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CEO 열전] 펩시맨에서 애플맨으로... 스마트폰의 아버지 존 스컬리
[IT동아 강일용 기자] "2류 브랜드 펩시콜라를 코카콜라와 동급으로 끌어올린 마케팅의 천재", "스마트폰의 아버지", "잘못된 선택으로 애플을 나락으로 빠뜨린 남자"... 한 남자를 두고 나오는 다양한 평가다. 바로 펩시콜라와 애플의 전 최고경영자 존 스컬리(John Sculley)의 얘기다.
CEO로서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나뉜다. 펩시콜라 최고경영자로서 그가 보여준 능력은 감히 경영계의 전설이라고 부를 만하다. 미국내 시장점유율이 9:1 수준으로 밀리고 있던 펩시콜라를 성공적인 마케팅 플랜으로 코카콜라의 경쟁자로 끌어 올렸다.
반면 애플 최고경영자로서 보여준 모습은 영 실망스럽다. 사내 정치와 편 가르기 등으로 전횡을 일삼던 망나니 창업자 '스티브 잡스'를 쫓아내고 회사를 안정화시키는데는 성공했으나, 두 가지 치명적인 실수로 애플의 몰락에 일조했다. 최고경영자로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갖춘 그의 일대기를 살펴보자.
설탕물을 판 마케팅의 천재
스컬리는 단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 인물이다. '마케팅의 천재'. 그는 1939년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브라운 대학교를 졸업한 후 펜실바니아 대학교 와튼 스쿨에서 MBA(경영학 석사)를 수료했다. 자신의 재능을 펼치기 위해 가장 먼저 선택한 직장은 ‘펩시콜라’였다. 그의 예전 장인이 펩시콜라의 회장이었던 것도 이러한 선택을 한 이유 가운데 하나다.
1967년 펩시콜라에 입사한 그는 1970년, 불과 31세의 나이로 능력을 인정받아 마케팅을 총괄하는 부사장의 자리에 오른다. 입사한지 고작 3년만에 이룬 결과다. 유례 없이 빠른 승진이지만, 이는 당시 펩시콜라가 얼마나 절박한 상황에 처해있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펩시콜라는 설탕 및 사탕수수 투자 실패를 감당하지 못하고, 회사의 주인이 계속 바뀌는 등 혼란한 상황에 처해있었다. 시장점유율은 처참했다. 코카콜라에 밀려 브랜드 자체가 존폐 위기에 처해있었다. 회사 매각마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만큼 인재 부족에 시달렸고, 덕분에 스컬리가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스컬리는 체질 개선과 마케팅만이 회사를 살려내는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부사장으로서 그는 두 가지 작업에 집중했다. 첫 번째는 비효율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던 생산 공장을 개선한 것이다. 그는 만성 적자에 시달리는 스낵 사업 부문 개선에 집중했다. 방만하게 운영되던 공장의 직원을 모두 해고하고, 제품 품질 관리와 재무 상태 개선에 집중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1억 5600만 달러의 적자를 내던 스낵 사업 부문이 3년 뒤 4000만 달러의 흑자를 낼 수 있게 되었다.
두 번째는 공격적인 마케팅이다. 그는 마케팅 수단으로 당시 막 떠오르고 있던 매체인 TV에 주목했다. 매년 20만~30만 달러에 이르는 거금을 투입해 훗날 '콜라 전쟁(Cola wars)'이라고 불리게 되는 광고 경쟁을 시작했다. 콜라 전쟁이란 1970년 이래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펩시콜라와 코카콜라의 광고 전쟁이다. 한 업체가 새로운 음료수를 개발해서 시장에 투입하면 다른 업체가 이와 유사한 음료수를 개발하고 시장에 투입하면서 공격적인 광고를 진행했다. 두 회사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상대 제품보다 우리 제품이 더 뛰어나다는 광고를 TV에 송출했다. 이러한 광고 전쟁을 통해 스컬리는 사람들에게 펩시콜라가 망해가는 회사가 아니라 코카콜라의 경쟁자라는 인식을 심어주는데 성공했다.
스컬리는 펩시콜라가 1963년부터 진행하고 있던 마케팅 플랜인 '펩시 시대(Pepsi Generation )'를 TV로 끌고 왔다. 당시 인기의 최정상을 달리던 유명 스타를 기용해 단순히 제품만 소개하는 광고에서 벗어나 스토리가 있는 뮤직비디오 형태의 광고를 만들었다. 이를 통해 코카콜라의 점유율을 갉아먹는데 성공했다. 펩시 시대 광고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과 함께 만든 뮤직비디오 광고다. 이 광고는 당시 미국에서 엄청난 반향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이를 통해 시장점유율을 6%에서 14%로 2배 이상 끌어올렸다.
<마이클 잭슨이 출연한 펩시 시대 TV 광고>
결정타는 1975년 실시한 블라인드 테스트(Blind taste test) 광고 '펩시 챌린지(Pepsi Challenge )'였다. 펩시 챌린지란 소비자가 눈을 가린 채 펩시콜라와 코카콜라를 시음하게 한 후 어떤 것이 더 마음에 드냐고 선택하게 한 상황을 광고로 만든 것이다. 펩시콜라는 코카콜라보다 맛이 떨어진다는 세간의 통념과 달리 블라인드 테스트를 진행한 소비자는 펩시콜라를 선택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 광고를 통해 스컬리는 '펩시콜라 = 2류 브랜드'라는 인식을 부수고 '펩시콜라는 코카콜라의 경쟁자'라는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확고하게 심어주는데 성공했다.
<호주에서 진행된 펩시 챌린지 광고>
여기에 스컬리는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펩시콜라 제품을 출시해 소비자가 취향에 맞는 양을 선택할 수 있게 했다. 이러한 스컬리의 노력으로 펩시콜라는 부진을 떨쳐내고 반등하는데 성공했다.
(이때 펩시콜라가 코카콜라를 제치고 음료 시장 1위에 올라섰다는 잘못된 정보가 돌아다니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펩시콜라의 매출이 코카콜라를 넘어선 것은 2000년대 초반이고, 그것도 콜라뿐만 아니라 다른 음료를 모두 합쳐서 가능한 수치였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스컬리는 1977년 펩시콜라의 최고경영자에 지명됐다. 역대 최연소 최고경영자가 된 것이다.
스티브 잡스를 만나다
그렇게 최고경영자에 오른 후 스컬리는 5년 동안 별 탈없이 펩시콜라를 경영했다. 하지만 한 야심만만한 청년 사업가와의 만남이 그의 삶을 바꾸게 된다. 스티브 잡스, IBM에 이어 두 번째로 거대한 컴퓨터 기업으로 떠오르고 있던 애플의 창업자였다.
당시 애플은 뛰어난 마케팅 능력을 보유하고 있고, 기업을 경영한 경험이 풍부해 젊은 창업자가 미처 챙기지 못하는 부분까지 포옹해줄 수 있는 인재를 찾고 있었다. 스컬리가 여기에 제격이었다.
잡스는 스컬리에게 애플의 최고경영자를 맡아달라고 지속적으로 설득했다. 반신반의하던 스컬리는 잡스의 마지막 한마디를 듣고 애플로 이직을 결심한다.
"설탕물이나 팔면서 남은 인생을 낭비하고 싶습니까? 아니면 나와 함께 세상을 바꿔보고 싶습니까?" (Do you want to sell sugared water for the rest of your life? Or do you want to come with me and change the world?)
이렇게 스컬리는 1983년 애플의 최고경영자로 이직하게 된다. 컴퓨터와 IT에 대해 전혀 몰랐던 그가 IT와 인연을 맺게 된 순간이다.
당시 스컬리는 실리콘밸리에 광고와 마케팅이라는 개념이 전무하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유일하게 공격적인 광고와 마케팅을 진행하던 회사가 애플이었다. 실리콘밸리의 맏형 HP는 자사 제품 광고를 전혀 진행하지 않고 있었다.
스컬리는 그의 강점이었던 광고와 마케팅 능력을 활용해 애플을 소비자에게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1984년 1월 22일, 애플은 스컬리의 지휘 아래 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 소설 '1984'의 시간적 배경이 된 바로 그 해에 1984라는 동일한 콘셉트의 광고를 방영한다. 이 광고를 통해 애플은 '압제자' IBM에 대항하는 '혁신가'라는 이미지를 소비자에게 심어주게 된다. 광고는 성공적이었다. 소비자는 익숙한 IBM PC 대신 '매킨토시'라는 생소한 제품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애플3와 리사(LISA)의 연이은 실패로 흔들리던 애플을 다시 정상 궤도로 돌리는데 성공했다.
<애플 1984>
오만한 청년 창업자와의 결별
초기에는 스컬리와 잡스의 사이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잡스 자신이 삼고초려해 데려온 만큼 둘은 언제나 붙어 다니며 긴밀하게 의견을 나눴다.
하지만 스컬리가 최고경영자로서 잡스의 전횡을 견제하기 시작하자 둘의 사이는 틀어지게 된다. 당시 잡스는 성공에 취해 '자신의 결정이 옳다'는 아집에 빠져있었다. 애플3를 설계하며 시끄럽다는 이유로 냉각팬을 제거했다. 그 탓에 애플3는 발열이 심해 틈만 나면 고장 났다. 틈만 나면 고장 나는 제품을 선택할 소비자는 없다.
<냉각팬이 없어서 잦은 고장에 시달린 애플3>
또한 세계 최초로 GUI(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를 탑재한 리사를 고안하며 사람들이 이 혁신적인 제품을 사기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열 것이라며 4000 달러라는 엄청난 가격을 매긴다. 당시의 물가 기준으로 생각하자. 차 한대를 사고도 돈이 남는 가격이다. 당연히 팔릴 리가 있나.
스컬리는 이러한 잡스의 옹고집을 반대했다. 혁신적이지만 실용적이지 않은 제품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경쟁자 IBM PC처럼 철저한 규격화만이 매킨토시의 미래라고 생각했다.
스컬리와 사이가 틀어진 잡스는 스컬리를 몰아내기 위해 계획을 꾸민다. 이 사실은 스컬리의 귀에도 들어갔고, 스컬리는 배신감에 잡스에게 이러한 소문이 사실이냐고 따지게 된다. 잡스는 부인하지 않고 "회사가 누구를 더 신임하는지 투표로 결정하자"고 받아 친다. 잡스는 창업자인 자기 대신 단순히 고용된 최고경영자인 스컬리가 쫓겨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정작 회사의 임원들을 모아 놓고 진행한 투표 자리에서 쫓아내기로 결정된 인물은 스컬리가 아니라 잡스였다. 회사 관계자들조차 오만한 창업자의 횡포에 진절머리가 나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잡스는 자신이 세운 회사에서 잘리는 굴욕을 맛보게 됐고, 스컬리는 애플의 유일무이한 권력자로서 제품 설계에 관여하게 된다.
21세기를 예언하다
스컬리의 경력을 보면 알겠지만, 그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내는 것보단 관리와 마케팅에 더 큰 강점이 있는 인물이다. 잡스를 쫓아낸 후 매킨토시1의 변종 모델과 IBM PC처럼 규격화된 제품인 매킨토시2의 출시를 지휘했다. 또한 중구난방으로 흩어져있던 개발부서를 일반적인 회사처럼 간결하게 통합해 업무 효율을 향상시켰다. 이를 바탕으로 적자에 시달리던 애플은 1986년 흑자전환에 성공한다.
스컬리는 애플과 결별했던 소프트웨어 회사를 설득해 매킨토시용 소프트웨어 개발을 추진하고, IBM 호환 PC가 장악하지 못한 틈새시장 공략에 집중했다. 이러한 전력이 성공을 거둬 애플은 IBM에 이어 컴퓨터 시장의 2인자 자리를 굳혔다. 미국 언론은 이를 두고 1989년부터 1991년을 매킨토시의 첫 번째 황금시대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스컬리에게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도 세상을 바꿀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마음 속에 품고 있었다. 그는 포터블(Portable), 나아가 모바일(Mobile)이 바로 컴퓨터의 발전 방향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1989년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애플 최초의 노트북 '매킨토시 포터블'을 출시한다. 하지만 매킨토시 포터블은 너무 두껍고(두께 10cm) 무거웠으며(7.2kg), 형태조차 우리가 알고 있는 노트북보단 서류용 가방에 더 가까웠다.
1990년 스컬리는 더 가볍고 세련된 노트북을 개발하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현대 노트북의 원형을 정립한 ‘파워북’이다. 당시 인기를 끌고 있던 도시바의 '노트북(노트북은 원래 도시바의 상표다)'의 무게는 3.6kg이었다. 파워북은 이를 2.3kg까지 낮추는데 성공했다. 또한 화면, 키보드, 트랙패드(트랙볼 포함) 등을 인체공학적으로 배치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노트북의 원형이 됐다.
<애플 파워북 150>
파워북은 포터블 제품이라고 부를 순 있어도 모바일 제품이라고 부르기엔 부족했다. 그는 더 작은 제품을 원했다. 컴퓨터와 대등한 기능을 갖추고 있으면서 우리 손에 쏙 들어오는 그 어떤 제품을.
지식 안내자 > PDA > 스마트폰
잠깐 예전 얘기로 돌아가자. 스컬리는 1987년 자서전 '오디세이'를 통해 새로운 형태의 기기를 제안했다.
1) 하이퍼 텍스트로 구성된 데이터 베이스가 모여 이루어진 거대한 네트워크에 통신망을 통해 접속할 수 있어, 이를 바탕으로 사용자가
자신이 원하는 정보에 언제 어디서나 접근할 수 있는 기기여야 한다.
2) 사용자가 정보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기기에 다양한 소프트웨어를 설치할 수 있어야 한다.
3) 언제나 휴대할 수 있도록 작고 가벼워야 하며, 배터리만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스컬리는 당시로선 생소하기 짝이 없는 이 기기에 '지식 안내자(Knowledge Navigator)'라는 이름 붙였다. 사용자가 원하는 정보를 손쉽게 찾을 수 있도록 돕는 안내자가 되라는 의미에서다.
이듬해 애플은 사람들이 지식 안내자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홍보 동영상을 제작했다. 이 동영상에서 앞에서 설명한 세 가지 개념뿐만 아니라 몇 가지 특성이 추가로 소개됐다.
4) 지식 안내자는 화면에 펜을 접촉함으로써 좀 더 쉽게 사용할 수 있고, 이 펜을 이용해 글을 적거나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5) 사용자가 적은 글씨를 인식해 그것을 하이퍼 텍스트로 바꿔주는 기능과 하이퍼 텍스트를 음성으로 읽어주는 기능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6) 펜으로 화면 속 아이콘을 선택하면 소프트웨어가 실행되는 등 직관적인 사용자 환경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지식 안내자의 여섯 가지 개념을 요즘 용어에 맞춰 바꿔보자. 1) 인터넷에 접속해 다양한 정보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2) 앱을 설치할 수 있어야 한다. 3) 터치스크린을 통해 누구나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4) 음성 인식 등 다양한 부가 기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5) 주머니에 쏙 들어갈 정도로 작고 가벼워야 한다. 6) 한번 충전하면 하루 종일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스컬리는 지식 안내자가 현실화되길 원했다. 애플 내에 팀을 꾸리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한 기기 개발에 착수했다.
그 기기의 개발이 거의 완료된 1992년, 스컬리는 세계 최대의 가전박람회 CES의 기조 연설자로 나와 지식 안내자를 대신할 새로운 용어를 소개한다. 바로 'Personal Data Assistant(개인 정보 단말기)', 줄여서 PDA라는 용어다.
스컬리는 자신이 PDA의 창조자라고 주장하진 않았다. 이러한 개념에 부합하는 기기는 따로 있다. 영국 사이언사의 '사이언 오거나이저'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스컬리는 사이언 오거나이저는 지식 탐색보다는 소프트웨어 실행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며, 애플이 출시할 PDA는 다를 것이라고 전했다. PDA의 목적은 정보 탐색이며, 소프트웨어 설치 및 실행은 그 목적을 더 쉽게 이루게 해주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스컬리와 애플은 현대 PDA의 원형으로 여겨지는 제품인 '뉴턴 메시지 패드(Newton Message Pad)'를 출시한다. 뉴턴 메시지 패드는 PDA가 어떤 기능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지 제시했다. PDA에 통신 기능을 강화한 것을 스마트폰과 태블릿PC라고 부르는 점을 감안하면, 뉴턴 메시지 패드가 두 제품의 원형이라고 봐도 무리는 없겠다. 뉴턴 메시지 패드를 고안해낸 스컬리가 스마트폰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유다.
<뉴턴 메시지 패드>
스컬리의 꿈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뉴턴 메시지 패드 출시와 함께 뉴턴 메시지 패드의 근간이 되는 ‘뉴턴 운영체제’를 다른 회사들에게 공개했다. 뉴턴 운영체제로 실행되는 다양한 형태의 기기가 등장하길 기대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뉴턴 운영체제의 생태계는 더욱 강화되고, 궁극적으로 뉴턴 플랫폼이 탄생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견이 조금 있지만, 최초의 모바일 운영체제 역시 뉴턴 운영체제라는 것이 정설이다.
스컬리의 두 가지 치명적인 실책
스컬리는 2010년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애플 CEO로 재직하면서 자신이 두 가지 치명적인 실책을 범했음을 인정했다. 그 두 가지는 다름이 아닌 뉴턴 메시지 패드를 개발한 것과 인텔 대신 IBM의 CPU를 채택한 것이다.
먼저 뉴턴 메시지 패드부터 살펴보자. 스컬리의 꿈은 처음부터 엇나갔다. 뉴턴 메시지 패드가 말 그대로 '쫄딱' 망한 것이다. 지식 안내자의 개념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뉴턴 메시지 패드는 소프트웨어가 부족하고, 필기 능력이 떨어졌으며, 배터리 사용시간이 짧았다. 뉴턴 메시지 패드가 지킨 것은 '휴대하기 편하다' 하나뿐이었다. 게다가 가격까지 비쌌다. 사용자들은 비싼 돈을 내고 뉴턴 메시지 패드를 구매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여러 제조사에서 다양한 형태의 뉴턴 제품군이 등장했지만, 사용자들의 선택을 받는데 실패했다. 모두 사이 좋게 망했다.
뉴턴은 왜 실패한 걸까. '너무 앞서 나갔다'로 요약할 수 있겠다. 당시에는 방대한 데이터의 집합(인터넷)도, 편리하게 앱을 설치할 수 있는 장소(앱스토어)도, 멀티터치 스크린도, 한번 충전하면 하루 종일 사용할 수 있는 배터리도 없었다. 기술은 20세기인데 꿈은 21세기이니, 현실과 꿈의 괴리가 큰 제품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몽상가 잡스를 쫓아낸 스컬리 자신이 현재 기술로 실현할 수 없는 꿈을 꾸었던 것이다.
두 번째 실책은 매킨토시용 차세대 CPU로 인텔의 CPU 대신 IBM의 파워PC CPU를 채택한 것이다. 1990년대초 컴퓨터 시장은 이미 인텔과 마이크로소프트의 천하였다. 모든 소프트웨어가 인텔의 CPU와 마이크로소프트의 운영체제에 맞춰 출시되었다. 당시 스컬리와 애플은 매킨토시용 CPU로 인텔의 것 대신 아키텍처가 아예 다른 IBM 파워PC CPU를 채택했다. CPU의 아키텍처가 다르다 보니 소프트웨어 개발이 어려웠고, 이는 결국 매킨토시용 소프트웨어 부족의 원인이 되었다. '윈텔'의 PC보다 시장점유율이 떨어지면서 개발 호환성도 없는 플랫폼이 탄생한 것이다. 스컬리의 이러한 결정 탓에 매킨토시는 대중화에 실패하고10년 넘게 출판과 영상 업계에 종사하는 전문가만 이용하는 컴퓨터로 전락하게 된다. 애플은 2006년에야 비로소 IBM 파워PC 대신 인텔의 CPU를 맥에 탑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두 가지 실책 이후 스컬리는 애플을 경영하는데 흥미를 잃고 만다. 결국 1993년 애플을 떠나게 된다.
스컬리가 떠난 후 애플은 갖은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적자에 시달리던 애플은 결국 예전에 쫓아낸 창업자 잡스를 최고경영자로 다시 불러들인다. 그 다음은 우리도 잘 아는 얘기다. 애플은 아이맥,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로 이어지는 성공가도를 걸은 후 세계 최고의 회사로 우뚝 선다. 스컬리가 애플을 떠난지 20년이 흐른 뒤 애플과 스티브 잡스는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통해 스컬리의 꿈 지식 안내자를 이뤄주게 된다.
노령에도 멈추지 않는 최고경영자의 꿈
거의 대부분의 책과 언론이 스컬리의 얘기를 여기까지만 다룬다. 하지만 뒷 얘기가 더 있다. 스컬리는 애플을 떠난 이후 잠깐 정치계에 투신했다가 벤처캐피탈을 설립하고 다시 실리콘밸리의 경영자로 복귀했다.
<여러 스타트업의 투자자 및 공동
창업자로 활동 중인 존 스컬리>
이후 스컬리는 여러 스타트업에 투자를 진행하다가 디지털 마케팅의 천재 데이빗 슈타인버그(David A. Steinberg)를 만나 2007년 함께 디지털 마케팅 및 데이터 분석 회사인 '제타인터랙티브'를 설립했다. 자신의 장기인 마케팅과 디지털을 결합한 영역에서 다시 가능성을 찾은 것이다. 제타인터랙티브는 설립된 지 7년만에 1억 달러가 넘는 매출을 기록했고, 10억 달러 이상의 기업가치를 인정받는 실리콘밸리의 대표적인 유니콘 스타트업(기업 가치가 10억 달러가 넘는 스타트업을 일컫는 용어)이 되었다. 제타인터랙티브는 포브스가 선정한 가장 촉망받는 회사(2014)와 100대 분석전문 스타트업(2015)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현재 스컬리는 제타인터랙티브와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오비 월드폰이라는 스마트폰 제조 스타트업의 공동 창업자로 활약하고 있다. 70살이 넘은 노령에도 불구하고 최고경영자와 창업가에 대한 꿈을 놓지 않고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글 / IT동아 강일용(zero@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