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노마드의 필수 길라잡이 - 내비게이션
항해 시 꼭 챙겨야 할 물건은 나침반과 해도(海圖)다. 뱃사람들은 망망대해를 건널 때 이 두 가지 물건에 목숨을 맡겼다. 망가지거나 분실한다면 아무리 크고 좋은 배라고 할지라도 길을 잃고 표류할 수밖에 없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나 베니스 해상 무역의 번영도 이것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수백 년간 뱃사람들의 길잡이가 되었던 나침반과 해도는 과학이 발전하면서 IT기기에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자동항법장치, 다른 말로 내비게이션(navigation system)이다.
내비게이션의 어원은 라틴어 navigere로, navis(배)와 agere(움직이다, 이끌다)에서 유래됐다. 사전적인 의미로는 ‘항해술’을 뜻하지만 일반적으로 항해를 도와주는 장치나 프로그램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오늘날 내비게이션은 선박, 항공기, 자동차 등 다양한 이동 수단에 두루 사용되지만, 여기에서는 내비게이션의 범주를 자동차 내비게이션(automotive navigation system)에 국한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내비게이션의 역사
자동차 내비게이션(이하 내비게이션)은 운전자가 낯선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도록 경로를 탐색하는 장치다. 지금은 교통 상황을 고려해 가장 빠른 길을 안내하는 수준까지 발전했지만, 초창기 내비게이션은 지도 위에 운전자의 현재 위치를 표기하는 정도에 그쳤다.
최초의 내비게이션은 일본의 자동차업체 혼다(Honda)가 1981년 개발한 ‘일렉트로 자이로케이터(Electro Gryrocator)’로 알려져 있다. 이 내비게이션은 자이로스코프(3개의 축을 통해 회전체가 어떤 방향이든 자유롭게 가리킬 수 있는 장치)와 필름형 지도를 바탕으로 한 아날로그 방식이다. 목적지까지의 경로가 지도 위에 표시되고, 자이로스코프의 방향감지기능이 자동차를 안내한다. 자이로스코프의 가속도를 적분해 속도를 구하고 이 속도 값을 바탕으로 이동거리를 구하는 관성항법(inertial navigation)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하지만 한정된 화면에서 지도를 보여주려면 대축척지도(축척이 1:5,000보다 큰 지도)를 써야 했고, 여러 경로를 겹치게 표기하는 과정에서 실제와 오차가 생기는 한계가 적지 않았다. 혼다는 내비게이션을 완성 후 1981년식 혼다 어코드 차량에 옵션으로 제공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1985년에는 미국 자동차용품업체 이택(Etak)이 전자지도를 채용한 ‘이택 내비게이터(Etak Navigator)’를 발표했다. 이 내비게이션은 초창기 컴퓨터 CPU인 intel 8088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특이하게도 카세트테이프를 저장매체로 사용했다. 테이프의 저장용량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LA지역의 지도를 담는 데에도 3~4개의 테이프가 필요했다. LA의 면적(1200㎢)은 남한 면적(9만 9천㎢)의 80분의 1에 불과하므로 한국에서 상용화가 됐다면 최소 240개 이상의 테이프가 필요한 셈이다. 작동원리로는 전자 나침반과 바퀴에 설치한 센서를 통해 도착 지점을 추정하는 추측항법(dead reckoning)이 쓰였다. 이택은 이 내비게이션을 수천 명에게 판매했으며, 이 중에는 마이클 잭슨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초창기 내비게이션들은 당시 자동차 산업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지만, 정확도가 낮아 대중화에는 실패했다. 이에 GPS(위성위치확인시스템, Global Positioning System)를 이용해 정확도를 높인 제품들이 속속 발표되기 시작했다. GPS는 GPS 위성의 신호를 받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위치를 측정할 수 있는 항법시스템이다. 이후 미국과 일본의 여러 업체를 통해 ‘최초의 GPS 내비게이션’을 표방한 제품이 선보였으나, 내비게이션이 본격적으로 대중화된 것은 미국이 GPS 위성을 전면 개방한 2000년부터다. 미국은 1970년대 군사목적으로 24개의 GPS 위성을 쏘아 올렸으며, 2000년부터 민간에서도 GPS 위성을 사용할 수 있도록 민간용 코드를 개방했다. 이후로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GPS 내비게이션 제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7년에 자동차 매립형 제품이 출시됐으나, 비용문제로 대중화에 어려움을 겪다가 2004년 내비게이션 전용 단말기가 잇따라 출시되면서 붐을 이루었다. 파인디지털(파인드라이브), 현대오토넷(폰터스), 팅크웨어(아이나비), 지오텔(엑스로드), 아이스테이션(아이스테이션) 등이 대표적인 내비게이션 개발/생산 업체다.
GPS 내비게이션의 구성
GPS 내비게이션은 크게 GPS 수신기, 전자지도, 부가기능으로 구성된다. 이 중 GPS 수신기는 자동차의 현재 위치와 목적지를 찾을 수 있는 내비게이션의 핵심장치다. 현재 지구 밖에는 미국, 중국, 일본 등 여러 국가에서 쏘아 올린 수십 개의 GPS 위성들이 돌고 있으며 우리나라는 미국의 GPS 위성에서 신호를 받는다. 총 24개 중 3개 이상의 위성에서 신호를 받아 각각의 거리를 계산하면 GPS 수신기의 위치값을 얻게 되고 전자지도에 자신의 위치가 표시된다.
전자지도는 과속카메라, 주유소, 도로, 건물 등의 정보가 담긴 디지털 지도로, 표준 규격이 없기 때문에 제조업체마다 조금씩 다르다. 전자지도 제작업체는 GPS 수신기를 장착한 차량을 통해 주기적으로 현지 조사를 실시해 변경된 부분을 지도에서 갱신한다. 사용자는 CD롬이나 USB 메모리와 같은 저장매체를 이용해 갱신된 지도 데이터를 내비게이션 기기로 옮겨야(업데이트) 한다. 이 업데이트를 게을리하면 지도의 정확성이 떨어져 잘못된 길로 들어설 가능성이 있다. 최근에는 이동 인터넷(와이브로)을 통해 자동으로 지도를 업데이트하는 제품도 출시됐다.
초기 내비게이션은 길 안내에 그쳤지만 기술의 발달로 인해 점차 새로운 기능이 첨가되기 시작했다. DMB 방송 수신, 동영상 재생, MP3 재생, 게임 등 다양한 기능을 탑재한 멀티미디어 종합 기기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DMB 기술을 도입하면서 실시간 교통정보 수집도 가능해졌다. DMB 방송망을 이용해 교통정보를 내려받는 기술표준인 TPEG(Transport Protocol Expert Group) 전용 단말기를 이용하면, 실시간으로 교통정보를 탐색해 최단거리 코스로 주행할 수 있다. 또한 경로 비교, 관심 지역 정보, 사고 정보, 생활 정보 등이 실시간으로 반영된다.
내비게이션의 전망
내비게이션은 설치 위치에 따라 매립형(일반적으로 자동차 센터페시아 쪽에 장착)과 거치형(자동차 대시보드 위에 거치)으로 나뉜다. 자동차협력업체가 빌트인(built-in) 방식으로 장착하는 매립형은 초창기 내비게이션 시장을 주도했다. 매립형의 장점으로는 일체감을 꼽을 수 있다. 차량 환경에 최적화됐기 때문에 차량과 정보가 연동될 뿐 아니라 미관상 보기 좋고 내구성도 강한 편이다. 하지만 수백만 원에 달하는 비용으로 인해 크게 인기를 얻지 못했다. 이후 시장은 전문 내비게이션 업체들이 내놓은 애프터마켓용 거치형 제품들이 대중화를 이끌었다. 주력 제품들의 가격이 30만원에서 50만 원대로 매립형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치대를 달기 위한 별도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점과 주행 중 바닥으로 떨어져 교통사고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단점으로 지적되기도 했다. 결국 디자인과 안전성에서는 매립형이 우위지만 비용에서는 거치형이 앞섰다.
이후 자동차협력업체들이 100만 원 이하의 매립형 제품을 출시하면서 가격 경쟁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전문 내비게이션 업체들도 매립형 제품을 잇달아 선보이며 대응에 나섰다. 거치형 제품을 차 내부에 매립하는 애프터마켓 시장도 등장했다. 이제 내비게이션 시장은 매립형과 거치형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레드오션으로 변모했다.
여기에 스마트제품까지 뛰어들면서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GPS를 내장한 스마트폰들은 애플리케이션(이하 앱)만 설치하면 바로 내비게이션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실제로 KT에서 보급한 아이폰용 내비게이션 앱은 두 달 만에 다운로드 40만 건을 기록하기도 했다. 또한 스마트폰에 이어 7인치 이상의 큰 화면을 앞세운 태블릿 PC들이 내비게이션 시장을 위협하고 있다. 이에 업계에서는 내비게이션 시장이 태블릿 PC에 잠식당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수세에 몰린 내비게이션 업체들은 다양한 활로를 모색 중이다. 일부 업체는 주력 맵을 스마트폰제품에 기본 탑재하기로 결정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더 큰 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계산이다. 또 일부 업체는 3D 내비게이션을 차세대 주력제품으로 내세우고 있고 일부는 단말기 기능 다양화로 시장 대응에 나섰다. 하지만 스마트폰, 타블렛 PC 등의 모바일 제품에 대항해 얼마만큼의 효과를 거둘지는 미지수다. 이제 내비게이션 시장은 승자를 가늠하기 어려운 안갯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글 / IT동아 서동민(cromdandy@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