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은 목적 아닌 모두를 위한 수단”…스웨덴 대사가 전하는 ‘사람 중심 혁신’의 조건
[IT동아 김동진 기자] “스웨덴은 기술을 목적이 아닌 모두를 위한 수단으로 정의합니다. 기술이 시민 삶의 질을 높이고 사회적 신뢰와 환경적 균형에 실제로 기여할 때, 비로소 진정한 가치를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칼-울르프 안데르센 주한 스웨덴 대사는 최근 서울 중구 주한 스웨덴대사관에서 진행한 IT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스웨덴 사회를 관통하는 핵심 철학을 이같이 설명했다. 단순히 친환경 정책을 강조하는 수준이 아니라, 기술 혁신과 산업 경쟁력, 사회적 신뢰, 삶의 질을 하나의 축 안에서 설계해 왔다는 의미다.

인공지능(AI)과 디지털 전환 경쟁 가속화로 각국은 기술 패권 확보와 산업 경쟁력 강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 과정에서 탄소 중립과 에너지 소비 증가, 자동화로 인한 노동 전환, 사회적 신뢰 약화와 같은 새로운 과제도 함께 떠올랐다. 기술 발전 속도가 빨라질수록 ‘무엇을 위한 기술인가’, ‘사람과 사회는 기술 발전에 따라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중요성이 더욱 부각된다.
스웨덴은 글로벌 정보통신기술(ICT)과 친환경 산업 분야에서 대표적인 혁신 국가로 꼽힌다. 미래 모빌리티뿐만 아니라 AI·배터리·에너지 분야에서도 강한 존재감을 보인다. 동시에 높은 공공 신뢰와 복지 체계, 친환경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술과 사람의 균형’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국가 중 하나로 꼽힌다.
디지털 전환, 탄소중립, 스타트업 생태계, AI가 촉발한 노동 전환 문제 등 최근 한국 사회가 마주한 고민은 스웨덴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났다. 이에 대해 스웨덴은 어떤 해법을 제시하고 있을까.
“기술은 수단”…사회적 가치 중심으로 설계하는 혁신
안데르센 대사는 인터뷰 내내 “기술은 목적이 아닌 수단”이라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했다.

그는 “스웨덴은 기술을 단순히 효율성이나 경제적 수익으로만 평가하지 않는다. 인간 삶의 질과 회복력, 지속가능성에 얼마나 기여하는지를 총체적으로 살핀다”며 “실제로 기술은 개발과 상용화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사회에 적용돼 시민 삶을 개선할 때, 기술은 비로소 진정한 가치를 발휘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스웨덴은 기술 도입 초기 단계부터 환경 기준과 사회적 가치를 정책 설계에 반영한다. 규제와 공공조달, 학계와 산업계 협력을 통해 기술 발전이 공공 신뢰를 해치지 않도록 관리한다는 설명이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AI와 디지털 전환 과정에서의 에너지 문제에 대한 접근이었다. 최근 글로벌 AI 산업은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 급증과 탄소 배출 문제를 동시에 안고 있다. 하지만 스웨덴은 이를 ‘기술 발전 대 환경’의 충돌 구조로 보지 않는다.
안데르센 대사는 “스웨덴은 이미 전력 생산의 약 99%를 화석연료 없이 충당하고 있으며, 친환경 전력을 수출하는 국가”라며 “향후 20년 동안 산업 성장에 맞춰 전력 생산 역량을 두 배로 확대해야 하는 과제 또한 안고 있다. 이에 대응해 재생에너지와 저탄소 기저전원 확대, 데이터센터 효율 개선, 스마트그리드 기술 등을 함께 추진하면서 디지털화 자체를 기후 문제 해결의 일부로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단순히 ‘친환경’을 외치는 수준이 아니라 산업 구조와 에너지 정책, 디지털 인프라를 통합적으로 재설계하는 접근에 가깝다. 데이터센터와 AI 인프라 확대를 둘러싼 전력 문제를 고민하는 한국에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주는 접근이다.
‘정책 안정성’과 ‘트리플 헬릭스’…스웨덴 혁신 생태계의 힘
안데르센 대사는 스웨덴 산업 경쟁력의 배경으로 ‘정책 안정성’과 ‘트리플 헬릭스(Triple Helix)’ 구조도 언급했다. 트리플 헬릭스는 정부·산업계·학계가 유기적으로 협력해 기술 혁신과 산업 경쟁력을 함께 끌어올리는 스웨덴식 산학연 협력 모델이다. 대학은 연구와 인재 양성을, 기업은 기술 상용화를, 정부는 정책·재정 지원을 맡으며 장기 산업 경쟁력을 함께 강화하는 방식이다.
그는 “스웨덴은 오랜기간 스타트업과 대기업, 대학, 공공기관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트리플 헬릭스 구조를 바탕으로 혁신 생태계를 구축했다”며 “장기적인 연구개발 목표를 실제 산업 솔루션으로 연결하고, 글로벌 시장으로 확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이 같은 협력 구조가 있다. 정부와 대학, 산업계가 초기 연구 단계부터 긴밀하게 협력하면서 기술 검증과 상용화, 글로벌 진출까지 함께 한다”고 말했다.
이어 “스웨덴은 단순히 기술 개발 속도나 창업 숫자 확대만을 혁신의 기준으로 보지 않는다. 스타트업 역시 지속가능성과 사회적 책임, 장기적인 가치 창출 능력을 함께 요구받는다. 책임성과 경쟁력이 서로 충돌하는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장기적으로 경쟁력을 강화하는 요소가 된다”며 “지난 30년 동안 여러 차례 정권 교체가 있었지만, 혁신과 기술에 대한 정책 방향은 스웨덴에서 정치적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덕분에 장기적인 관점의 연구개발 투자와 산업 협력 구조가 기업과 투자자에게 예측 가능성 및 사업 안정성을 제공한다”고 전했다.
안데르센 대사는 유럽식 장기 연구·혁신 협력 구조의 대표 사례로 ‘호라이즌 유럽(Horizon Europe)’을 언급했다.
호라이즌 유럽은 유럽연합(EU)이 2021년부터 2027년까지 약 955억 유로(약 150조 원) 규모 예산으로 운영하는 세계 최대 연구·혁신(R&D) 프로그램이다. 기후변화 대응과 디지털 전환, AI·배터리·에너지·첨단 제조 등 미래 산업 분야 공동 연구를 지원한다. 대학과 연구기관, 스타트업, 기업, 공공기관 등이 국가 간 컨소시엄 형태로 참여하는 구조가 특징이다.
안데르센 대사는 “한국은 2025년부터 아시아 국가 최초로 호라이즌 유럽 준회원국(Associated Country)으로 참여하게 됐다. 이에 따라 한국 기업과 연구기관도 유럽 기관들과 공동 연구를 수행하거나, 일부 프로젝트에서 직접 EU 연구비를 지원받을 수 있게 됐다”며 “호라이즌 유럽의 핵심 목적은 단순 연구 지원을 넘어 기후변화 대응, 디지털 전환, 에너지, AI, 배터리, 바이오, 우주항공, 첨단 제조 등 글로벌 난제 해결과 산업 경쟁력 강화를 동시에 추진하는 데 있다. EU는 반도체·배터리·AI·첨단 제조 등의 분야에서 높은 산업 경쟁력과 실행력을 지닌 한국을 주목해 역할 확대를 추진했다. 유럽 연구 네트워크와 기술 협력 생태계에 한국이 직접 연결되는 것은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한국의 실행력·스웨덴의 혁신 생태계 바탕으로 시너지 창출 기대”
안데르센 대사는 한국의 실행력과 스웨덴식 혁신 시스템이 만나면, 다양한 분야에서 시너지 창출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는 “한국은 빠른 상용화와 실행 역량에서 큰 강점을 지닌 국가다. 여기에 스웨덴의 연구 역량과 탄탄한 스타트업 생태계를 결합한다면, 경제 안보와 지속가능성이라는 공동 목표를 향한 진전을 가속화할 수 있을 것”이라며 “배터리와 에너지, AI, 첨단 제조, 6G, 생명과학뿐만 아니라 철강·시멘트 등 탈탄소화가 어려운 산업 분야에서도 양국 간 시너지가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술 발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신뢰와 노동 전환 문제에 대한 이야기도 이어졌다.
그는 “스웨덴은 노사 간 신뢰를 핵심 가치로 둔다. 투명성과 포용성, 책임성을 바탕으로 시민과 노동단체, 산업계가 정책 결정 과정에 폭넓게 참여한다”며 “AI와 자동화 확산으로 인한 일자리 변화에도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과 평생교육, 사회적 대화를 결합해 대응하고 있다. 재교육과 직무 전환 프로그램, 강한 사회 안전망으로 시민들이 변화에 도전할 수 있는 기반도 제공한다”고 말했다.
끝으로 안데르센 대사는 미래 사회 핵심 가치로 ‘협력’을 강조했다.
그는 “기후변화와 지정학적 긴장, AI가 가져올 변화는 어느 한 국가가 단독으로 해결할 수 없는 큰 흐름”이라며 “진정한 전략적 가치는 고립이 아니라 협력에 있다”고 말했다.
이어 스웨덴 출신 전 유엔 사무총장 ‘다그 함마르셸드’의 말을 인용했다.
“먼 수평선을 바라보는 사람만이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있다”며 “속도와 효율 중심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사람 중심 혁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IT동아 김동진 기자 (kdj@itdong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