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흥망사] 몰락한 인터넷 선구자, 야후

김영우 pengo@itdonga.com

[IT동아 김영우 기자] 1991년은 월드와이드웹(world wide web, www) 기반 서비스가 처음 시작된 기념비적인 해다.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이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정보를 효율적으로 검색하는 방법, 그리고 유용한 정보를 사용자에게 제공하는 방법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이런 과정에서 뉴스, 게시판, 이메일, 쇼핑, 엔터테인먼트 등 다양한 정보를 모아서 전달하는 관문인 포털(portal) 서비스가 자연스럽게 등장했다. 초창기 포털 중 가장 눈에 띄는 활약을 한 건 단연 야후(Yahoo!)였다.

야후의 창업자 제리 양(왼쪽)과 데이비드 파일로(오른쪽) (출처=위키피디아)
야후의 창업자 제리 양(왼쪽)과 데이비드 파일로(오른쪽) (출처=위키피디아)

공대생 2명이 의기투합해 세상을 바꾸다.

1994년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전자공학과 학생이던 제리 양(Jerry Yang)과 데이비드 파일로(David Filo)는 웹 서핑 중 발 견한 유용한 웹 페이지를 모아 공유하는 Jerry's Guide to the World Wide Web'이라는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 사이트는 다양한 웹 페이지를 분야별, 계층별로 분류해 제공하는 등 오늘날의 포털 서비스와 유사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사이트의 인기가 높아지자 상업화가 착착 진행되었다. 1995년 3월, 두 사람은 미국 캘리포니아에 야후 주식회사 (Yahoo! Inc.)를 설립하고 공동 창업자로 등록했다. 참고로 Yahoo!라는 이름은 소설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야후족에게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지만 이후에는 'Yet Another Hierarchically Organized Oracle(또 하나의 체계적인 조언자)' 혹은 'Yet Another Hierarchical Officious Oracle(또 하나의 비공식 조언자)'이라는 의미도 포함하게 되었다.

야후가 본격 출범한 1990년대 중반에는 야후 외에도 '라이코스(lycos)' 'MSN(Microsoft Network)' '익사이트(Excite) 등 유사한 서비스가 다수 등장해 포털 사이트 춘추전국시대를 열었다. 당시 이러한 IT 관련 서비스는 조금 눈길을 끄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투자를 이끌어낼 수 있었는데, 야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1996년 4월 야후가 미국 나스닥 시장에 주식을 상장하자 무려 8억5,000만 달러의 주식 발행액을 기록할 정도였다. 제리 양과 데이비드 파일로는 단 번에 갑부가 되었다.

1997년 당시 야후 웹사이트의 모습
1997년 당시 야후 웹사이트의 모습

자금이 넉넉해지면서 야후는 본격적인 인수 합병을 통해 사업 영역을 넓히기 시작했다. 1997년에는 웹 메일 서비스 '포일레븐(Four11) 그리고 '클래식게임 닷컴(ClassicGame.com)'을 인수해 야후 메일 야후 게임'이라는 서비스로 이름을 바꿨으며, 1999년에는 웹 사이트 제공 서비스 '지오시티(GeoCities'를, 2000년에는 이메일 목록 관리 서비스 이그 룹스(eGroups'를 인수해 각각 '야후 지오시티 야후 그룹스라는 이름으로 자사에 편입했다.

1998년 즈음 야후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포털 사이트이자 검색 서비스로 등극했다. 2000년 1월에는 주식 가격이 475달러까지 올라 최고가를 기록했으며, 네티즌의 이용률이 너무 높아 야후=인터넷으로 통할 정도였다. 비록 성사되진 않았지만 강력한 브랜드 가치를 바탕으로 전자 상거래 서비스 이베이(eBay)', 유선방송 사업자 'CNBC' 등과 도 합병을 추진하는 등 온라인 서비스 전반을 손에 넣기 위한 야심을 드러냈다.

꺼져가는 거품, 현실화된 위기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전 세계를 강타한 이른바 닷컴 버블이 꺼져가기 시작하면서 예전 같은 '묻지마 투자는 급속도로 자취를 감췄다. 라이코스같이 특히 거품이 심했던 포털 서비스는 사실상 퇴출되었다. 강력한 경쟁자가 등 장한 것도 야후의 입지를 위협했는데, 1998년에 설립해 급성장하기 시작한 구글(Google)'이 대표적이었다. 구글은 고성능 검색 엔진과 맞춤형 광고 시스템 그리고 고용량 이메일 서비스 지메일(Gmail), 2004년 인수해 2015년에 구글 포토로 이름을 바꾼 온라인 기반 사진 관리 서비스 '피카사(Picasa)' 등 혁신적인 서비스를 연이어 선보이며 이용자 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마이크로소프트 역시 1999년, 인스턴트 메신저 'MSN 메신저(MSN Messenger)' 서비스를 출시해 큰 인기를 얻었다.

야후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2004년, 이메일 저장 용량을 강화한 야후 메일 플러스(Yahoo! Mail Plus)' 2001년에는 인스 턴트 메신저 야후 메신저(Yahoo! Messenger) 등을 출시했다. 2005년에는 사진 공유 서비스 플리커(Flickr)'를 인 수해 구글 '피카사에 맞서기도 했다. 그러나 이용자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이미 타사에서 선보인 서비스를 그대로 따라 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용자들은 점차 야후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야후는 2000년 대 초반까지 미국 웹 검색 시장의 50%를 차지할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으나 2007년 즈음에는 시장점유율이 23.3%까지 추락했다.

매각도, 혁신도 실패한 CEO의 무덤

이 무렵 야후는 회사 매각을 고려하기에 이른다. 자사 포털 서비스인 MSN의 경쟁력을 높이고자 한 마이크로소프트가 가장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양사는 2005년부터 2008년까지 지루한 논의를 이어갔다. 2008년 2월, 마이크로 소프트는 주당 31달러 수준인 약 446억 달러에 인수를 제안했으나 야후는 이 금액이 너무 낮다고 판단, 주당 40달러 이상을 요구해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다. 경영이 악화되고 매각 협상도 실패하면서 야후는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2008년 초에 야후는 전체 직원 1만 4,300명 중 7%에 이르는 1,000여 명을 정리 해고했으며, 그래도 실적이 나아지지 않자 연말에는 1,500여 명을 추가로 감축했다. 그해 11월에는 창업자 제리 양이 실적 악화에 대한 책임을 지고 CEO 자리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이후 야후는 2009년 CAD 소프트웨어업체 '오토데스크(AUTODESK)'의 CEO를 지낸 전문 경영인 캐럴 바츠(Carol Ann Bartz)를 그리고 2012년에는 온라인 결제 서비스업체 '페이팔(PayPal)' 사장이었던 스콧 톰슨(Scott Thompson)을 CEO로 영입하는 등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캐럴 바츠는 사내 갈등과 실적 저조로, 스콧 톰슨 은 학력 위조 의혹을 비롯한 여러 문제가 발생해 결국 CEO 자리에서 물러나는 등 악재가 이어지며 회사의 추락을 막지 못했다. 이 당시 야후는 그야말로 'CEO의 무덤'이었다.

마지막 구원투수가 쏘아 올린 허무한 불꽃

몰락을 거듭하던 야후에 2012~2017년은 희망의 불꽃을 피우던 마지막 시기였다. 구글 부사장 출신인 38세의 젊은 엘리트 마리사 앤 메이어(Marissa Ann Mayer)가 CEO로 취임했기 때문이다. 스탠퍼드대학교 출신의 수재이자 우수한 엔지니어 그리고 열정적인 경영자이기도 한 그는 당시 미국 500대 기업 중 최연소 CEO였다. 메이어는 야후 CEO에 취임한 후 SNS 기업 '텀블러(Tumblr),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훌루(Hulu)'를 인수하는 등 5년여 동안 약 30억 달러를 투자해 50여 개의 기업을 인수했다. 사진 공유 서비스 플리커를 리뉴얼해 무료로 1TB 공간을 제공하는 등 공격적인 행보를 이어갔다. 야후는 메이어의 CEO 취임 1년 만에 주가가 2배로 오르는 등 화려하게 부활하는 듯했다.

마리사 앤 메이어(Marissa Ann Mayer) (출처=위키피디아)
마리사 앤 메이어(Marissa Ann Mayer) (출처=위키피디아)

하지만 좋은 시절은 잠깐이었다. 무리한 기업 인수는 곧 자금 압박으로 돌아왔고, 메이어 특유의 독단적인 경영방침은 큰 반발을 불러왔다. 재택근무 정책을 폐지하고, 실적 평가에서 하위에 머문 직원들을 거의 예외 없이 해고하는 등 지나치게 경직된 정책을 강요한 것도 문제로 지적 받았다. 메이어 자신이 아이를 출산한 후 불과 2주 만에 업무에 복귀할 정도로 엄청난 일 중독자인 것도 위와 같은 문제와 무관하지 않았다.

메이어가 이끄는 야후는 단기적으로 반짝 주목받았을 뿐 회사의 운명을 바꾸지 못했다. 2017년 야후는 핵 심 사업이던 포털 사이트 및 뉴스, 이메일 서비스 등을 미국의 대형 통신업체 '버라이즌 커뮤니케이션스(Verizon Communications)'에 매각했다. 매도 금액은 약 48억 달러였는데, 이는 10여 년 전 마이크로소프트가 제시했던 인수 희망 금액의 10%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메이어는 같은 해 CEO직을 사임하고 회사에서 물러났으며, 야후의 남은 사업 부문은 '알타바(Altaba)'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혁신을 멈춘 혁신 기업의 말로

야후는 인터넷 여명기인 1990년대에 가장 주목받은 혁신 기업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이용하는 구글, 네이버 등 인터넷 포털 및 검색 서비스의 기본적인 형태 역시 야후에서 상당수 영향을 받았으며, 아이디어와 기술력만으로 성공을 거 둔 IT 스타트업의 롤모델이기도 했다. 하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큰 성공에 취한 탓에 자기 혁신을 잊는 실수를 저질렀으며, 위기가 현실화된 상태에서도 자신들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만용을 부려 기회를 놓치기도 했다. 이러한 흐름을 되돌리기 위해 후반기에 여러 가지 무리수를 둔 것 역시 몰락을 가속화했을 뿐이다. 발을 멈춘 혁신은 너무나 쉽게 자기 안주로 변질되며, 이는 곧 몰락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야후가 잘 보여주고 있다.

글 / IT동아 김영우(pengo@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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