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리더 이전에 영원한 GE맨' 잭 웰치 전 GE 회장의 발자취
[IT동아 강형석 기자] 제너럴일렉트릭(General Electric), GE라는 이름이 익숙할지 모를 이 기업은 사실 역사와 전통이 있는 기업이다. 1892년 설립한 전기관련 기업으로 시작했지만 전신은 1878년 토머스 에디슨이 설립한 기업과 관련이 있어서다. 현재는 의료기기, 항공기 엔진, 에너지 사업 등 거의 대부분 영역에서 업적을 올리고 있는 글로벌 인프라 기업이다.
하지만 이런 굴지의 글로벌 기업도 위기가 있었다. 1970년대를 기점으로 진행했던 사업 다각화가 힘을 쓰지 못하며 판매실적이 감소세에 접어들었고, 자연스레 주가 및 기업 신뢰도 하락이 이어졌다. 당시 대부분 미국 기업은 일본 기업에 비해 가격·속도·품질 모두 뒤처진데다, GE는 미국 원자력 발전소 사건 중 하나인 쓰리 마일 아일랜드 사건(Three Mile Island Accident)에 의한 여론 악화로 발전기 수주에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기업의 추락을 인정, 정리할 것은 과감히 정리하고 살려야 할 부분은 투자를 통해 경쟁력을 강화시켜 GE를 다시 일으켜 세운 사람이 있다. 바로 고(故) 잭 웰치(Jack Welch) 전 GE 회장이다.
엄격한 교육 속에 탄생한 우등생
그의 본명은 존 프란시스 웰치 2세(John Francis Welch jr.)로 1935년 11월 19일 미국 메사추세츠 주 피바디(Peabody)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아일랜드에서 이민 온 것으로 생활이 여유롭지 않았지만 정직하게 생활하며 그에게 엄격히 교육시켰다. 특히 어머니인 그레이스 웰치(Grace Welch)는 "바라는 무엇이든 최선의 노력을 하면 해낼 수 있다. 만약 실패하더라도 다시 도전하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해왔다.
말을 잘 하지 못했던 그에게 힘을 주었던 것도 어머니다. 말을 더듬는 탓에 참치 샌드위치를 제대로 주문하지 못하고 자책하던 그를 "너는 너무 똑똑해 그런거야. 머리에서 나온 똑똑한 생각을 입이 바로 따라오지 못해서 그렇다"고 말한 일화는 유명하다. 훗날 잭 웰치는 자신의 경영 신념 중 다수가 어머니에게서 온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고교생이었던 잭 웰치가 하키팀 주장 시절 일화도 유명하다. 그가 연패를 이어가던 팀이 마지막 게임에서 승리하기 위해 노력하던 차에 팀원이 사소한 실수로 결국 역전패를 당했다. 그는 경기장 위에 하키스틱을 내던지며 라커룸으로 돌아갔고, 그의 어머니가 다가와 멱살을 잡고 흔들며 "패한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앞으로 넌 무엇을 하든지 결코 이길 수 없다"고 말했다. 현실을 정면으로 맞서면 얼마든지 다시 해낼 수 있다는 점을 알려주기 위함일 것이다.
반면, 아버지는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그에게 몸소 보여줬다. 보스턴 근교를 오가는 열차 검표원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새벽 5시에 출근하고 하루 종일 열차의 통로를 오가며 승객들의 표를 검사했다. 날씨가 좋지 않은 날이면 하루 전에 나가 열차 칸 한구석에서 잠을 자고 다음 날 작업을 미리 준비하기도 했다고.
9살 되던 해의 잭 웰치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가 "일을 해야만 돈을 벌 수 있다"고 교육했기 때문. 그래서 시작한 일은 골프장 캐디 일이었다고 한다. 당시 하루 3달러를 벌었고 골프도 자연스레 배울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아르바이트를 통해 일의 신성함을 경험하고, 골프를 통해 경쟁을 체득하는 큰 그림인 듯 하다.
신문 읽기를 좋아한 것도 유년 시절부터다. 아버지는 늘 퇴근 시간에 버려져 있던 신문 뭉치들을 정리해 잭 웰치에게 건넸다. 신문과 독서를 통해 정보수집과 지식에 대한 바탕을 키우는 원동력이 되었다.
GE 플라스틱 사업부에서 시작된 쾌속 승진의 기운
1960년, 24세였던 그는 GE 플라스틱 사업부에 입사하게 된다. 메사추세츠 대학교 애머스트를 졸업하고 일리노이대학에서 화학공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였다. 플라스틱 연구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던 잭 웰치는 플라스틱 합성물질 개발에 몰두했고 좋은 성과를 이뤄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1년만에 GE에 실망하고 말았다. 변화를 거부하는 완고한 관료주의 분위기와 비합리적인 임금 체계, 불합리적인 인사제도 관행 때문이었다.
사표를 내기로 마음먹은 그는 마음을 바꿨다. 그를 눈 여겨 보던 루벤 구토프(Ruben Gutoff) 이사 때문이었다. 루벤 구토프 이사는 잭 웰치에게 GE에서 꿈을 펼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는 것은 물론 관료적 간섭을 배제하겠다고 약속하며 그를 설득했다. 새벽 시간에 공중전화로 사직을 만류한 그의 진심이 느껴졌을까? 잭 웰치는 퇴사를 철회했다.
이어 그는 혼자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통해 최고의 성과를 냈고, 이후 연구원을 추가로 고용하면서 플라스틱 신제품을 개발하는데 힘을 쏟았다.
하지만 위기가 찾아왔다. 1963년 그가 책임자로 있던 공장 실험실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사망자는 없었지만 폭발로 인해 공장이 전소됐다. 이후 사건 관련 진상조사위원회에 모습을 드러낸 잭 웰치는 사건에 대한 변명보다 사업이 계속 추진될 수 있기를 바란다며 위원을 설득했다. 이어 폭발의 원인과 해결방안을 설명하며 향후 계획에 대해 강조했다.
반전은 이후에 벌어졌다. 그의 말을 듣던 찰리 리드(Charlie Reed)는 "차라리 잘 됐다. 나중에 대량생산 중 문제가 발생되면 더 큰일이었을 것이다. 실험 중 이런 문제를 미리 알 수 있어 차라리 잘 됐다. 연구하시는 분 어느 누구 다치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라고 격려한 것. 자신감을 얻은 잭 웰치는 다시 실험에 복귀해 연구를 재개할 수 있었다. 연구 끝에 그의 팀은 노릴(Noryl)이라는 합성물질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플라스틱 사업부의 지속적인 성장을 이끈 공로를 인정 받은 잭 웰치는 입사 8년 만인 1968년에 사업 부문장으로 승진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5년에는 이를 바탕으로 차기 최고경영자(CEO) 7인 후보 중 한 명이 되었다.
'핵심+미래+서비스' 중심으로 진행된 고강도 개편
GE는 최고경영자 육성 프로그램이 존재한다. 여기에서 잭 웰치는 주목 받지 못했지만 GE 캐피탈(탕시 GE 크레딧)을 집중 육성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이사진들에게 인정 받으면서 두각을 드러냈다. 하지만 레그 존스(Reginald Jones) 회장은 이미 그를 차기 회장으로 점지해 둔 것 같았다. 1979년 1월 비행기 안에서 존스 회장은 그에게 질문을 하나 했다.
"만약 이 비행기가 추락해 자네와 내가 죽으면 누가 다음 GE 회장이 될까?"
이 질문에 그는 "저는 추락하는 비행기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 GE의 회장직을 인수하겠다"고 말했고, 6개월 이후 이어진 존스 회장의 "만약 이 비행기가 추락해 자네만 무사하다면 어떻게 할건가?"라는 질문에 잭 웰치는 "바로 공석인 GE 회장직을 수행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존스 회장은 1981년에 회장직을 넘겼다. 그리고 잭 웰치는 46세 나이에 새 회장으로 취임하게 됐다.
그러나 잭 웰치가 레그 존스 회장에게 자리를 이어 받았을 때의 GE는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매출액 280억 달러, 이 중 순이익은 16억 달러였다.
잭 웰치는 회장에 취임한 이후 사업을 개편하기 위한 구상을 과감하게 진행했다. 특히 11개 사업을 중심으로 개편이 이뤄진 것이 인상적이다. 그는 ▲ 가전(Appliance) ▲ 산업설비(Industrial Systems) ▲ 조명(Lighting) ▲ 발전설비(Power Systems) ▲ 운송(Transportation Systems) ▲ 항공기 엔진(Aircraft Engines) ▲ 의료기기(Medical Systems) ▲ 플라스틱(Plastics) ▲ 금융(Capital) ▲ 정보 서비스(Information Service) ▲방송(Broadcasting) 등으로 주력 사업을 압축했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인수합병을 그렇지 않으면 과감히 정리했다.
5년간 11만 명 이상의 직원이 GE를 떠나야 했고, 그는 매체로부터 '중성자탄 잭(Neutron Jack)'이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건물은 그대로 둔 채 사람만 모두 물갈이하는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반대 여론이 상당했지만 그는 꿋꿋하게 구조조정을 진행해 나갔다.
동시에 1등 혹은 2등 전략을 구사했다. 핵심(Core), 첨단 기술(High Tech), 서비스(Service)가 미래라는 청사진도 제시했다. 핵심 사업을 중심으로 기술 집약 사업과 금융·방송 등 서비스 사업이 뭉쳐지면 큰 이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이 구상 안에 없는 사업이라면 바로 퇴출 대상이 됐다.
이 전략을 17년간 꾸준히 일관성 있게 추진한 결과, GE는 엄청난 성장을 이루는데 성공했다. 1998년 매출액 1,000억 달러(순수익 100억 달러)를 기록했으며 2000년에는 매출액 1300억 달러(순수익 127억 달러)를 달성했다. 이 중 40% 이상이 미국이 아닌 해외에서 발생했을 정도였다.
물론, 그에게 좋은 평가만 존재한 것은 아니다. 1986년 인수한 키더 피바디(Kidder Peabody & Co.)에서 부실이 발생했기 때문. 1991년 11월부터 94년 3월까지 3억 5,000만 달러 이익이 허위 조작이란 것이 밝혀지면서다. 실제로는 1억 달러 이상 손실을 입고 있었지만 숨겨왔다. 이로 인해 GE는 큰 액수의 벌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소매유통 서비스에 진출하기 위해 1988년 인수했던 몽고메리 워드(Montgomery Ward) 사 역시 38억 달러에 인수했지만 월마트와 홈데포 등에 밀려 12년 뒤에 문을 닫았다. 정년을 연장하면서까지 추진했던 허니웰(Honeywell) 사 인수 실패도 그의 흑역사 중 하나다.
중성자탄 잭이라는 별명과 달리 그는 투자나 인재 발굴에도 적극적이었다. 무엇보다 관료주의를 혐오했기에 재임한 20년간 GE 내에 모든 관료주의를 타파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게 탄생했던 조직이 '벽 없는 조직'이다. 관리자들은 이 개념을 이해하고 있는지 잘 실행하고 있는지를 평가 받았으며, 결과에 따라 승진과 급여 등 인사고과에 영향을 줬다. 의사결정과 지식전달을 위한 구조를 과거 8~9단계에서 3~4단계로 과감히 줄이기도 했다. 그리고 직원에게 권한과 임무를 부여했다.
40년 이상 GE 안에서 성공과 실패를 모두 경험한 잭 웰치. 이제 그는 떠났지만 그가 걸어온 발자취와 업적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글 / IT동아 강형석 (redbk@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