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불공정거래 막는 '표준계약서'... "현실에선 불공정 여부 파악도 어렵고 사용도 못해"
[IT동아 정연호 기자] 지난해 만화산업 종사자들이 겪는 주된 문제는 ‘계약서 내용의 불공정 여부를 판단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만화산업의 표준계약서를 널리 알리는 것과 함께 표준계약서 내용을 수시로 갱신해 시류를 반영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조사에 따르면, 만화 업계 종사자들은 계약서 내용이 불공정한지를 판단하는데 어려움을 호소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만화분야 종사자를 위한 전문 상담 서비스 ‘만화인 헬프데스크’의 지난해 상담 결과 중 121건(58.1%)이 ‘계약서 검토’와 관련됐다. 불공정 검토 여부(75건)가 가장 많았고, 그다음 사안이 용어 및 문장 해석(11건)이었다. 계약 해지 방법과 일방적인 계약 해지 시 대처법 등의 해지 및 파기 문의도 30건(14.4%)에 달했다. 10건 중 7건의 상담은 계약서와 관련된 것이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 관계자는 상담 결과 통계에 대해 “상담을 받았다는 사실이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해 불공정함이 입증됐다 걸 의미하진 않는다”며 주의를 당부했다. 관계자 설명처럼 상담 통계 자료는 창작자들이 플랫폼과 에이전시로부터 계약 정보를 공유받지 못해, 계약서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계약을 체결하고 있다는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만화인 표준계약서, 불공정한 거래를 예방한다
다만, 업계 관계자들은 계약서 내용을 살펴보면 실제로 불공정한 조항들이 들어가는 사례가 많다고 지적한다. 대표적으로 사업자에게 2차적저작물 또는 사업화에 대한 독점적 권한을 수여하는 계약 조항이다.
위의 계약 사례를 보면, ‘회사는 콘텐츠에 대한 2차적저작물작성권 등 기타 저작재산권을 이용하기 위한 권리를 가지며 권리 이행 및 변경사항 발생 시 작가에게 고지한다’라는 문구가 제시돼 있다. 한국저작권위원회 윤민하 변호사는 ‘사례로 살펴보는 웹툰·웹소설 불공정 계약 쟁점’에서 “위 계약서는 원저작물을 바탕으로 하는 부가적인 콘텐츠의 제작 등 사업화에 관하여는 사업자가 그에 관한 권한을 가져오는 형태를 띠고 있다”고 분석했다.
반면,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제시한 표준계약서는 저작재산권을 작가에게 유보하는 조항을 뒀다. 표준계약서란 특정 산업에서 공정한 계약을 체결하도록 계약 조건의 기준을 제시한 틀을 말한다.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당사자들이 자발적으로 활용해 불공정 관행을 해소할 수 있다.
만화 분야 표준계약서는 2차적저작물의 창작, 저작물의 재이용 등은 웹툰 연재 계약과 별도로 계약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했다. 저작자가 웹툰 사업자에게 2차적 저작물의 창작 권한 등을 수여하려고 한다면, 이에 대한 별도의 계약을 체결하는 방식이다.
계약 기간과 관련해서도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만약, 불공정한 조건으로 계약이 성립됐다면 일반적으로는 계약 기간이 끝나야 계약을 종료할 수 있다. 윤 변호사는 “계약기간이 무한정 연장될 수 있는 묵시적 자동갱신 조항, 계약 기간을 합리적 이유 없이 사실상 영구적인 것으로 연장하는 취지의 조항은 불공정한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표준계약서는 계약 기간이 끝나면 계약이 종료되는 것으로 정하고 있다. 이 조항은 계약의 종료시점을 명시하고, 계약의 한쪽 당사자가 상대방에게 연장을 요청하지 않는다면 계약이 자동연장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계약서를 작성할 땐 자동갱신 조항을 넣더라도 갱신 기간을 최대 1년 이내로 짧게 설정하는 게 좋다.
윤 변호사는 “계약기간이 비교적 단기라면 종료 의사를 통지하는 시기를 놓치더라도 이를 만회할 수 있지만, 장기의 경우에는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계약 효력을 소멸시키기 어려우므로 주의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연재계약이 ‘약관’에 해당한다면 자동연장조항이 불공정조항이라며 무효를 주장하면서 소를 제기하는 방법도 가능하다. 약관이란 계약 당사자가 여러 명의 상대방과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미리 마련한 계약 내용을 말한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시정권고 등을 살펴보면 자동연장조항이 불공정조항으로 인정된 경우도 다수 발견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불공정한 법률행위임을 인정받기는 쉽지 않으니, 먼저 상대방에게 계약 조항에 관해 수정을 요청하고 협상이 결렬되면 계약 무효를 주장하기를 권하고 있다.
위 사례는 비밀유지와 관련해 ‘계약의 체결 및 이행과정에서 알게 된 상대방 및 상대방의 거래처 등에 관한 정보, 본 계약의 내용 및 대상저작물의 내용 등에 관한 모든 비밀정보를 제3자에게 누설하면 안 된다’고 명시했다. 실제로, 작가가 CP로부터 받은 계약서를 변호사에게 검토받으려 할 때, 계약의 당사자가 아닌 제 3자에게 계약서를 공개하는 게 비밀유지약정을 위반하는지에 관한 질의가 자주 들어온다고 한다.
윤 변호사는 “사례 8과 같은 경우엔 변호사와 상담하는 행위까지 금지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데, 재판청구권의 보장과 변호사에게 법률상 비밀유지 의무가 있다는 점에서 민법이나 약관의 규제에 관한 법률에 따라 무효가 될 소지가 큰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표준계약서는 비밀유지 계약 조항으로 발생하는 분쟁을 예방하기 위해 ‘계약서의 사전검토, 공공기관 연구목적임을 증명할 수 있는 증빙서류가 존재하는 공공기관연구목적으로 개인정보 및 사업자정보를 제외한 제공은 제외로 한다’와 같은 단서 조항을 달았다. 비밀 유지 의무 내용을 구체화해, 비밀유지 의무의 범위와 한계를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표준계약서의 존재만으로 바뀌는 부분은 분명히 있어…”
현재 대부분의 웹툰 창작자는 에이전시나 콘텐츠제작사(CP) 등을 거쳐 웹툰 플랫폼과 계약을 맺고 있다. 중간회사가 계약을 대리하는 것이다. 에이전시가 많아지면서 계약과정이 공정한지를 외부에서 모두 들여다보는 게 어려워졌다. 에이전시가 웹툰 플랫폼의 눈치를 본다는 지적도 나온다. 웹툰 플랫폼이 에이전시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거나, 자회사로 두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웹툰 계약은 표준계약서가 아니라 CP 혹은 플랫폼이 사전에 계약서를 미리 준비해 작가에게 제시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실제로 지난 2020년 웹툰작가 54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작가 10명 중 1명만이 표준계약서를 그대로 사용했다(9.4%)고 답했다. 대부분 업체가 자체 계약서 양식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윤민하 변호사는 통화에서 “공정거래가 잘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창작자와 플랫폼 간의) 협상력 차이가 크다. 다만, 국가가 공정 거래를 법률로 강제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표준계약서 사용을 장려하는 것이고, 실제로 출판업계는 표준계약서가 잘 정착됐다”고 했다. 그는 “웹툰과 웹소설은 표준계약서가 있지만 옛날에 만들어진 것이라 요즘과는 잘 맞지 않는 부분도 있다. 2차적 저작물 같은 부분에 표준계약서 같은 경우에는 ‘별도로 합의한다’ 정도로 기재돼 있어 큰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윤 변호사는 “표준계약서엔 명시돼 있는데, 왜 당신들은 아직도 이런 조항을 유지하냐고 지적을 하면 실제로 조항을 바꾸는 사례도 있다”면서 “정부가 플랫폼과 CP사, 창작자 의견을 충분히 반영해서 표준 계약서를 수시로 업데이트 하는 게 좋은 방향”이라고 말했다.
글 / IT동아 정연호 (hoho@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