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PC에 남은 과거의 ‘흔적기관’ 뭐가 있나?
[IT동아 김영우 기자] 고래는 수중 생활에 적합하도록 진화된 신체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해부학적으로는 뒷다리뼈가 남아있다. 먼 옛날 고래의 조상은 육상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꼬리뼈 역시 비슷한 사례다. 이렇게 현재는 거의 이용하지 않거나 퇴화되었지만, 예전의 흔적이 남아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을 ‘흔적기관’이라고 한다.
생물학이 아닌 IT 생태계에도 이렇게 ‘흔적기관’처럼 남은 것이 적지 않다. PC를 비롯한 디지털기기 등장 초기에는 당연하게 여겼던 기능이나 관행의 일부가 그것인데, 기술의 진보 및 트렌드의 변화 때문에 사실상 무의미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아직도 남아있는 경우가 있다.
타자기의 흔적, ‘QWERTY 키보드’
키보드 좌측 상단의 키 배열이 Q, W, E, R, T, Y로 시작하는 이른바 ‘쿼티’ 키보드는 PC뿐만 아니라 스마트폰, 태블릿을 비롯한 다양한 디지털 기기에서 가장 많이 이용하는 키보드다. 하지만 어린이나 어르신과 같이 IT 기기의 이용에 익숙하지 않은 이용자들은 왜 키보드의 배열이 A, B, C, D로 시작하지 않냐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러한 쿼티 배열의 키보드는 컴퓨터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이용하던 19세기 타자기의 자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1868년, 미국의 발명가인 크리스토퍼 레이선 숄스(Christopher Latham Sholes)가 처음 발명한 이후,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널리 쓰였다.
그러다 보니 타자기와 유사한 역할을 하는 컴퓨터용 키보드에서 자연스럽게 쿼티 배열의 자판이 적용되었으며, 이는 2022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다만, 이런 배열의 자판을 개발하게 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너무 빠르게 타자를 치면 타자기가 잘 고장나기 때문에 일부러 타자 속도를 늦추기 위해 이런 배열의 자판을 고안하게 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SysRq, Scroll Lock, Pause/Break 키는 왜 있지?
키보드 문자입력패드와 숫자패드 사이에 'SysRq', 'Scroll Lock', ' Pause/Break' 키는 현대 PC 환경에서 이용 빈도가 극히 낮은 편이다. 이는 1980~90년대까지 이용하던 도스(DOS) 운영체제의 흔적이다. SysRq는 ‘System request(시스템 호출)'의 줄임말로, 도스(Dos)와 같은 문자기반 운영체제에서 다중작업을 할 때 주로 이용했다. SysRq키를 누른 상태로 명령어를 입력하면 응용프로그램이 실행된 상태에서도 도스에 직접 명령어를 입력할 수 있었다.
Scroll Lock키의 경우, 도스 운영체제 상에서 화면에 표시된 텍스트가 너무 길어질 경우 유용했다. 커서를 움직여 화면을 한 줄씩 스크롤 하면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Scroll Lock키를 눌러 기능을 활성화시킨 후에 방향키를 움직이면 커서는 그대로 있고 화면 전체가 스크롤되므로 보다 편리하게 지나간 화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Pause/Break키의 경우, 도스 상에서 한창 실행되던 작업을 멈추고자 할 때 이용하는 키였다. 이를테면 dir 명령어를 입력해서 파일 목록을 출력하는 도중, Pause/Break키를 누르면 잠시 작업이 멈추므로 목록 중간의 내용을 확인하는데 유용했다. 이러한 SysRq, Scroll Lock, Pause/Break키의 고유 기능은 윈도 운영체제 기반의 PC에서는 거의 쓸모가 없지만, 일부 응용 프로그램에서 단축키 용도로 이들 키를 이용하는 경우는 있다.
1TB HDD의 실제 용량은 왜 931GB?
: HDD(하드 디스크 드라이브)나 SSD(솔리드 스테이트 드라이브)와 데이터 저장장치를 컴퓨터에 장착하고 운영체제에서 확인하면 제조사에서 밝힌 용량에 비해 적게 표시되곤 한다. 이는 저장장치 업계에서 이용하는 용량 계산의 기준과 운영체제 상에서 이용하는 용량 계산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 시리즈 등의 컴퓨터용 운영체제 상에서는 2진법으로 저장 장치 용량을 표기한다. 따라서 1MB는 1024KB가 된다. 하지만 저장장치 제조사들은 10진법 기반으로 제품의 용량을 표기한다. 이 경우 1MB는 1000KB인 것이다. 이는 컴퓨터 시장 초창기인 1970~80년대 시절부터 이어온 관행인데, 이렇게 하면 실제 이용할 수 있는 용량보다 큰 것처럼 제품의 사양을 표기할 수 있는 마케팅 상의 이점도 있다.
다만, 컴퓨터용 저장 장치의 전체 용량이 급속히 커지면서 실제 용량과 표기 용량의 차이 역시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MB(메가바이트) 시절의 저장장치를 쓰던 시절이라면 2~3% 정도의 차이밖에 나지 않아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TB(테라바이트) 단위까지 용량이 커진 현재, 실제 용량과 표기 용량과의 차이는 10%에 달할 정도다. 이를테면 ‘1TB’라며 팔리는 HDD나 SSD 제품의 실제 이용 가능 용량은 931GB에 불과하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속는 기분이겠지만 아직도 위와 같은 관행은 이어지고 있다.
PC 드라이브명은 왜 ‘C’에서 시작하나?
PC 시스템에서 파일 탐색기를 열어 탑재된 드라이브(저장소)의 목록을 살펴보면 거의 예외 없이 C 드라이브(C:)로 시작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USB 메모리나 외장하드 등을 꽂아 드라이브 수를 늘리더라도 D, E, F 드라이브 등으로 이어갈 뿐, A나 B 드라이브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FDD)를 주요 저장장치로 이용하던 1990년대 이전 PC 시스템의 흔적이 현대까지 이어진 것이다. 당시 PC 운영체제 시장의 주류를 이루던 도스운영체제는 플로피 디스크를 꽂아 부팅했으며, 첫번째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가 바로 A 드라이브, 두번째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가 B 드라이브로 지정되곤 했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부터 HDD가 PC 시스템에 탑재되기 시작하며 C 드라이브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이후 PC 시장의 트렌드 변화에 따라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가 탑재되지 않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윈도 운영체제의 저장소는 C 드라이브에서 시작하는 것이 관행으로 굳어진다. 참고로 현대의 윈도 운영체제 기반 시스템에서 ‘컴퓨터 관리’ 메뉴의 ‘저장소’ 메뉴를 통해 C나 D 드라이브를 A나 B 드라이브로 이름을 임의 변경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다 일부 응용프로그램의 실행 오류를 유발할 수 있으므로 추천하지 않는다.
글 / IT동아 김영우(pengo@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