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흥망사] 한국 게임시장의 '창세기'를 열다. '소프트맥스'

김영우 pengo@itdonga.com

[IT동아 김영우 기자] 현대의 컴퓨터 게임은 마치 할리우드 영화와 같다. 깊이 있는 스토리에 방대한 스케일, 그리고 매력적인 캐릭터를 강조하는 게임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게임의 세계관에 빠져든 팬들은 기꺼이 돈을 지불하고 게임을 플레이 한다. 이는 마치 연예인의 팬이 되는 것과 비슷하다.

소프트맥스 로고
소프트맥스 로고

다만, 아무리 스토리와 캐릭터가 매력적이고 영상미가 뛰어나더라도 이를 종합적으로 아우르는 구성이 엉성하거나, 제작기간 동안 충분한 검증을 거치지 않아 오류나 많이 발생하는 게임이라면 문제가 있다. 특히 현대의 게임 개발사들은 많은 투자자들의 자본을 등에 업고 게임을 제작하기 때문에 게임을 어설프게 만들어 시장에서 실패한다면 게이머들을 실망시킬 뿐 아니라 투자자들에게도 큰 손해를 끼친다. 대한민국 초창기 게임 시장에 화려하게 데뷔해 많은 주목을 받았으나, 실속 없는 게임만 내놓다가 결국 초라한 결말을 맞은 게임 개발사, '소프트맥스(Softmax)'가 바로 그런 경우다.

동호인과 경영인의 의기투합, '소프트맥스'

1990년대 이전까지 대한민국 게임시장은 일본이나 미국을 비롯한 해외 업체들의 독무대였다. 해외 게임업체들은 이미 체계적인 시스템 및 수준급의 개발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 업체들은 개발 능력이 떨어질 뿐 아니라 제대로 된 기업의 형태를 갖춘 경우도 드물었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사이에 '미리내소프트(대표작: 그날이 오면)', '소프트액션(대표작: 폭스레인저)' 등의 초기 게임 개발사들이 몇몇 작품을 출시하기도 했지만, 이를 제대로 팔 만한 유통 시스템을 가지고 있지 못했고, 불법복제도 심해 상업적으로 만족할 만한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또한 경영 마인드가 부족한 개발자들이 중심이 되어 회사를 운영하다 보니, 체계적인 마케팅을 하지 못하는 것 역시 약점이었다.

1993년 설립된 ‘소프트맥스’ 역시 초창기에는 다른 게임 개발사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시 PC통신 '하이텔'의 게임 동호회에서 함께 활동하던 최연규(이후 소프트맥스 이사), 김학규(이후 그라비티, IMC 게임즈 설립) 등의 동호인들은 가로 스크롤 액션 게임 '리크니스'를 개발하고 있었으나 주변 환경이 좋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소프트맥스가 출시한 첫 오리지널 작품인
'리크니스'
소프트맥스가 출시한 첫 오리지널 작품인 '리크니스'
< 소프트맥스가 출시한 첫 오리지널 작품인 '리크니스'>

이 때를 즈음해 그들은 소프트맥스의 설립자인 정영희(이후 정영원으로 개명) 대표를 만나게 되었다. 리크니스 개발팀은 게임을 개발할 사무실, 그리고 게임을 납품 받아 유통할 회사가 필요했고, 정영희 대표는 개발진과 게임이 필요한 상태였다. 덕분에 이들은 자연스럽게 의기투합했으며, 이를 통해 리크니스는 소프트맥스의 이름으로 출시한 첫 번째 오리지널 게임이 되었다. 리크니스는 PC 플랫폼으로 개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콘솔 게임기에 뒤지지 않는 부드러운 스크롤과 화사한 컬러를 과시하며 호평을 받았다.

전설의 국산 RPG, '창세기전'의 등장

열정이 있는 개발진이 전문 경영진이 만나게 되면서 소프트맥스는 1994년에 정식으로 법인을 설립하고 기업으로서의 체계적인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한편, 소프트맥스의 개발진들은 '파이널판타지'나 '파이어엠블럼'과 같은 일본의 대작 RPG(롤플레잉게임)를 동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1994년에는 '손노리'에서 개발한 '어스토니시아 스토리'가 큰 인기를 끌며 한국 PC 시장에 RPG붐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 역시 소프트맥스가 RPG 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

소프트맥스는 RPG를 기획하면서 각종 SF 및 판타지, 무협물 등의 스토리와 설정을 다수 차용해 방대한 세계관을 구상했으며, '바람의 나라'로 유명한 인기 만화가 '김진'과 계약을 맺어 매력적인 디자인의 캐릭터 및 미려한 삽화를 갖출 수 있었다. 그 결과물이 바로 1995년 12월에 첫 출시된 ‘창세기전’ 이었다.

창세기전 시리즈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소프트맥스의 대표작이
된다
창세기전 시리즈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소프트맥스의 대표작이 된다
< 창세기전 시리즈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소프트맥스의 대표작이 된다>

창세기전은 이전의 국산 게임에서 볼 수 없던 완성도 높은 스토리와 개성적인 캐릭터를 품고 있었고 그래픽이나 사운드의 수준도 높아 게이머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다. 다만, 개발에 주어진 기간이 짧은 편이었고 제작진들도 RPG 개발의 노하우가 없다 보니 게임 진행 중에 버그(오류)가 자주 발생했으며, 스토리 역시 끝까지 구현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이머들은 이 게임의 매력을 높이 평가했다.

창세기전의 인기에 힘입은 소프트맥스는 여세를 몰아 1996년 12월에 시리즈의 두번째 작품인 '창세기전 2'를 출시했다. 창세기전 2는 전작에서 끝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완결 시켰으며, 당시 게임으로선 드물게 CD-ROM을 매체로 삼아 한층 향상된 그래픽과 사운드를 구현했다. 전작을 해 본 기존 팬은 물론, 새로 시리즈를 접한 게이머들도 창세기전 2에 크게 만족했으며, 이에 힘입어 최고의 국산 RPG라는 칭송을 받을 정도가 되었다.

선풍적인 인기, 커지는 불안요소

덕분에 창세기전 시리즈는 소프트맥스를 대표하는 간판 작품이 된다. 팬들의 성원에 힘입어 '서풍의 광시곡', '템페스트' 등, 창세기전 시리즈의 세계관을 이어받은 외전 게임들도 다수 출시해 이 역시 큰 인기를 끌었다. 소프트맥스의 인기가 절정을 이룬 건 1999년 출시된 '창세기전 3', 그리고 완결편인 2000년의 '창세기전 3 파트2'였다. 창세기전 3는 전작보다 한층 방대해진 스토리와 미려한 삽화, 그리고 아름다운 사운드가 어우러져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창세기전 3는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지만 게임의 완성도 면에서 비판도
많았다
창세기전 3는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지만 게임의 완성도 면에서 비판도 많았다

하지만 창세기전3는 스토리와 볼거리 면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비판도 많이 받았다. 특히 당시 소프트맥스 게임의 고질병으로 지적 받던 버그가 너무 많았다. 플레이 중에 게임이 멈춰버리거나 갑자기 운영체제 바탕화면으로 튕겨 나가 버리는 현상이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난이도 조절에 실패해 특정 구간이 지나치게 어렵거나 쉽다는 지적을 받기도 하는 등, 구성 면에서도 아쉬움이 많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전 3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이에 힘입어 2001년, 소프트맥스와 창세기전 3 파트2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수여하는 '대한민국 게임대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같은 해 소프트맥스는 코스닥 시장에 상장도 하는 등, 그야말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마그나카르타'가 부른 참담한 재앙

하지만 소프트맥스의 위기는 전성기와 동시에 찾아왔다. 소프트맥스는 창업 이후, 매년 1개 이상씩 대작 게임을 출시해 수익을 얻고, 이를 통해 후속작의 개발에 투자하는 패턴으로 회사를 운영해 왔다. 하지만 당시 소프트맥스의 개발 역량으로는 이러한 출시 스케줄을 도저히 소화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충분히 완성도가 검증되지 않은 게임이 출시되는 일이 잦았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게임 출시일을 연기해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 정상이었겠지만, 코스닥 상장까지 한 소프트맥스의 입장에서 이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연말까지 게임을 출시하지 못한다면 이로 인한 매출하락은 피할 수 없을 것이고, 투자자들 역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2001년에는 창세기전 시리즈의 뒤를 잇는 새로운 대작 게임인 '마그나카르타'가 개발 중이었다. 게이머들은 물론, 투자자들 역시 이 게임에 큰 기대를 걸었다. 소프트맥스 역시 더 많은 관심과 투자를 이끌기 위해 마그나카르타의 홍보에 전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문제는 게임 자체의 개발 상황이었다. 마그나카르타는 소프트맥스 게임 최초로 3D 그래픽을 전면적으로 도입했으며, 창세기전을 능가하는 방대한 스토리와 다양한 캐릭터, 그리고 다채로운 시스템을 적용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전에 없던 새로운 분야의 작업이었기에 개발은 좀처럼 진척되지 않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개발기간은 너무나 짧았다.

'마그나카르타'는 엄청난 기대를 모았으나, 그 결과물은 참담한
수준이었다
'마그나카르타'는 엄청난 기대를 모았으나, 그 결과물은 참담한 수준이었다
< '마그나카르타'는 엄청난 기대를 모았으나, 그 결과물은 참담한 수준이었다>

2001년 12월에 마그나카르타가 출시되었지만, 몇 차례나 버그를 수정하는 패치를 배포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오류는 잡히질 않았다. 더욱이, 광고에서 홍보했던 여러 내용이 게임 본편에는 나오지 않는 경우도 많아서 사실상 미완성 게임을 출시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게이머들과 투자자들은 소프트맥스의 이러한 무책임한 처사에 크게 분노했다. 특히 그동안 게임의 완성도가 다소 미흡함에도 불구하고 소프트맥스의 게임에 애정을 기울였던 팬들의 실망감은 더할 나위 없이 컸다. 이 사건의 여파가 너무 컸기 때문에 이후, 한국 PC 게임 시장에서 국산 패키지 게임이 출시되는 사례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으며, 소프트맥스는 PC용 대작게임의 개발을 사실상 포기하기에 이른다. 한 업체의 무책임한 행동 때문에 시장 전체가 악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후 소프트맥스는 한동안 극심한 침체를 겪었다. 모바일 게임 몇 종류, 그리고 채팅 서비스와 게임 포탈 사이트의 기능을 겸하는 4Leaf 서비스 등으로 회사를 연명해 나갔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당시 한국의 게임개발사로선 불모지였던 콘솔 게임 시장 및 일본 시장에 진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이다. 2004년에는 내용을 완전히 뜯어고친 마그나카르타를 플레이스테이션2용으로 출시했으며, 2009년에는 엑스박스360용 마그나카르타 2를 출시, 한국과 일본에서 적지 않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그리고 2007년에는 넷마블 및 일본 반다이남코와 제휴, 인기 캐릭터 '건담'을 소재로 한 온라인 액션 게임 'SD건담 캡슐파이터 온라인'을 개발했다. 이 게임이 꾸준한 인기를 끌면서 소프트맥스는 패키지 게임이 아닌 온라인 게임에서도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바닥까지 떨어졌던 소프트맥스의 주가도 어느 정도 회복된다.

이러한 와중에 소프트맥스는 자사의 간판 게임이었던 창세계전 시리즈를 MMORPG로 부활시키겠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것이 바로 2009년에 공식 발표된 '창세기전 4' 프로젝트였다. 소프트맥스는 창세기전 4를 위한 개발진을 모집하는 등, 본격적인 개발에 들어갔다고 선언했지만 5년이 넘도록 창세기전 4는 실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개발에 난항을 겪다가 프로젝트가 취소되었다는 소문까지 들릴 정도였다. 이러한 와중에 소프트맥스를 그나마 지탱해 주었던 SD건담 캡슐파이터 온라인마저 반다이남코측과의 갈등 및 일부 개발진들의 퇴사로 인해 2015년 5월에 서비스를 중단하게 된다.

참담한 실패, 역사 속으로 사라진 소프트맥스

이런 와중에 소프트맥스의 경영 상태는 극히 악화되었다. 극심한 매출 하락으로 인해 2015년 1분기 이후 주식 거래가 정지되었으며, 2016년 상반기까지 3년 연속 적자를 기록하는 등, 소프트맥스는 바람 앞의 등불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다.. 결국 2016년 9월, 소프트맥스 정영원 대표는 주식 및 경영권을 엔터테인먼트 투자사인 ESA에 넘겼다. 사실상 독립 업체로서의 소프트맥스는 사실상 막을 내린 셈이었다.

한편, 창세기전 4는 악전고투 끝에 2015년부터 베타 서비스를, 2016년 8월에 드디어 정식 서비스를 시작한다. 하지만 이 게임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원작에 대한 존중이 충실해 올드 팬들의 향수를 자극한다는 점은 그나마 긍정적이었지만, 게임의 구성이나 그래픽 수준, 그리고 콘텐츠의 내용이 최신 MMORPG로서는 수준미달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부진한 흥행 성적이 이어지는 가운데, 정식 서비스 개시 1년도 되지 않은 2017년 5월 1일, 창세기전 4는 서비스를 종료하기에 이른다.

소프트맥스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창세기전
4'
소프트맥스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창세기전 4'
< 소프트맥스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창세기전 4'>

회사의 모든 것을 걸고 장기간 동안 개발했던 창세기전 4는 참담하게 실패했으며, 회사의 경영권은 이미 외부 업체에 넘어간 상태였다. 그리고 2016년 10월 24일, 마지막으로 남았던 회사명 조차 'ESA'로 바뀌면서 소프트맥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결국 프로가 되지 못한 '슈퍼 아마추어'

소프트맥스는 게임이 산업 분야 중 하나라는 개념마저 의심받던 1990년대 한국 게임 시장에서 단연 빛나는 존재였다. 개발진들은 게임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회사 경영진은 본격적인 마케팅 능력을 적극 발휘, 한국에서도 게임 개발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사실상 처음으로 증명했다. 또한 매력적인 세계관과 캐릭터를 다수 창조해 많은 팬들을 매혹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회사의 규모가 급격히 커지는 동안, 내실은 전혀 키우지 못했다. 팬들의 기대에 미칠만한 게임 개발능력을 갖추지 못했으며, 체계적인 기획 및 노무 관리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상장을 하고, 투자자를 끌어 모으기 위해 과장광고를 일삼았다. 이런 와중에 나온 결과물들의 수준은 처참했다. 결국, 고객과 투자자들을 실망시켰을 뿐 아니라, 관련 산업 전반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가장 큰 차이점은 자신이 낸 결과물에 끝까지 책임을 지느냐, 혹은 안 지느냐다. 한국 게임산업 초창기의 소프트맥스는 가장 매력적인 아마추어 중 하나였지만, 결국 진정한 프로는 되지 못했다. 얼핏 보기에 화려하고 대단한 것을 보여주는 것에는 능했지만, 실속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상당수 게이머들이 이러한 소프트맥스 특유의 아마추어리즘에 매료되어 팬이 되었다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글 / IT동아 김영우(pengo@itdonga.com)

IT동아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Creative commons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의견은 IT동아(게임동아) 페이스북에서 덧글 또는 메신저로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