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노미터 경쟁, 반도체 공정은 어떤 의미일까?
[IT동아 권택경 기자] 요즘에는 반도체가 안 들어가는 물건을 찾아보기 힘들다. 예전엔 IT 기술과 거리가 멀었던 제품들도 이젠 반도체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사물인터넷(IoT) 시대, 자율주행 전기차 시대가 성큼 다가오면서 생긴 변화다. 그러다 보니 반도체 수요가 폭증했고, 최근에는 공급 부족 현상도 벌어지고 있다. 반도체 생산 업체들의 수주 경쟁도 치열해졌다.
반도체를 위탁 생산하는 파운드리 업계에서는 1위 TSMC를 그 뒤를 쫓는 삼성전자의 경쟁이 치열하다. 관련 뉴스들을 보다 보면 몇 나노 공정을 언제까지 도입하겠다느니 하는 말이 많이 보인다. 근데 이 공정이라는 거, 나노 앞에 붙는 숫자가 작을수록 좋다는 건 알겠는데 정확히 무슨 의미일까?
가늘게, 더 가늘게
결론부터 말하자면 반도체 공정에서 말하는 ‘나노미터’는 반도체 안에서 전기 신호들이 지나다니는 길, 그러니깐 전기 회로의 선폭을 가리킨다. 숫자가 작을수록 그만큼 반도체에 새겨진 전기 회로가 가늘다는 얘기다. 1nm(나노미터)가 10억분의 1미터니깐, 5nm 공정이라는 건 반도체에 5억분의 1미터 정도로 가는 전기 회로를 새길 정도로 정밀한 기술로 반도체를 만들었다는 뜻이다.
공정을 미세화하면 얻을 수 있는 이점은 한둘이 아닌데, 먼저 생산 효율이 높아진다. 반도체가 정확하게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는 몰라도, 반도체 공장에서 직원들이 번쩍거리는 원판을 이리저리 살펴보는 장면 정도는 본 적 있지 않은가? 이 반도체 원판을 ‘웨이퍼’라고 부른다.
우리가 보통 반도체 또는 반도체 칩이라고 부르는 건 이 웨이퍼로 만든 집적 회로(Integrated Circuit, IC)를 뜻한다. 집적 회로는 웨이퍼를 다이(Die)라는 작은 사각형 형태로 쪼개서 거기다 전기 회로를 새겨넣고 트랜지스터라는 걸 박아 넣어서 만든다. 공정이 미세할수록 다이 크기를 줄일 수 있으니 한 웨이퍼로 더 많은 집적 회로를 생산할 수 있다.
같은 다이 안에 더 세밀하게 회로를 새길 수 있으니 트랜지스터도 더 많이 넣을 수 있다. 트랜지스터 개수는 반도체 성능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다. 트랜지스터가 많으면 많을수록 성능도 높아진다. 참고로 5nm 공정으로 제작된 애플 M1 칩에는 트랜지스터 160억 개가 들어가 있다.
트랜지스터라는 건 전기 신호를 증폭하고 스위치 역할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스위치 역할인데, 손가락으로 숫자를 계산할 때를 생각해보자. 손가락을 펴고 접는 거로 ‘있음’, ‘없음’을 구분하지 않는가? 트랜지스터는 신호를 켜고 끄는 것으로 컴퓨터가 이진법으로 계산할 때 알아야 할 0과 1이라는 정보를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된다.
우리 손가락은 10개이기 때문에 숫자 10까지는 암산할 필요도 없이 쉽게 세고 계산할 수 있는데, 만약 손가락이 20개라면 10이 넘는 숫자를 계산하는 것도 더 수월하지 않겠는가? 비슷한 원리로 트랜지스터가 많을수록 계산 성능도 높아지는 것이다.
사실 공정 미세화를 안 해도 마음만 먹으면 다이 크기를 키워서 트랜지스터 개수를 늘릴 수 있다. 그런데 그러면 한 웨이퍼에서 나오는 반도체 숫자가 줄어드니 생산 효율이 떨어진다. 게다가 공정 단위가 클수록 같은 성능이라도 전력 소모나 발열이 커진다. 예를 들어 4명이 400m 이어달리기를 할 때와 같은 인원으로 1600m 이어달리기를 할 때를 비교해서 생각해보자. 인원은 같은데, 거리가 늘어나면 한 사람이 더 많은 거리를 이동해야 하니 힘도 더 들고 땀도 더 난다.
반도체도 마찬가지다. 미세공정으로 만든 반도체는 좁은 면적에 더 많은 트랜지스터가 밀집되어 있으니 전자가 이동하는 거리도, 시간도 줄어들고 그래서 더 빨리 작동하고, 에너지도 덜 든다. 에너지가 덜 드니깐 그만큼 전자가 움직일 때 발생하는 열도 줄어든다. 그래서 공정을 미세화할수록 성능은 뛰어난데, 전력 소모와 발열은 줄일 수 있다는 거다.
공정 미세화, 왜 어려울까?
공정 미세화에 이렇게 이점이 많다 보니 반도체 업체들은 이제 미세공정을 거쳐서, 초미세공정 경쟁에 들어가고 있다. 삼성전자와 TSMC는 현재 5나노 칩셋을 생산 중이고 내년에는 3나노 양산을 시작하겠다는 계획이다. 그런데 인텔처럼 아직 한 자릿수에 진입도 못 하고 있는 업체도 있다.
TSMC나 삼성전자가 워낙 앞서있어서 그렇지 사실 공정 미세화라는 게 원래 쉬운 게 아니다. 여러모로 기술적 난제가 많다. 일단 회로를 가늘게 그려 넣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 반도체에 회로를 파내기 전에 밑그림을 그려주는 과정을 노광이라고 하는데, 기존 공법으로는 선을 더 가늘게 하는 데 한계가 있다.
그래서 필요한 게 EUV 노광장비다. EUV 노광장비는 이름 그대로 극자외선(Extreme UltraViolet)을 쓴다. 기존 불화아르곤 레이저보다 빛 파장이 짧아서 회로를 더 세밀하게 그릴 수 있다. 쉽게 말해 그냥 굵은 연필심으로 그리던 걸 얇은 샤프심으로 그리게 됐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 EUV라는 걸 현재까지는 네덜란드에 있는 ASML이라는 업체 단 한 군데에서만 생산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만들 수 있는 숫자도 한정적이고, 그래서 항상 모자라다. 요즘 반도체 공급 부족 현상이 벌어지는 것도 애당초 미세공정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이 EUV 노광장비 자체가 공급 부족인 데에도 원인이 있다. 반도체 생산 업체들이 EUV 노광장비를 확보하려고 혈안이 된 이유다.
공정 미세화를 어렵게 만드는 또 다른 복병이 있다. 바로 ‘양자 터널링’ 현상이라고 부르는 건데, 이름처럼 양자역학이랑 연관이 있다. 양자역학은 머리 터질 정도로 복잡하고 난해하기로 유명하지만 터널링 현상을 뭔지 정도는 수박 겉핥기 수준 지식만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볼링을 할 때를 생각해보자. 볼링공을 던지려다 손이 미끄러져서 그만 레일 옆 도랑에 공이 빠져버렸다. 똥통, 아니 ‘거터’라고 부르는 도랑인데, 공은 파져있는 도랑을 그대로 따라서 얌전히 굴러가게 돼 있다. 이게 우리 세상 상식이고, 고전 물리학 법칙이다.
근데 양자역학이 적용되는 나노 단위 미시 세계에서는 볼링공이 유령이라도 된 것처럼 도랑을 뚫고 멋대로 굴러가는 일 같은 게 벌어질 수 있다. 이게 터널링 현상이다. 반도체에 새겨진 회로를 따라 얌전히 흘러야 할 전자가 회로를 넘어서 원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거다. 공정이 워낙 미세해지다보니 양자역학의 법칙이 지배하는 나노 세계까지 도달해버린 탓이다.
터널링 현상이 일어나면 전자가 설계대로 움직이지 않으니 반도체가 오작동을 일으키는 데다, 줄줄 새는 전자 때문에 누설 전류도 발생한다. 그래서 초미세공정 반도체를 만들 때는 이 터널링 현상을 어떻게 해결할지가 중요한 관건이 된다. 반도체 공정 발전이 갈수록 더뎌지는 것도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글 / IT동아 권택경 (tk@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