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임의 세계] 이 구역의 보스는 나야! '아임 더 보스'
아임 더 보스 한국어판 <출처: divedice.com>
게임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 함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그렇지도 않다. 컴퓨터가 등장하고 인공지능이 출현하면서, 점차 컴퓨터가 사람의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바둑이나 체스, 장기와 같이 역사가 오래된 보드게임들도 대국 프로그램들이 있다. 인공지능이 나날이 정교해지면서 프로그램이 사람보다 탁월한 실력을 보이는 경우도 많다. 최근에는 내로라하는 체스 고수들이 컴퓨터와의 대국에서 밀리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인공지능과 협상을 하는 PC 게임, '문명 5'의 한 장면. <출처: 게임동아>
'카탄의 개척자(1995)', '카르카손(2000)', '도미니언(2008)' 등 일부 보드게임들도 PC나 모바일, 콘솔 게임이 등장하면서, 원래 사람이 있었던 자리를 인공지능이 대신하기도 한다. 나도 남들도 모두가 바쁜 가운데, 게임을 함께할 사람을 찾을 필요 없이 혼자서도 즐길 수 있다는 점은 분명 매력적이다.
하지만, 함께 할 사람을 찾고 모으는 수고로움은 보드게이머들의 숙명이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정교하다 한들, 여전히 사람들을 상대로 노는 재미를 완전히 대체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한 수 한 수, 서로 간 반응을 알 수 있는 '현장감'은 디지털 매체가 주기 어려운 즐거움이다. 호흡이 닿는 거리에서는 시시한 잡담까지도 게임의 일부가 되니 말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보드게임 '아임 더 보스(1994)'는 아날로그 방식의 '현장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게임이다. 사람의 자리를 다른 무엇으로 대체할 수도, 할 필요도 없는 '협상 게임'이다.
게임 방법
보드게임 '아임 더 보스'는 세계 금융가에서 펼쳐지는 거래의 향연을 그대로 재현해낸 협상 게임이다. 투자자를 끌어들여 거래를 성사시키고 재산을 불리거나, 다른 플레이어들의 사업을 방해하면 된다.
'각 플레이어들은 가장 많은 돈을 버는 것을 목표로 한다. 돈을 벌려면 거래를 성사시켜야 하고,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투자자를 모아야 한다.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일정 수익을 약속하며 투자자를 끌어 모으면 된다. 많은 투자자 중 누구와 함께 거래를 할지, 투자를 제공받는 대가로 얼마의 수익을 나눌지, 결정은 모두 보스의 몫이다.
게임 준비 <출처: divedice.com>
'아임 더 보스'의 구성물은 투자자 카드, 게임판과 거래 카드, 게임말과 주사위, 영향력 카드 등이다. '아임 더 보스'는 3명에서 6명까지 가능한 게임이지만, 여기서는 4명이 게임을 한다고 가정하고 게임 방법을 소개한다.
먼저, 게임판을 중앙에 놓는다. 모노폴리(1933)를 연상케 하는 게임판에는 16칸의 거래 칸이 있다. 게임판의 중앙에 15장의 거래 카드를 1번부터 순서대로 보이도록 잘 쌓아둔다. 게임말을 게임판의 아무 칸에나 올려둔다.
투자자 카드. <출처: divedice.com>
각 플레이어들은 투자자 카드를 1장씩 받는다. 투자자 카드는 A에서 E까지 기호와 색으로 식별할 수 있으며, 거래의 수익을 나눌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카드다. 영향력 카드와 달리 사용하고 나서 버려지지 않아, 거의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사용하지 않는 투자자 카드는 게임판 한쪽에 놓는다.
다음으로 영향력 카드를 섞어 중앙에 더미로 쌓아놓고, 각 플레이어들에게 5장씩 나눠준다. 게임은 시계 방향으로 진행한다.
각 플레이어들은 자기 차례에 거래를 할 수 있다. 자기 차례인 플레이어는 현재 게임말이 있는 곳에서 거래를 하거나, 주사위를 굴려 이동할 수 있다. 주사위를 굴렸다면 이동한 곳에서 거래를 시작하거나 영향력 카드를 3장 가져가면 된다. 보통 주사위를 굴려 도착한 곳의 거래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나중을 대비해 영향력 카드를 가져가야겠다고 판단한 경우, 후자를 택한다. 이 게임에서 많은 수의 영향력 카드는 곧 큰 힘을 의미하지만, 영향력 카드를 12장 이상 가지게 되면 남은 카드는 버려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자.
거래를 원하지 않는다면, 영향력 카드 더미에서 영향력 카드를 3장 가져가면 된다. <출처: divedice.com>
게임말을 놓는 거래 칸에는 거래 성사를 위해 필요한 투자자들과, 거래 성사 시 얻게 되는 배당금(달러)이 나타나 있다. 거래를 성사하려면 해당 거래 칸에 있는 투자자들을 끌어들여야 한다. 거래 칸 왼쪽에서 큰 네모로 표시된 투자자들은 이 거래를 성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람들이다. 흰색 상자 안에 써 있는 숫자는 필수 투자자 외에 추가로 필요한 사람들의 숫자이며, 작은 네모로 표시된 투자자들 중에서 골라야 한다.
아임 더 보스의 게임판에는 투자 정보가 나타나 있다. <출처: divedice.com>
만약 게임말이 놓인 칸의 거래 조건이 마음에 든다면 "거래합시다"라고 말하면 된다. 그러면 본격적인 거래가 시작되며, 거래를 시작한 플레이어는 그 거래의 '보스'가 된다. 보스는 거래 카드 더미의 가장 위에 있는 카드를 보고, 여기에 적힌 금액과 거래 칸의 $(달러) 마크 표시 개수를 곱해 총 배당금을 구해 모두에게 말해준다. 예를 들어 $당 2백만 달러가 적힌 거래 카드를 뽑았고 $ 마크 4개가 표시된 칸에서 거래를 한다면, 배당금은 총 8백만 달러가 된다.
거래 카드의 금액은 거래가 성사됨에 따라 상승하므로, 게임의 후반부에는 '빅딜'이라고 할 만큼 큰 배당금의 협상이 진행된다. 보스는 거래 성사 시 얻게 될 배당금을 투자자들에게 약속하며 투자자들을 끌어 모은다. 투자자를 가진 플레이어가 보스에게 배당금을 제안할 수도 있다.
거래가 시작되면 각 플레이어들은 손에 들고 있는 다양한 영향력 카드들을 사용해 실시간으로 거래에 참여하거나, 경쟁자를 방해할 수 있다. 여기서 실시간이라는 것은, 거래 중에는 게임 순서와 상관없이 모든 플레이어들이 게임에 참여해 활동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영향력 카드는 5종류가 있는데, 이를 활용하면 게임에서 재미있는 상황들이 펼쳐진다. 1회성 투자자로 쓸 수 있는 일족 카드, 이번 거래에서 투자자를 빠지게 만드는 '여행 카드', 3장을 모아 상대방의 투자자 카드를 빼앗아오는 '고용 카드, 자신을 이번 거래의 보스로 만들어주는 '보스 카드', 그리고 여행, 고용, 보스 카드의 효력을 막을 수 있는 '정지 카드' 등이 있다.
영향력 카드, 일족 카드, 여행 카드, 고용 카드, 보스 카드, 정지 카드. <출처: divedice.com>
투자자를 모두 모았다면 보스는 '거래 성사'를 선언할 수 있다. 성사된 거래 카드는 뒤집어서 거래가 성사된 칸을 덮는다. 이제 게임 말이 이동할 때 이 칸은 건너뛰게 된다. 거래의 성사 여부와 상관없이, 거래가 종료되면 보스의 왼쪽 플레이어가 차례를 진행한다.
이렇게 해서 10번의 거래, 즉 10번째 거래 카드가 놓이면 게임 종료가 다가온다. 10번째 거래 카드의 뒷면에는 주사위 눈이 그려져 있는데, 이 주사위 눈은 마지막 15번째 거래 카드가 놓여질 때까지 하나씩 늘어난다. 이 주사위 눈은 게임의 종료 조건을 표시하는 역할을 한다.
10번째 거래부터는 거래가 성사되면 보스가 주사위를 굴리는데, 거래 카드 뒷면의 숫자 중 하나가 주사위에 나오면 즉시 게임이 끝난다. 주사위가 나오지 않았다면, 다음 거래를 계속 진행하면 된다. 이러한 게임 종료 조건 때문에 플레이어들은 게임이 언제 끝날지 대략 알 수 있지만, 정확하게 알 수는 없게 된다. 따라서 게임이 끝날 때까지 누가 이길지 짐작하기 어려워,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된다.
게임 종료 시점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출처: divedice.com>
게임이 종료되면 모든 플레이어가 각자 거래를 통해 얻은 배당금을 센다.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인 플레이어가 승리한다.
시드 잭슨과 아임 더 보스
시드 잭슨 <출처: boardgamegeek.com>
아임 더 보스의 작가 시드 잭슨(Sid Sackson, 1920~2002)은 미국의 보드게임 작가이자 수집가다. 아임 더 보스 외에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어콰이어(Acquire, 1962)', '바자(Bazaar, 1967)', '캔트 스탑(Can't Stop, 1980) 등이 있다. 보드게임 작가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 그는 간단히 연필과 종이를 활용해 즐길 수 있는 게임들을 모아 책으로 출판했다. '어 가무트 오브 게임즈(A Gamut of Games)', '카드 게임즈 어라운드 더 월드(Card Games Around the World, 1994)' 등의 저서가 잘 알려져 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어콰이어. 주식 게임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다. 1999년부터 디자이너의 이름을 따 Sackson이라는 회사가 생겼다. 사진은 2008년 개정판이다. <출처: divedice.com>
그는 죽을 때까지 1만 8,000여 개의 게임을 수집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가족들은 시드 잭슨의 건강이 악화되자 수집한 게임들을 처분해 병원비를 부담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소망이었던 보드게임 박물관 설립을 위한 후원자나 개인 수집가가 나타나지 않아, 경매를 통해 게임을 판매하기로 했다. 공교롭게도 그는 경매를 일주일 남긴 시점에 타계했고, 경매는 고인을 추모하는 행사로 진행됐다.
그는 생전에 '좋은 게임은 무한한 전략을 쉽게 배우고, 플레이어에게 선택의 기회를 줘야 하며, 플레이어 간 상호 작용을 만들어야 한다. 게임 시간은 30분에서 60분 정도가 좋다'고 말했는데, 그의 대표작 아임 더 보스는 이 기준에 부합되는 게임 중 하나다.
아임 더 보스 초판 Kohle, Kies & Knete (1994) <출처: boardgamegeek.com>
아임 더 보스의 초판은 1994년 독일 보드게임 제작사 슈미트 쉬필(Schmidt Spiele)에서 'Kohle, Kies & Knete'라는 이름으로 출시됐다. 우리 말로 표현하면 "뇌물, 돈, 땡전"이 되는 셈인데, 돈을 일컫는 여러 단어를 늘어놓은 것으로 보여진다.
이 게임은 출시 당시 상당한 인기를 얻어 금세 절판됐고, 이 게임을 구하려면 100달러 이상의 웃돈을 주어야 했다. 독일 올해의 게임상(Spiel Des Jahres 1994)의 문턱까지 올라갔었으나, 푸에르토 리코(Puerto Rico, 2002)의 작가 안드레아스 자이파스(Andreas Seyfarth)의 게임 '맨하탄(Manhattan, 1994)'에 밀려 고배를 마셨다.
2003년 미국의 신생 보드게임 제작사 페이스2페이스 게임즈(Face2Face Games)가 이 게임을 '아임 더 보스(I'm the boss)'라는 이름으로 출판하면서 초판에 대한 갈증이 해소됐다. 재판된 게임은 캐리커처를 사용해 만화풍의 일러스트를 강조했던 초판과 달리 현실적인 이미지로 그려졌고, 원형이었던 게임판 구성도 모노폴리처럼 네모로 변했다. 초판의 디자인을 선호하는 게이머들도 있었지만, 그 선호가 드러나지 않을 만큼 재판에 대한 호응이 더 컸다. 국내에서는 재판 발매와 동시에 수입돼 보드게임 카페를 통해 알려졌으며, 큰 인기를 끌었다.
아임 더 보스 2판. <출처: divedice.com>
이후 국내에서 '아임 더 보스'를 찾는 사람은 꾸준히 있었지만, 제작사의 사정으로 '아임 더 보스' 2판 또한 절판돼 한동안 게임에 대한 프리미엄이 형성됐다. 2007년부터 '아임 더 보스'의 한국어판 제작을 위한 협상이 진행됐으나, 진척이 느렸다. 당시 한국어판 게임명은 '협상의 달인'으로 알려졌다.
2010년 페이스2페이스 게임즈에서 다시 '아임 더 보스'의 재판을 선보였고, 재판을 기다렸던 각 나라의 제작사들이 앞다투어 자국어판을 출시했다. 불어판, 스페인어판, 그리스어판, 이탈리아어판, 중국어판 등이 이때 출시됐다. 하지만 이 판본 또한 오래 판매되지는 못했다. 제작사가 회사의 운영을 중지하면서 게임의 라이선스 권리 소유자가 모호해졌고, 이 때문에 지속적인 판매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후, 시드 잭슨의 게임들에 대한 라이선스를 정리, 획득한 이글-그리폰 게임즈(Eagle-Gryphon Games)에서 2012년 아임 더 보스 카드게임(I'm the Boss!: The Card Game, 2012)을 출판했다. 하지만 이 카드게임은 기존 게임방식과 크게 달라 인기를 끌지 못했다. 이 제작사는 한 해 뒤인 2013년에야 '아임 더 보스'를 출시했다. 이렇게 라이선스 관계가 명확해지자 비로소 한국어판이 제작될 수 있었다.
2003년 2판의 투자자 카드에는 캐릭터의 이름, 직업 등이 적혀 있었다. <출처: boardgamegeek.com>
2013년 발매된 '아임 더 보스' 신판은 2010년 발매된 페이스2페이스 게임즈의 '아임 더 보스' 영문판과는 조금 달랐다. 구판의 경우 'Cashman, Dougherty, Goldman, Sacks, Liebgeld, Wadsworth'와 같은 캐릭터의 이니셜과 이름으로 게임을 진행했다면, 신판은 색깔과 'A, B, C, D, E, F'의 기호를 사용해 이전보다 언어 의존성을 낮췄다.
한국어판 제작 당시 한국식으로 이름을 넣는 방안, '가, 나, 다, 라, 마, 바'의 기호를 사용하는 방안, '김, 이, 박, 최, 정, 권' 등 한국의 성씨를 사용하는 방안 등이 논의됐다. 하지만 제작비의 문제로 결국 영문판의 기호를 그대로 사용하기로 결정하는 등의 곡절이 있었다. 이렇게 발매된 한국어판은 구판의 명성을 등에 업고 날개 돋친 듯이 팔렸다.
최고의 협상 게임
최고의 협상 게임 <출처: divedice.com>
A: "내가 보스니까, 나는 투자자 한명으로 5백만 원을 가질게, 너는 3백만 원을 가져."
B: "3백만 원이라니, 내가 참가 안하면 이 거래는 성립 안된다는 거 몰라? 4백만 원 줘."
C: "나한테 일족 카드가 있어, B 대신 내가 3백만 원을 가져갈게. 둘이서 거래하자."
아임 더 보스는 이런 식으로 수차례 협상을 하게 된다.
보통 '협상'이라 하면 상당히 어렵게 느껴지지만, '아임 더 보스'는 협상을 유쾌하게 풀어낸 게임이다. 자신의 카드를 숨기고, 카드를 내밀고, 타이밍을 맞춰 대처한다는 협상의 기본적인 개념을 간단한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어떤 사람과 짝을 맞추고, 이들과 어떻게 이익을 분배할 것인가?', '싫은 사람은 어떻게 떨구어 낼 것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이야기하고 싸워나가야 한다. 완성된 계약에서 배당금을 타고 그것을 나누는 즐거움, 왁자지껄하고 음흉한 게임의 세계가 게임판 위에 고스란히 살아 있다.
'아임 더 보스'에는 '최고의 협상 게임'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간단한 방식이지만 큰 재미를 주고, 격렬한 상호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한 게임에서 갑과 을이 수시로 바뀌며, 플레이어들은 거만해졌다가도 순식간에 비굴해지기도 한다. 딴지와 음모가 오가지만 서로 웃고 떠들 수 있는 파티 게임이다. 이런저런 계략과 음모도 웃어 넘길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면 더욱 즐겁다.
글 / IT동아 보드게임 필자, 코리아보드게임즈 이병찬
편집 / IT동아 안수영(syahn@itdonga.com)
※본 기사는 네이버캐스트 게임의 세계: 보드게임의 세계(http://navercast.naver.com/list.nhn?cid=2883&category_id=2883)에 함께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