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대 시스템 엔지니어가 한옥 호텔을 지은 까닭은…안영환 락고재 한옥 컬렉션 회장
[IT동아 김동진 기자] “0과 1의 세상에서 살던 내가 이제는 자연과 어우러진 한옥 호텔을 지어 한국 고유의 문화와 풍류를 알리고 있습니다”
안영환 락고재 한옥 컬렉션 회장의 말이다. 그는 1980년대 미국에서 컴퓨터사이언스를 전공한 1세대 시스템 엔지니어 출신이다. 논리와 효율의 세계에서 일하던 그의 시선은 어느 순간 기술이 설명하지 못하는 영역에 닿았다. 우리나라 고유의 풍류와 정서, 아름다움이다. 당시 해외에서 바라보는 한국 문화에 대한 시선이 그의 진로를 바꾸게 한 계기였다. 서울 북촌빈관 by 락고재에서 IT동아를 만난 안영환 회장은 한옥을 ‘단순한 집이 아니라 한국인의 정서를 온전히 담아내는 플랫폼’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우리나라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고자 옛것을 즐기는 집, 락고재(樂古齋) 호텔을 지었다고 강조했다.

한국 문화에 대한 편견 바꾸고 고유의 문화 알릴 매개체 ‘한옥’
안영환 회장은 1980년대 초 미국에서 컴퓨터사이언스를 전공한 후 글로벌 IT기업 EDS(Electric Data Systems) 본사에서 시스템 엔지니어로 일했다. 그는 0과 1로 이뤄진 오류 로그를 분석해 두 시간 안에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환경에서 논리적 사고와 빠른 판단력을 몸에 익혔다.
안영환 회장은 “당시 시스템 엔지니어로 일하며 고객사의 시스템 통합 관리 대행을 맡았다. 오류가 발생하면 밤이든 낮이든 찾아 빠르게 해결해야만 했고, 실수하면 곧바로 페널티가 부과됐다. 분석과 결정의 속도가 생명인 세계였다”며 “각박한 환경으로 들리겠지만 문제를 해결해 원활한 흐름을 유지하도록 돕는 과정에서 보람을 느꼈다. LG CNS의 전신인 LG STM(미국 EDS와 합작법인으로 설립)에서도 컨설턴트 역할로 시스템 통합 관리 업무를 맡은 경험이 있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어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다양한 사람을 만난 덕분에 당시 한국 문화에 대한 외국인들의 평가를 가까이서 들을 수 있었다. 대부분 일본과 중국 문화에는 감탄하면서도 한국 문화는 볼 게 없다고 평가절하했다. 중국의 거대한 조경에 감탄하거나, 일본의 오밀조밀함, 장인정신을 칭송하면서도 우리는 특색이 없다는 식이었다”며 “절대 동의할 수 없었다. 화도 났다. 인위적으로 자연을 꾸미거나 만들지 않고 담장을 낮춰 자연과 어우러지는 차경(借景, 경치를 빌리다)의 문화, 정(情), 풍류를 담은 우리나라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오해였다. 어떻게 하면 인식을 바꿀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러던 중 그의 고민을 행동으로 옮기게 한 계기가 생겼다.
안영환 회장은 “당시 선친이 건축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도움을 요청해 귀국해 일을 돕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한옥을 부수고 그 자리에 다른 건물을 짓고 싶다는 의뢰가 들어왔다”며 “현장을 가서 보니 고즈넉한 한옥과 내부 골조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낮은 담장 덕분에 주변 경치와 어우러지는 한옥의 모습을 한참 바라봤다. 부수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한옥을 임대해 식당을 운영하기로 했다. 아름다운 골조를 유지하면서 몰입을 방해하는 콘크리트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건물을 개조했다”고 말했다.

콘크리트를 걷어내고, 한옥의 구조미를 살린 식당을 임시로 운영하면서 그는 전통과 현대의 조화라는 가능성을 실험했다.
안영환 회장은 “식당을 운영하면서 오래된 건물이 주는 불편함, 예컨대 외부에 화장실을 두는 방식은 개선하고 한옥 고유의 아름다움, 전통은 살린다는 락고재의 디자인 전통을 다질 수 있었다. 한옥을 단순한 건물이 아닌 하나의 플랫폼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이 시기에 형성됐다”며 “한옥은 한국인의 정서를 모두 담아내는 플랫폼이다. 그 안에서 음악을 듣고 먹고 마시며, 자연을 즐기는 과정에서 한국인 특유의 정과 풍류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과정을 담기에 식당에서 머무는 순간은 너무 짧다고 생각했다. 한옥에서 하룻밤 머물며 모든 정서를 오롯이 느끼게 하고 싶었다. 1990년대 중반, 전국의 종갓집과 손잡고 외국인을 위한 ‘고택 체험 숙박 프로그램’을 기획한 배경”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안동과 경주 종갓집에서 고택 체험 숙박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외국인들이 전통음식을 체험하고 예절을 배우도록 도왔다. 이 과정에서 한옥의 현실적 문제(화장실, 유지보수 등)를 미리 파악할 수 있었다. 불편을 개선하자 외국인들의 호평이 이어졌고 한옥 호텔 사업에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2003년 서울 북촌 본관을 세우고, 2021년 서울시로부터 임차받은 ‘북촌빈관’을 운영하면서 도심형 한옥호텔을 완성할 수 있었던 배경”이라며 “건물 구성의 구조적 불편함은 줄이고 내부를 고미술품으로 채워 락고재만의 색깔을 입혔다. 전통 한옥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숙박과 식사, 문화체험이 가능한 한옥호텔로 락고재를 브랜딩했다”고 설명했다.

안동에서 완성한 한옥호텔의 철학…'안동 락고재 호텔' 설립
안영환 회장의 다음 시선은 안동 하회마을로 향했다. 도심형 한옥호텔도 의미가 있지만 옛 풍류가 남은 공간에서 한옥이 주는 매력을 전하고 싶다는 의지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안영환 회장은 “안동 하회마을은 조선시대 풍류가 온전히 남은 장소다. 이곳에 락고재 한옥호텔을 지어 진정한 차경의 문화는 무엇인지 외국인에게 제대로 선보이고 싶었다. 동시에 전통 문화 유지와 계승에 기여하고 싶다는 평소 철학을 실현하기 위해 한옥학교도 설립했다”며 “한옥학교에서 소목수, 대목수 배출을 위한 교육을 진행하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안동 락고재 건축 현장에서 바로 실습하도록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보통은 이론을 교육하고 끝나지만 이론과 실습을 바로 한 곳에서 마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고 강조했다.


락고재 한옥학교에서 교육을 수료한 목수들이 건축 현장에 합류해 작업하는 방식으로 십 년이 넘는 공사 끝에 2024년, 안동 락고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안영환 회장은 “객실마다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를, 정원에는 30년 넘게 관리한 소나무를 배치했다. 석식은 500년 전 안동 조리서인 수운잡방(需雲雜方) 식으로 꾸렸다. 음식을 먹을 때도 단순한 한 끼 식사가 아닌 시간 여행을 선사하려는 의도”라며 “외형과 정서는 철저하게 전통의 미학을 지키면서도 단열, 배수, 화장실 위치 등 구조적 불편함은 줄였다. 전통은 살리되 불편함은 없어야 한다. 전통이 불편하다는 인식으로 이어지면 사람들은 다시 그곳을 찾지 않기 때문이다. 락고재 서울 본관과 북촌빈관도 이같은 철학을 유지하기 위해 호텔 운영을 멈추고 자체 목수팀이 내부 인테리어를 정비하기도 한다. 외형은 그대로지만, 내부는 시대와 함께 진화해야 한다는 기조를 유지한다”고 말했다.


첨단 기술 접목한 한옥 박물관 건립 추진
락고재 호텔은 첨단 기술을 활용한 미래를 구상한다.
안영환 회장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시대를 지나고 있는 지금, 다음 시대의 모습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결합이라고 답하고 싶다. 인공지능, 증강현실과 같은 첨단 기술을 활용해 한옥 공간을 체험형 디지털 콘텐츠와 접목하려고 한다”며 “지금까지 수집한 유물을 가지고 한옥 박물관도 건립하고 싶다. 유물은 한옥 안에 있을 때 가장 빛이 난다. 따라서 30년간 모은 고미술품을 유리 진열장 대신 한옥 박물관에 배치하고 증강현실로 유물의 배경을 설명하는 방식의 기술 활용도 고심 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차경의 문화를 담은 한옥 박물관에서 유물을 눈에 담고 락고재 호텔에서 먹고 자며 온전하게 한국의 풍류를 즐기는 과정을 돕고 싶다. 디지털 기술로 유물의 배경을 이해하고, 한옥 공간에서 그 여백과 풍류를 체험한다면 전통은 다시 현재의 언어로 살아난다. 락고재는 바로 그 경험의 완성을 추구한다. 기술과 문화, 사람이 한옥이라는 무대 위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미래, 그것이 락고재가 만들고 싶은 장면”이라고 강조했다.
IT동아 김동진 기자 (kdj@itdong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