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흥망사] 현실 앞에서 무너진 열정, 삼성자동차
[IT동아 김영우 기자] 기업이란 하나의 생명체와 같다. 끊임없는 혁신과 성장을 추구하지 않으면 도태되어 생태계에서 사라지곤 한다. 이러한 과정에는 최고경영자가 어떠한 꿈과 비전을 가지고 있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다만 그 꿈이 얼마나 현실적인지, 이를 추구하는 과정이 얼마나 합리적인지를 면밀히 따져봐야 할 것이다. 냉엄한 시장경제에서 ‘비록 패배했지만 잘 싸웠다’라는 문구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선대 경영자의 유지를 실현하고 본인의 오랜 꿈을 실현하고자 야심 차게 시장에 진출했지만, 끝내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좌초된 ‘삼성자동차’의 경우가 그러하다.
삼성이 자동차를 만들겠다고?
1938년 설립된 삼성그룹은 1970~1980년대 고속 성장기를 거치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재벌 그룹 중 하나로 우뚝 섰다. 하지만 1990년대 초반 까지만 하더라도 한국 재계 서열 1위는 현대그룹이었고, 삼성그룹은 럭키금성(현재의 LG), 대우그룹 등과 함께 2~3위를 다투고 있었다. 당시 삼성그룹은 전자, 금융, 유통, 의류, 식품, 서비스, 스포츠 등 이미 다양한 분야에서 사업을 전개해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하지만 현대그룹을 누르고 재계 1위로 올라서기 위해선 새로운 분야로 진출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사내에 형성되어 있었다. 이에 대한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선택은 자동차 제조업 진출이었다.
삼성그룹의 자동차 제조업 진출은 어찌 보면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성공한다면 재계 서열을 바꿀 정도로 규모가 큰 사업이었으며, 이는 삼성그룹 정도의 역량을 가진 기업이 아니라면 시도조차 하지 못할 모험이었다. 여기에 더해 자동차 분야는 삼성그룹의 설립자이자 선대 경영자인 이병철 회장의 숙원사업이기도 했고,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이건희 회장이 상당한 자동차 마니아였다는 사실도 삼성그룹의 이러한 모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첩첩산중 뚫고 간신히 닻 올린 ‘삼성자동차’
삼성그룹은 장기간의 준비 끝에 1992년부터 사내에 자동차 사업 추진팀을 꾸리고 부산 강서구에 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과정은 수월하지 않았다. 공장을 짓기로 한 부지는 매립지나 다름없는 곳이라 지반이 대단히 약했고, 이를 보강하기 위한 기초공사에만 수천억 원에 달하는 막대한 비용이 들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곳에 공장을 설립한 이유는 이 곳이 항구와 가까워 각종 원자재의 수입 및 완성차의 수출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외에도 당시 부산 지역의 발전에 신경을 쓰던 김영삼 정부의 호감을 얻기 위한 정치적 선택이었다는 풍문이 돌기도 했다.
공장 건설의 어려움 및 정치적인 이유 외에 현실적, 경제적인 한계도 있었다. 당시 한국에는 현대, 기아, 대우, 쌍용 등 4개나 되는 완성차 기업이 한정된 내수 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당시 삼성그룹은 자동차 제조에 대한 기술이나 노하우가 거의 없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삼성그룹은 1994년, 일본의 자동차 제조사인 닛산(Nissan)과 제휴를 맺어 각종 기술을 도입하고 생산할 모델에 대한 권리도 취득했다. 당시 일본 기업들의 기술력이 한국을 크게 앞서고 있었으며, 최대한 빠른 기간내에 사업 및 제품에 대한 기반을 다져야 했던 삼성그룹 입장에선 달리 선택할 방도가 없었다.
이와 함께 삼성그룹은 기존의 완성차 제조사를 인수할 계획도 세웠다. 1993년에 삼성그룹의 계열사인 삼성생명이 기아자동차의 주식을 대량으로 사들인 것도 이런 일환이었다. 하지만 이 시도는 실패했으며 경영이 악화된 기아자동차는 1997년 10월에 법정관리에 돌입, 1998년에 현대그룹에 인수되었다.
이렇게 상황이 좋지 않았지만 삼성그룹은 자동차 사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1995년 3월에 삼성자동차 법인을 정식으로 출범시켰으며 1998년 3월, 드디어 첫번째 양산 차량인 ‘SM5’를 출시해 본격적으로 국내 승용차 시장에 뛰어들었다.
우수한 품질, 차별화된 서비스로 눈길 끈 ‘SM5’
삼성자동차는 자동차 업계의 초년생이었지만 나름의 경쟁력을 내세웠다. 가장 주목받은 건 바로 차량 자체의 품질이었다. SM5는 일본 닛산의 중형 세단인 ‘세피로(Cefiro)’의 2세대 모델을 기반으로 국내 사정에 맞게 재설계한 차량이었다. 당시 세계 정상급의 기술력을 보유했던 닛산의 기본 플랫폼을 이용한데다 엔진 및 변속기를 비롯한 핵심 부품 역시 닛산의 것을 그대로 이용하다 보니 현대자동차의 쏘나타를 비롯한 당시 국산 중형차에 비해 확연히 품질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들었다.
또한 삼성자동차는 SM5의 생산에서 출고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품질 검사를 해서 불량률을 낮췄으며, 당시 국산차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던 아연도금 강판 및 고품질 도료를 적용해 내구성도 높였다. 여기에 더해 삼성전자 등의 다른 삼성그룹 계열사에서 시행하던 고객 대상 친절 서비스를 도입, 경쟁사와 차별화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양산 차량이 SM5 뿐이라는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옵션을 준비했다. 같은 SM5라 하더라도 1.8리터 배기량에 4기통 엔진을 얹은 SM518, 2리터 배기량에 4기통 엔진의 SM520, 2리터 배기량에 6기통 엔진의 SM520V, 2.5리터 배기량에 6기통 엔진을 갖춘 SM525V 등을 출시했다. SM520 등의 하위 모델은 중형차인 현대 쏘나타 등과 경쟁하지만 SM525V 등의 상위 모델은 준중형차인 현대 그랜저 등과 맞먹는 성능을 갖췄다는 점을 강조하며 폭넓은 소비자들에게 어필했다.
이러한 노력, 그리고 적극적인 마케팅에 힘입어 삼성자동차와 SM5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높은 인지도를 얻을 수 있었다.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경쟁사들도 바짝 긴장해서 서비스를 보강하고 신차의 성능과 기능을 강화하는 등, 국내 자동차 시장에 새로운 흐름을 불러일으키는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너무 빨리 온 위기, 거짓말 같은 몰락
다만, 단순히 차량의 품질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성공적인 비즈니스를 이어 가기에는 대내외의 상황이 너무 좋지 못했다. 자동차 사업에 대한 기반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공장 건설 및 기술 제휴, 인력확충 등의 기본적인 사업 준비 과정에 천문학적인 비용을 투자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투자금을 회수하기 위해서는 국내 자동차 시장의 활성화가 필수적이었지만 불행하게도 SM5가 출시될 무렵인 1997년 말에 외환 위기 및 IMF 구제금융 사태가 발생, 대한민국 경제 전체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삼성자동차 역시 출범하자 마자 자본잠식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사태의 여파로 국내 자동차 시장 역시 극심한 침체를 겪었으며, 이 시기를 즈음해 기아자동차, 대우자동차, 쌍용자동차 등 상당수의 국내 완성차 업체들이 법정관리에 들어가거나 타사에 인수되는 등의 시련을 겪었다. 삼성그룹 역시 계륵이 되어버린 삼성자동차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대우그룹과 협의를 진행, 양사의 자동차와 전자 사업부를 통째로 맞바꾸는 빅딜을 시도했으나 타결이 이르지 못했다. 이후, 대우그룹은 자동차를 포함한 그룹 전체가 해체되어버리는 비극을 겪게 되었다.
삼성자동차 역시 1999년 6월, 막대한 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법정관리를 신청하게 되었다. 갈 길을 잃은 삼성자동차에 남은 선택은 청산되거나 다른 기업에 인수되는 것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2000년 7월, 삼성자동차는 프랑스의 완성차 업체인 르노에 인수되었고 법인명을 ‘르노삼성자동차’로 바꿨다.
한국 시장에서 선호도가 높은 갖춘 삼성의 이름값을 이용하기 위해 브랜드명에 ‘삼성’을 남겨두긴 했지만, 삼성카드가 일부 지분을 보유하는 것 외에 경영면에서 삼성그룹과 르노삼성자동차의 관계는 완전히 분리된 상태다. 이로서 삼성그룹의 자동차시장 진출기는 완전히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열정과 꿈만으로는 넘지 못한 현실
삼성그룹의 과감한 자동차 시장 진출은 당시 업계에 큰 충격을 줬다. 이미 안정적인 입지를 갖춘 대기업이 이미 포화상태에 있던 시장에 뛰어드는 모험을 시도한데다, 고만고만한 기존 제품만 쓰던 소비자들에게 한 차원 높은 품질과 서비스를 제공해 깊은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는 소비자들의 선택권을 넓혔으며, 경쟁사들 역시 품질 및 서비스 경쟁에 뛰어들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했다.
하지만 삼성그룹 자동차 산업 진출의 배경에는 선대 창업자의 유지, 그리고 현 경영자의 개인적인 취향이라는 다소 비합리적인 이유가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정치적인 이유로 초기투자비용이 필요 이상으로 과도하게 투입되었다는 비판도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IMF 구제금융을 비롯, 주변 상황이 극히 좋지 않았다. 결국, 첫 제품을 출시한 이듬해에 법정관리에 돌입하고 그 다음해에 외국 업체에 회사를 매각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열정은 강했지만 주변 상황과 운이 따라주지 않아 꿈을 이루지 못한 안타까운 사례라 할 수 있다.
글 / IT동아 김영우(pengo@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