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흥망사] 시대를 너무 앞서간 초음속 VIP룸, '콩코드'

김영우 pengo@itdonga.com

[IT동아 김영우 기자] 남다른 기술력으로 시대를 앞서간다는 건 참으로 영광스럽고 뜻 깊은 일이다. 다만, 안타깝게도 뛰어난 기술력이 시장에서의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제품이나 서비스를 팔리게 하는 건 '기술력'이 아닌 '상품성'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선도적인 기술을 적용한 물건이라도 이용이 불편하거나 가격이 적절하지 않으면 결국 시장에서 도태되기 마련이다. 항공기 시장에도 그런 경우가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가진 항공 기술력의 결정체이자, 우아한 디자인과 차별화된 서비스까지 제공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던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Concorde)'가 바로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의 초음속 여객기 개발 프로젝트, '콩코드'

1950년대 들어 항공여객 업계에는 제트 여객기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 보잉(Boeing)사의 보잉 707은 1957년에 첫 비행을 성공리에 마친 후, 세계의 국제항공노선을 거의 독점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제트 여객기 시장에서 보잉을 위시한 미국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경쟁관계에 있던 영국과 프랑스의 항공기 제조사들은 큰 위기를 느끼게 되었다. 특히 영국은 1949년에 세계 최초의 제트 여객기인 ‘코멧(제조사: 드 해빌렌드)’을 선보이며 기세를 올리기도 했지만, 운항하던 코멧 여객기가 잦은 추락 사고를 일으키면서 체면을 구긴 상태였다.

영국항공 소속 콩코드의 이륙
장면
영국항공 소속 콩코드의 이륙 장면
< 영국항공 소속 콩코드의 이륙 장면>

이에 1962년, 영국의 BAC(British Aircraft Corporation)와 프랑스의 쉬드아비아시옹(Sud-Aviation)은 합작을 통해 보잉사를 압도할 수 있는 초음속 여객기의 개발에 나서게 된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는 프랑스 샤를 드골 대통령의 제안에 의해 '콩코드(Concorde)'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이는 프랑스어로 '화합, 협력, 조화'라는 뜻이었다.

콩코드 프로젝트는 출범 초기부터 큰 화제를 불렀다. 당시 제트 여객기 시장의 주류를 이루던 보잉 707등은 최대 마하(음속) 0.75 정도의 아음속 밖에 내지 못했다. 때문에 이를 능가하는 초음속 여객기가 등장할 경우, 세계 여객기 시장을 뒤흔들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은 예상했다. 이에 힘입어 콩코드 프로젝트 초기에는 개발 주체인 영국과 프랑스 외에도 미국, 일본, 캐나다, 호주 등 다양한 국가의 항공사에서 100여대 이상의 콩코드를 주문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또한 영국과 프랑스의 초음속 여객기 개발 소식에 놀란 미국 보잉, 소련(러시아) 투폴레프 등의 항공기 제조사에서도 덩달아 독자적인 초음속 여객기를 개발한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난관 끝에 선보인 매혹적인 시제기

하지만 이런 긍정적인 분위기와는 별개로, 콩코드의 개발에는 기술적인 난제가 많았다. 특히 초음속을 낼 수 있는 강력한 엔진, 그리고 이를 견딜 수 있는 견고한 동체 및 안정적인 비행을 보장하는 역학 구조 등을 모두 갖춰야 했기 때문에 개발에 드는 비용은 여느 여객기 관련 프로젝트를 훌쩍 뛰어넘었다. 하지만 양국 정부의 강한 의지와 맞물려 개발진들은 끝까지 프로젝트를 밀어붙였다.

1967년 공개된 콩코드의 첫
시제기
1967년 공개된 콩코드의 첫 시제기
< 1967년 공개된 콩코드의 첫 시제기>

이런 난관을 뚫고 1967년, 프랑스의 툴루즈에서 콩코드의 첫 시제기가 공개되었다. 드디어 선보인 콩코드는 디자인 면에서 기존의 여객기와 다른 점이 많았다. 콩코드는 델타익(삼각형 날개) 및 극히 뾰족하면서 얇은 동체를 갖추고 있었는데, 이는 당연히 초음속 비행에 최적화 하기 위함 이었다. 이런 독특하면서 매혹적인 디자인 덕분에 콩코드는 공개와 동시에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초음속 여객기의 시대는 바로 눈 앞에 온 것 같았다.

콩코드와 유사한 외형을 갖춘
Tu-144
콩코드와 유사한 외형을 갖춘 Tu-144
< 콩코드와 유사한 외형을 갖춘 Tu-144>

다만, 이날 공개된 콩코드는 이름 그대로 외형만 보여주었을 뿐, 비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에도 콩코드의 시험비행이 계속 미뤄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소련의 투폴레프에서 개발하던 초음속 여객기인 Tu-144가 콩코드보다 앞선 1968년 12월 31일에 첫 시험비행을 했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사람들은 콩코드 프로젝트의 성공 가능성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참고로 Tu-144는 콩코드와 매우 유사한 외형을 갖추고 있었다.

손 들어버린 경쟁자들, 뚝심의 콩코드

콩코드의 첫 비행은 Tu-144보다 2개월 정도 늦은 1969년 3월 2일에 이루어졌으며, 같은 해 10월 1일의 비행에서 콩코드는 처음으로 음속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콩코드를 둘러싼 주변 상황은 점차 악화되고 있었다. 콩코드는 마하 2 이상의 초음속 비행이 가능했지만,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소닉붐(sonic boom) 현상이 문제였다. 이는 초음속으로 비행하는 항공기에서 발생하는 강한 파동이 지상에 도달해 엄청난 소음과 충격을 주는 현상인데, 이 때문에 지상에 있는 건물의 유리창이 깨질 정도였다.

콩코드의 첫 비행(1969년)
콩코드의 첫 비행(1969년)
< 콩코드의 첫 비행(1969년)>

또한 콩코드는 초음속 여객기인 탓에 일반적인 제트 여객기에 비해 동일 비행 거리당 연료 소비량이 몇 배나 많았는데, 1970년대 초부터 본격화된 석유파동(오일쇼크) 때문에 갑자기 연료비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이렇게 초음속 여객기의 효용성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미국 보잉은 초음속 여객기인 보잉 2707의 개발 프로젝트를 중단했다. 그리고 소련 루톨레프의 Tu-144 역시 연 이은 추락 사고를 일으키면서 여객기로는 거의 쓰이지 못하고 화물용으로만 간간히 이용하다 운행이 중단된다.

이런 상황에서도 콩코드는 끝까지 개발을 진행했으며, 1976년 1월 21일부터 드디어 정기 운항을 개시하게 된다. 개발 프로젝트 출범 후 14년만의 성과였다. 하지만 콩코드 개발 당초에 세계 각지의 항공사로부터 받은 100여대 이상의 주문량 중 상당수가 취소되었다. 최종적으로 양산된 콩코드는 영국항공과 에어프랑스에서 주문한 16대에 그쳤으며, 초기에 만든 시험용 기체 4대까지 포함, 콩코드는 총 20대만 생산되었다.

드디어 날개 편 '하늘의 VIP룸'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항공과 에어프랑스는 콩코드를 자사의 상징으로 삼아 최선을 다해 운용했다. 기체 실내를 최대한 고급스럽게 꾸미는 한편, 기내식 및 음료, 편의장비 등은 다른 여객기에서 볼 수 없는 최고급품을 적용했다. 이와 함께 콩코드 전용의 자격을 갖춘 승무원만 선별해 서비스에 투입 하기도 했다.

콩코드를 이용해 해외 순방에 나선 엘리자베스 2세
부부(1991년)
콩코드를 이용해 해외 순방에 나선 엘리자베스 2세 부부(1991년)
< 콩코드를 이용해 해외 순방에 나선 엘리자베스 2세 부부(1991년)>

또한, 일반 여객기로는 거의 7시간 가까이 걸리는 대서양 횡단 항로를 콩코드는 3시간대에 주파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콩코드는 시간이 특히 부족한 고위공직자나 대기업 관계자 등이 주로 이용하곤 했다. 영국항공과 에어프랑스는 이 점에 착안, 관계당국의 협조를 얻어 콩코드 승객은 다른 승객들 보다 우선적으로 각종 공항 관련 수속을 통과할 수 있게 배려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콩코드는 VIP 승객들이 가장 선호하는 여객기로 자리를 굳혔다

멋지지만 실속 없는 콩코드?

하지만 그럼에도 콩코드의 상업적인 가치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의문이 제기되었다. 초음속 항공기 특유의 소닉붐 현상 탓에 항로 주변에 거주하는 주민들로부터 지속적인 항의를 받았으며, 이 때문에 콩코드는 넓은 바다 위를 비행할 때 외에는 초음속을 낼 수 없었다. 운용 대수가 극히 적은 이유도 맞물려 콩코드는 극히 제한된 항로 및 한정된 시간에만 투입이 가능했다

콩코드의 실내
콩코드의 실내

또한 초음속에 최적화된 매우 좁은 동체를 갖추고 있는 점도 문제였다. 보잉 747과 같은 일반 제트 여객기가 300~400명의 승객을 동시에 태울 수 있는 반면, 콩코드의 최대 탑승 인원은 100명 정도에 불과했다. 게다가 콩코드는 연료 소모율이나 유지보수 비용 역시 일반 여객기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위와 같은 이유들로 인해 콩코드는 다른 여객기에 비해 높은 운임을 받았는데, 이 역시 이용 승객 수를 늘리는데 장애요인이 되었다.

'가장 안전한 여객기'가 부른 참혹한 사고

위와 같은 불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콩코드는 1976년부터 2000년까지 꾸준히 운항을 계속했다. 양국 항공사에서는 자사의 자존심인 콩코드의 운용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이렇다할 대형 사고가 일어나는 일도 없었다. 덕분에 콩코드는 '가장 빠른 여객기', '하늘의 VIP룸' 외에도 '가장 안전한 여객기'라는 수식어가 따라붙곤 했다. 하지만 2000년 7월 5일, 에어프랑스 소속의 콩코드 1대가 파리의 사를 드 골 공항을 이륙하고 잠시 후에 추락, 승객과 승무원, 그리고 지상에 있던 사람들을 비롯한 총 113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사고 당시 화염에 휩싸인 에어프랑스의
콩코드
사고 당시 화염에 휩싸인 에어프랑스의 콩코드
< 사고 당시 화염에 휩싸인 에어프랑스의 콩코드>

당시 콩코드의 조종사 및 승무원들은 숙련된 베테랑들이었으며, 기체의 정비 상태도 양호했다. 하지만 해당 공항의 활주로에는 앞서 이륙한 항공기에서 떨어져 나온 부품 조각이 방치된 상태였다. 콩코드는 이를 모르고 이륙을 시도하다가 이 부품 조각을 랜딩기어(바퀴)로 밟게 되었고, 이로 인해 파열된 콩코드의 타이어 조각이 기체의 연료탱크를 손상시키는 바람에 참사가 일어났다고 조사단은 발표했다.

날개 접은 콩코드, 쓸쓸한 퇴장

이 사고의 여파로 모든 콩코드는 운항을 정지했다. 예전의 콩코드는 가장 안전한 여객기로 통했지만 이 사고 이후, 극히 사소한 원인으로도 대형참사를 유발할 수 있는 취약한 여객기라는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영국항공과 에어프랑스는 콩코드의 취약점을 최대한 보강한 뒤 2001년 11월 7일부터 운항을 재개했다.

하지만 2001년 미국에서 일어난 9.11 테러의 여파로 항공기를 이용하는 승객의 수가 크게 줄어들었으며, 항공기 탑승을 위한 절차도 눈에 띄게 엄격해졌다. 콩코드 역시 예전과 같이 빠르게 공항 수속을 통과할 수 있는 특권을 승객들에게 제공할 수 없게 되어 인기 하락을 피할 수 없었다. 이는 가뜩이나 낮았던 콩코드의 운용 수익을 더욱 감소하게 만들었다. 결국 2003년 10월 24일의 비행을 끝으로 모든 콩코드는 퇴역하게 되었다.

21세기에선 보기 힘든 낭만과 멋

20세기 후반은 인류의 기술 진보가 대단히 빠르게 이루어지던 시대였다. 특히 이 시기는 동서간의 냉전이 절정을 이루었기에, 국가적인 단계에서 경쟁적으로 자신들의 기술을 개발, 과시하곤 했다. 대륙을 넘어 핵공격이 가능한 ICBM(대륙간탄도미사일)을 선보이거나, 인류를 달에 착륙 시키는 등의 놀라운 기술이 이 때를 즈음해 등장했다. 경제성이 의심스러움에도 불구하고 가장 빠른 초음속 여객기를 세상에 내놓겠다는 일념으로 등장한 콩코드 역시 그 시기의 작품이다.

하지만 21세기가 되면서 냉전 시대는 끝났다. 그로 인해 상징적인 위신 보다는 경제성과 효율성, 그리고 안정성이 더욱 중요한 덕목으로 부상했다. 콩코드가 개발되고 30년 가까이 운항을 하는 동안, 그 아무도 새로운 초음속 여객기를 내놓지 않았다. 단순히 빠르고 멋진 여객기 보다는 실용적이고 경제적인 여객기를 더 원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콩코드의 뒤를 잇는 새로운 초음속 여객기가 등장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콩코드는 앞으로도 한동안 항공산업의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주역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비록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으나, 21세기의 항공기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좀처럼 찾기 힘든 멋과 낭만, 그리고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글 / IT동아 김영우(pengo@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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