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임의 세계] 내 말은 일을 잘 하고 있을까? 게임구조: 일꾼놓기

안수영 syahn@itdonga.com

일반적으로 '전략 게임'이라 하면, 다양한 자원이 등장하며 그 자원들을 이용하는 방법을 게임 규칙으로 한다. 그리고 점수를 얻는 방법, 게임에서 승리하는 조건 등을 갖춘 것이 특징이다. 전략 게임의 주된 재미는 주어진 기회에 어떤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 결과가 판이하게 달라지고, 그렇기에 많은 생각을 요구한다는 점일 것이다. 주어진 자원으로 어떤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 이후에 할 수 있는 전략이나 행동이 제한되기 때문이다. 특히 '턴 방식의 게임(참가자가 정해진 순서대로 게임을 진행하는 방식)'은 한 턴에 할 수 있는 행동의 기회도 제한해 플레이어로 하여금 선택의 기로에 서게 한다.

'문명(Civilization)'과 같은 PC게임의 경우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풍부하지만 행동 기회가 크게 제약됐고,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Heroes of Might and Magic)' 시리즈는 각 성마다 한 턴에 원하는 건물 증축 기회 한 번과 각 영웅마다 이동할 기회 한 번으로, 한 턴에서 할 수 있는 행동을 제약한다. 그 외에 'X-COM'이나 '재기드 얼라이언스' 게임의 전술 모드에서는 행동 포인트 배분이라는 방식을 사용한다. (최근의 X-COM는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이 부분을 간소화했다)

보드게임은 여러 사람이 함께 즐기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만큼, 전체 게임 시간이 너무 길지 않아야 한다. 한 턴이 진행되는 동안 다른 사람이 기다리는 시간도 고려해야 하기에, 게임 규칙을 간결하게 설계하기 마련이다. 즉, 전략형 보드게임의 게임 설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플레이어들의 행동 기회를 제약하고 배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현대의 전략형 보드게임의 발전은 이런 행동 기회 배분을 위한 게임 구조(Game Mechanics)의 발전에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다양한 행동 가운데 1~2가지를 선택하고 차례를 마치는 스타일, 자원이나 행동 기회를 얻기 위해 다른 플레이어와 경매를 하는 스타일, 모두가 원하는 행동을 고른 뒤 동시에 선택하는 스타일 등 다양한 방식이 시도됐다.

일꾼놓기 메커니즘의 유행, 케일러스

케일러스
케일러스

일꾼놓기는 2004년 '케일러스(Caylus, 2004)'라는 게임이 크게 성공한 이후, 그 장점이 크게 부각돼 현재의 전략 보드게임에서 가장 흔히 쓰이는 게임 구조가 됐다. 이전에도 비슷한 방식이 시도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케일러스가 출시된 이후에야 게임 구조 분류에 '일꾼놓기(Worker Placement)'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일꾼놓기란, 플레이어에게 행동 기회를 의미하는 일꾼 말 여러 개를 제공하고, 이것을 돌아가며 원하는 행동 칸에 놓으며 진행하는 게임 규칙을 뜻한다. 보통, 일꾼놓기 게임에서 게임판은 여러 가지 행동이 표시된 칸으로 이루어지며, 각 플레이어들은 여기에 일꾼 말을 놓으면서 주어진 행동을 한다. 단, 일꾼 말을 행동 칸에 놓는 것으로 다른 플레이어가 이 행동 칸을 사용하지 못하게 막는 효과도 있으니, 하고 싶은 행동을 모두 할 수는 없다. 또한 다른 사람의 전략을 읽지 못하면 전략이 꼬일 수도 있다. 일꾼 말은 모두가 주어진 일꾼 말을 다 사용한 뒤 회수한다.

행동 선택 하나에 작은 규모의 관리 개념, 경쟁과 상호 작용, 다음 차례까지 원하는 행동 칸이 점유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긴장감 등 여러 재미 요소가 섞여있는데, 이 요소들이 단순하게 말을 놓는 행동 하나로 표현된다. 이 점이 당시 플레이어들에게 매우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

일꾼놓기 메커니즘을 확립한 케일러스의 플레이
장면
일꾼놓기 메커니즘을 확립한 케일러스의 플레이 장면

이 게임구조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케일러스는 현재 이익이 되는 행동을 포기하는 대신 이후의 속도 경쟁을 위해 턴 순서를 조정하는 행동 칸, 게임 후반에 더 효율적인 행동 칸의 추가, 자원을 쓰면 얻을 수 있는 추가 일꾼 말, 행동 칸 자체를 소유하고 상대가 사용할 때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요소 등을 갖췄다. 이러한 요소들을 갖춘 덕에 완성도가 높았으며, 해당 요소들은 이후의 유사 게임에도 적극적으로 반영됐다.

어쩌면, 케일러스의 의의는 대전 액션 게임 '스트리트 파이터2'의 의의에 비할 수도 있겠다. 다양한 캐릭터, 캐릭터에 따른 상성, 커맨드 입력 방식의 필살기 사용 등 '스트리트 파이터2'에서 완성된 개념 대부분이 현재의 대전 액션 게임에서 그대로 쓰이고 있는데다, 그 성공 이후 수많은 유사 작품이 나오는 선구자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일꾼 놓기 게임의 기원

일꾼놓기 게임구조의 대명사는 케일러스지만,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리차드 브리즈(Richard Breese)'의 key시리즈 중 하나인 키덤(Keydom, 1998)을 꼽을 수 있다.

리차드 브리즈의 Key 시리즈는 2014년 현재 7개의 작품이 발매됐는데, 모두 리차드 브리즈의 개인 기업이었던 R&D게임즈에서 한정판으로 발매됐다. 현재는 구하기가 상당히 어렵지만, '키덤과 키세드랄(Keythedral, 2002)' 등 몇몇 작품은 주요 보드게임 출판사를 통해 재판된 덕에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키덤은 '알라딘의 용(Aladdin’s Dragons, 2000)'이라는 이름으로 아트웍 및 게임 배경이 변경돼 리오그란데 게임즈에서 출시됐다. 알라딘의 용(키덤)은 뛰어난 게임성으로 게임 매거진으로부터 2001년 올해의 게임상을 받았지만, 국내에서는 헐값에 팔리면서 저평가된 게임이다.

일꾼놓기 메커니즘의 선구자, 키덤. 출처:
boardgamegeek.com
일꾼놓기 메커니즘의 선구자, 키덤. 출처: boardgamegeek.com

<일꾼놓기 메커니즘의 선구자, 키덤. 출처: boardgamegeek.com>

비공개 경매(Blind Bidding)로 진행되는 이 게임은 오늘날 다시 돌아보았을 때 일꾼놓기 게임구조의 초기 형식이라 볼 만하다. 이 게임에서 각 플레이어들은 1부터 9까지(3을 제외한) 숫자 토큰을 각 방마다 보이지 않게 배치한다. 그리고 모든 토큰을 펼치고 숫자를 비교해 그 방의 전리품을 획득한다. 전리품을 통해 유물 4개를 먼저 모으면 게임에서 승리한다.

키덤의 재판, 알라딘의 용
키덤의 재판, 알라딘의 용

게임 디자이너 리차드 브리즈는 2013년 영국 게임 엑스포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일꾼놓기 게임구조의 기원에 대해 살짝 엿볼 수 있다.

"1995년은 클라우스 토이버 (Klaus Teuber)의 게임, '카탄의 개척자(The Settler of the Catan, 1995)'의 해였어요. 저는 카탄을 즐겼지만, 내재적인 운 요소, 주사위 굴림을 좋아하지는 않았어요. 저는 주사위 없이 같은 효과를 달성하고 싶었고, 그것이 게임 판 위에 일꾼을 놓는 것으로 이어졌어요. 이게 키덤의 중심 게임구조가 되었죠"

사실 일꾼놓기와 비슷한 성격의 게임은 '키덤(keydom)'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외국의 유명 보드게임 커뮤니티인 보드게임긱(boardgamegeek)의 유저들은 다음과 같은 논리에 다른 게임들이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일꾼놓기 게임구조와 다르다고 판단한다.

1. 플레이어들은 한정된 장소에 일꾼을 놓기 위해 경쟁한다.
2. 일꾼을 배치하면 자원이나 능력을 플레이어에게 제공한다.
3. 일반적으로 각 차례의 마지막에 모든 일꾼이 제거된다.
4. 각 플레이어는 여러 개의 일꾼을 가진다.

주요 보드게임

대지의 기둥과 석기시대
대지의 기둥과 석기시대

'대지의 기둥(The Pillars of the Earth, 2006)'과 '석기 시대(Stone Age, 2008)'는 대표적인 일꾼놓기 게임의 명작으로 평가된다. '켄 폴리트(Ken Follet)'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 작품은, 사실 케일러스와 비슷한 시기에 개발, 출시돼 일꾼놓기 게임구조의 대세를 열었다. 석기 시대는 행동 칸을 선점하는 대신 행동 칸에 일꾼을 여러 명 투입할 수 있고, 그 수만큼 주사위를 굴림으로써 확률에 따라 행동의 효율이 결정되도록 했다.

한동안 보드게임순위 1위를 석권한
아그리콜라
한동안 보드게임순위 1위를 석권한 아그리콜라

'아그리콜라(Agricola, 2007)'는 작가 '우베 로젠베르크(Uwe Rosenberg)'가 케일러스를 재해석해 만든 작품이다. 이 작품은 카드 조합을 통한 방대한 전략 요소와 뛰어난 밸런스, 아기자기한 경영의 잔재미 등으로 세계 보드게임 플레이어들을 매혹시켰다. 중세 시대의 농경이라는 테마를 잘 버무리면서 더욱 치열한 행동 칸 쟁탈전을 보여준 아그리콜라는 케일러스 이후 이 게임 구조를 대표하는 작품이 됐다.

르 아브르
르 아브르

'르 아브르(Le Havre, 2008)'는 아그리콜라의 작가 우베 로젠베르크가 2008년 아그리콜라와 비슷한 스타일의 작품으로 발매해 큰 화제를 일으킨 작품이다. 작가 우베 로젠베르크는 보드게임긱의 한 인터뷰에서 "아그리콜라가 케일러스를 자기 방식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라면, 르 아브르는 케일러스와 비슷한 느낌의 작품을 시도한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게임 내 주 득점 방법이 건물 짓기이고, 그 건물이 행동 칸이라는 점, 행동 칸을 소유하면 다른 플레이어로부터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점 등이 케일러스와 유사하다. 최근 우베 로젠베르크는 그의 일꾼놓기 게임구조에 대한 경험을 집대성한 카베르나(Caverna: The cave Farmers, 2013)를 출시했다. 현재 이 작품은 외국 보드게임 순위에서 그의 기존 일꾼놓기 게임인 아그리콜라, 르 아브르와 경쟁하는 진풍경을 보이고 있다.

톱니바퀴가 인상적인 게임, 촐킨
톱니바퀴가 인상적인 게임, 촐킨

체코게임즈(Czech Games Edition)가 출시한 '촐킨: 마야인의 달력(Tzolk'in: The Mayan Calendar, 2012)'은 톱니바퀴 모양의 컴포넌트가 눈에 띄는 작품이다. 일꾼을 놓는 곳은 고정되어 있지만, 매 턴마다 톱니바퀴의 회전을 통해 행동 칸이 달라지기 때문에 일꾼을 놓고 빼는 계산이 중요한 게임이다. 일꾼놓기의 재미있는 변형인 셈인데, 국내 유저의 취향과 잘 맞아 떨어지면서 저렴한 가격, 예쁜 컴포넌트를 바탕으로 많은 인기를 누렸다. 사실 일꾼놓기 게임에서는 일꾼을 늘려 행동을 더 많이 하는 것이 확실한 이점이 된다. 촐킨이 유행하며 초반에 일꾼을 늘리는 전략이 크게 부상하면서, 게임 밸런스 측면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2013년 확장판이 출시된 이후 이러한 논란이 수그러들었고, 여전히 좋은 게임으로 평가받고 있다.

로즈 오브 워터딥. 출처:
boardgamegeek.com
로즈 오브 워터딥. 출처: boardgamegeek.com

<로즈 오브 워터딥. 출처: boardgamegeek.com>

'매직: 더 개더링(Magic: the Gathering)'으로 유명한 게임 제작사, '위자드 오브 코스트(Wizards of the Coast)'는 던전 앤 드래곤즈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로즈 오브 워터딥(Lords of Waterdeep, 2012)'이라는 일꾼놓기 게임을 선보였다. 이 게임은 판타지 테마를 잘 녹여내면서 호평을 받았다. 퀘스트를 해결하기 위해 전사, 사제, 마법사 등을 모집하고, 건물을 세우는 등 다양한 요소를 적절하게 결합해 일꾼놓기 게임구조에 게임 배경을 잘 녹여낸 좋은 예가 되고 있다.

일꾼놓기 메커니즘을 활용한 게임들
일꾼놓기 메커니즘을 활용한 게임들

이 외에도 일꾼놓기 게임구조의 초창기 모습을 볼 수 있는 '웨이 아웃 웨스트(Way Out West, 2000)', '버스(Bus, 1999)', 국내에서 저평가된 게임 중 하나인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3(Age of Empires III: The Age of Discovery, 2007)', 2012 올해의 전략게임상(2012 Kennerspiel des Jehre Winner)을 수상하며 일꾼이 나이를 먹는 콘셉트로 유명해진 '빌리지(Village, 2011)', 일꾼이 결혼을 하는 '헬베티아(Helvetia, 2011)', 주사위를 전략게임의 영역으로 잘 포섭한 '트루아(Troyes, 2010)', 주사위를 일꾼으로 활용하는 '프리터: 로마 집정관(Praetor, 2014)' 등은 한번쯤 즐겨 볼 만하다.

일꾼놓기 게임구조는 '플레이어의 행동 배분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라는 보드게임 작가들의 고민에 가장 좋은 대안으로 선택된 것으로 보인다. 2007년 아그리콜라가 큰 성공을 거둔 이후 작가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일꾼놓기 게임구조를 활용했으며, 이 과정에서 뛰어난 게임들이 숱하게 나왔다. 그 결과 케일러스가 기틀을 잡은 지 10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이 기세는 꺾이지 않고 있다.

글 / IT동아 보드게임 필자, 코리아보드게임즈 개발팀 박지원
편집 / IT동아 안수영(syahn@itdonga.com)

※본 기사는 네이버캐스트 게임대백과(http://me2.do/xzvgHyhc)에 함께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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