상당한 품질의 3D 그래픽을 구현할 수 있는 고성능 32비트 CPU를 탑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야마우치는 소니의 이런 움직임이 닌텐도의 위상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니는 게임 시장에선 초보자나 다름없는데다 자체적으로 게임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능력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하드웨어가 아무리 좋아도 소프트웨어의 품질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게임기 시장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서드파티들은 여전히 닌텐도 손아귀에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소니 플레이스이션은 닌텐도 뿐 아니라, 당시 업계 2인자였던 세가에서 개발한 32비트 CD-ROM 게임기인 새턴(Saturn)과도 경쟁을 해야 했으며, 닌텐도 내부에선 이미 32비트를 능가하는 64비트급 게임기인 '닌텐도64'를 개발하고 있었다. 닌텐도64 역시 롬 카트리지 기반 게임기였지만, 연산능력이 플레이스테이션보다 우수하기 때문에 출시 시기가 늦더라도 나중에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영원한 제국은 없다

하지만 시장은 점차 예상하지 못한 결과로 흘러갔다. 소니는 최대한 많은 서드파티를 끌어들이기 위해 닌텐도보다 낮은 로열티를 제시했으며, 매체 생산단가가 낮은 CD-ROM의 특성 덕분에 플레이스테이션용 소프트웨어는 슈퍼패미컴 소프트웨어의 절반 수준에 출시가 가능했다.

더욱이, CD-ROM은 롬 카트리지보다 빠르게 대량생산이 가능한 장점도 있었기 때문에 소프트웨어의 출시 시기나 수량도 손쉽게 조정이 가능했다. 소니는 손쉽게 게임을 개발할 수 있는 각종 도구를 개발해 게임 개발사들에게 강하게 어필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이 이어지자 그 동안 닌텐도의 독점에 불만을 품었던 소프트웨어 제작사들이 하나 둘 소니 플레이스테이션의 서드파티로 가입하기 시작했다. 특히 대형 업체인 남코(Namco)는 '철권', '릿지레이서'와 같은 고품질의 3D 그래픽 게임을 플레이스테이션으로 출시하여 대중들에게 강한 존재감을 과시하기도 했다. 더욱이, CD-ROM 기반의 고용량 덕분에 기존 롬 카트리지 기반의 게임기에선 구현할 수 없던 고품질 동영상 및 음성을 게임에 삽입할 수 있게 된 점 역시 게임 마니아들을 자극하는 요소였다.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1996년 1월에 일어났다. 일본의 국민 게임 중 하나인 '파이널판타지(Final Fantasy)'의 개발사인 스퀘어(Square)가 소니 플레이스테이션용 게임을 출시할 것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그 동안 스퀘어는 오직 닌텐도 게임기용 게임만 출시하던 회사였으며, 최신작인 '파이널판타지7 역시 닌텐도64용으로 출시될 것이 확실시되고 있었다. 하지만 스퀘어가 원하는 방대한 스케일의 게임을 담기에 롬 카트리지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그들은 닌텐도를 떠나 소니의 품에 안겼다.

방대한 용량의 매체에 낮은 소프트웨어 가격, 우수한 개발환경에 유리한 라이선스 조건, 여기에 강력한 서드파티까지 갖추게 된 소니의 앞길에 더 이상 장애물은 없었다. 플레이스테이션은 날개 돋친 듯 팔리기 시작했고, 당초의 경쟁자였던 세가의 새턴을 압도함과 동시에 전체 게임기 시장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닌텐도
닌텐도

<1996년에 출시된 닌텐도64>

닌텐도는 1996년 6월에 슈퍼패미컴의 후속 기종인 닌텐도64를 출시했으나, 닌텐도에서 자체 개발한 '슈퍼마리오64' 등의 일부 게임을 제외하면 눈에 띄는 동시 출시작이 없었으며, 그나마 소프트웨어의 수 자체도 많은 편이 아니었다.

그리고 게임기 자체의 성능은 높았을지 몰라도 여전히 용량이 적은 롬 카트리지를 이용한 탓에 그 성능을 원활하게 활용하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당시 게이머들이 원하는 멀티미디어 콘텐츠를 적용하기가 어렵다는 점에 게임 개발사들은 아쉬움을 표했다. 결국 닌텐도는 가정용 게임기 시장의 주도권을 소니에게 내 줄 수 밖에 없었다.

악재는 이것 뿐 만이 아니었다. 닌텐도는 게임보이의 뒤를 이을 휴대용 게임기로 가상현실(VR) 기술을 적용한 '버추얼보이'를 1995년에 내놓았다. 하지만 버추얼보이는 시장의 외면을 받아 불과 출시 1년여 만에 단종되기에 이른다. 가상현실 기술은 아직 시장에서 받아들이기에 생소한 것이었으며, 휴대용을 표방하면서도 제품의 덩치가 너무 크고 즐기기 불편하다는 것이 단점이었다. 버추얼보이의 개발 책임자였던 요코이 군페이는 실패에 책임을 지고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

영웅의 퇴장과 새로운 희망

시종일관 찬사만 받던 야마우치 히로시의 리더십이 고집스럽고 독선적이라는 혹평으로 바뀐 것도 이 때 즈음부터다. 이후, 닌텐도는 닌텐도64의 후속 모델인 게임큐브(Game Cube, 2001년)을 출시하는 등, 부활을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전세를 뒤집지 못하고 소니 우세의 시장구도는 그대로 유지된다.

하지만 닌텐도에게 희망이 없는 건 아니었다. 비록 시장의 주도권을 내주긴 했지만 여전히 '슈퍼마리오', '포켓몬스터' 등으로 대표되는 유력한 지적재산권을 다수 보유한데다 미야모토 시게루로 대표되는 우수한 인재도 많이 있었다.

야마우치 역시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후진 양성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특히 그는 닌텐도의 하청업체였던 HAL연구소에 근무하던 '이와타 사토루(岩田 聡, Satoru Iwata, 1959~2015)'의 능력을 유심히 보았다. 그리고 2000년부터 그를 닌텐도에 입사시켜 자신의 후계자로 키웠다.

그리고 2002년, 야마우치 히로시는 닌텐도의 사장직을 아와타 사토루에게 넘기고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는 자리에서 물러나기 전에 사장에게 집중되어 있던 닌텐도의 의사결정권을 분산, 집단 지도 체제를 구축했다. 다소 경직되어있던 닌텐도의 사내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신임 사장이 된 이와타에게는 절대로 다른 업종에 진출하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젊은 시절 문어발식 사업 확장을 했다가 큰 시련을 겪은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충고였다. 이후, 야마우치는 여생을 보내다가 2013년 9월 19일 향년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와타 사토루
이와타 사토루

<야마우치의 뒤를 이어 닌텐도의 사장에 오른 이와타 사토루(1959~2015)>

이와타 사장 취임 이후, 닌텐도는 게임기의 성능 보다는 놀이의 본질에 집중하는 행보를 보인다. 2개의 화면 및 터치스크린을 갖춘 휴대용 게임기인 '닌텐도 DS(2004)', 몸을 직접 움직이며 즐기는 체감형 게임기인 '위(Wii, 2006년) 등이 이와타 사장 시절의 대표작이다. 다만, 안타깝게도 그는 2015년에 병사하여 키미시마 타츠미(1960~)가 닌텐도 사장 자리를 이어받는다.

닌텐도 DS와 위는 낮은 하드웨어 성능 탓에 출시 초기엔 기존의 게임 마니아에게 혹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기기의 특성을 이용, 다른 게임기에선 흉내 낼 수 없는 이색적이고 참신한 게임이 다수 출시되어 예전에는 게임을 즐기지 않던 노인이나 여성 소비자들까지 사로잡았다. 이에 힘입어 닌텐도 DS는 총 1억 5,402만대, 위는 총 1억 163만대의 글로벌 판매량을 기록할 정도로 대히트를 거두며 닌텐도를 다시 시장의 정상으로 올려놓았다.

'독불장군' 야마우치가 남긴 위대한 유산

야마우치 히로시는 과감한 결단력과 두둑한 배짱을 발휘하며 작은 화투 회사를 세계적인 게임 업체로 성장시켰다. 이것 만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을 만 하다. 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너무나 큰 성공을 거둔 탓인지 만년에는 독불장군 소리를 들었으며, 몇 번의 판단 착오로 회사를 위기에 빠뜨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빛나는 유산은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었으며, 후계자들은 이를 최대한 활용해 다시 회사를 일으키게 된다. 게임이라는 문화가 사라지지 않는 한, 그의 이름과 족적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회자될 것이다.

글 / IT동아 김영우(pengo@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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