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흥망사] 가족경영 고집하던 '산요'의 멸망
[IT동아 김영우 기자] 세상이 각박해 질수록 믿을 건 가족 밖에 없다고 말하곤 한다. 이 때문에 사업을 운영할 때도 외부인보다는 자식을 비롯한 친족들을 우선적으로 채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능력보다는 혈연을 지나치게 우선한 나머지, 사업이 나락으로 떨어진 경우도 만만치 않게 많다. 국가경제의 한 축을 지탱하고 있을 정도로 큰 규모의 기업이 이런 상황에 처한다면 이는 재앙이다. 한때 일본을 대표하는 가전업체 중 하나였던 산요전기(三洋電機, SANYO Electric, 이하 산요)가 그러했다.
<산요전기 로고>
집 나온 마쓰시타의 처남, 산요를 세우다
<산요 창업자 이우에 토시오(1902~1969)>
산요는 일본 최대의 가전업체 중 하나인 파나소닉(Panasonic, 구 마쓰시타 전기)와 관련이 깊은 기업이다. 산요의 창업자인 이우에 토시오(井植 歳男, 1902~1969)는 마쓰시타 전기의 창업자인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 幸之助, 1894~1989)의 처남이었으며, 한때 마쓰시타 전기의 전무이사로 근무하기도 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때 일본 군부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당시 전후 일본을 통치하던 연합군 사령부에 의해 이우에 토시오는 1946년, 회사에서 물러나게 된다.
같은 해 이우에 토시오는 마쓰시타 고노스케로부터 자전거용 발전램프의 특허권과 카사이시(加西市)에 있던 마쓰시타의 공장을 물려받아 ‘산요전기제작소’로 이름을 바꾼다. 산요(三洋)라는 이름에는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에 걸친 전세계를 무대로 사업을 전개하겠다는 희망을 담았다. 1949년에는 ‘산요전기주식회사’를 설립하며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진보적인 기술을 토대로 가전 시장 강자가 된 산요
창업초기의 산요는 마쓰시타의 제품을 OEM 방식으로 생산해 공급하는 것에 주력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자사의 독자적인 영역을 점차 늘려 나갔다. 1953년 흑백 텔레비전을 출시했으며, 1960년에는 컬러 텔레비전 및 일본 최초의 2조식 탈수건조세탁기를 선보였다. 그 외에 1971년에는 일본 최초로 무선 리모컨을 갖춘 텔레비전, 1995년에는 세계 최초의 3D TV를 출시하는 등 상당히 진보적인 가전제품을 다수 선보이며 시장에서 인기를 끌었다. 미래산업 투자에도 적극적이었다. 특히 2차전지 및 태양전지 부문에서 거의 독보적인 기술력을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산요 초창기 제품 중 하나인 8S-P3 트렌지스터 라디오(1959년) 출처 위키피디아>
산요는 한국과도 관계가 깊은 기업이었다. 1969년에 삼성전자와 합작해 ‘삼성산요전기’를, 1973년에는 ‘삼성산요파츠(현 삼성전기)’를 설립하기도 했다. 이를 토대로 삼성은 TV 제조 사업을 본격화 하는 등 상당한 도움을 얻었다. 그 외에 중견기업인 한일전기 역시 초창기엔 산요와의 기술 제휴를 통해 자동펌프 및 환풍기 등의 제품을 생산하기도 했다.
세습을 거듭하는 전근대적인 지배구조, 연 이은 불상사
꾸준한 기술 발전을 통해 사세를 키웠지만, 기업 지배구조는 극히 전근대적이었다. 특히 창업자인 이우에 토시오 및 친족들이 연이어 산요의 수뇌부 자리에 올랐다. 이우에 토시오가 사망하자 1968년 그의 동생인 이우에 스케로우(井植 祐郎)가 사장이 됐고, 1971년엔 회장직에 올랐다. 막내동생 이우에 카오루(井植 薫) 역시 1971년에 산요의 사장이 되었다. 형제가 모두 사망하자 1986년에는 창업주의 장남인 이우에 사토시(井植 敏)가 사장 자리를 물려받는 등 실력보다는 혈연을 중시하는 세습 체계가 이어졌다. 이들 이우에 가문은 불과 산요의 주식 1.2%를 가지고 있었지만 사실상 산요의 모든 것을 손에 쥐고 흔들었다.
경영상의 판단 착오도 이어졌다. 이우에 사토시는 사장에 취임하며 기존 가전제품 제조업 외의 사업 부분 비중을 크게 늘릴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후 산요는 LCD 패널, 반도체, 디지털카메라 부문 등에 대규모 투자를 했다. 당시 언론에선 미래를 내다본 혜안이라고 극찬을 했지만, 이 과정에서 산요의 텃밭이었던 가전제품 시장에서의 경쟁력이 악화됐다. 게다가 1990년대 이후 일본 전체를 휩쓴 버블 경기 붕괴와 한국, 중국 등 신흥국 부상으로 LCD 패널, 반도체 사업마저 극심한 적자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불상사도 연이어 일어났다. 산요가 1996년부터 1998년까지 판매한 태양광발전시스템의 경우, 당초 밝힌 사양에 비해 출력이 떨어진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산요측은 끝까지 의혹을 부인했으나, 시민단체의 집요한 조사 끝에 산요는 2000년 일부 규격에 미달하는 부품이 적용된 점을 시인했다. 이로 인해 제품을 공급한 산요의 자회사 사장이 퇴진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산요의 석유 난로 이용자들이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하거나 산요의 세탁건조기에서 화재가 발생하는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2004년 니가타현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산요의 반도체 공장이 피해를 입는 참사가 발생해 산요는 큰 타격을 입었다. 결국 2004년 결산에서 산요는 역대 최악 수준인 1,700억엔에 달하는 적자를 기록했다. 이와 함께 2000년부터 2003년 사이의 회계연도에 대규모 적자를 감춘 사실까지 드러나 더욱 곤경에 처하게 된다.
변하지 않는 산요, 요원한 회생의 길
이러한 위기를 맞고도 산요를 이끌었던 이우에가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다. 2005년 6월 거액 적자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이우에 사토시 회장이 물러나며 유명 언론인인 노나카 토모요(野中 ともよ)를 산요의 신임 CEO겸 회장에 선임하는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안팎으로 이어지는 비판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외부인사 영입이었으나, 같은 시기 이우에 사토시 전 회장의 아들인 이우에 토시마사(井植 敏雅) 당시 부사장이 사장으로 승진하며 이우에가는 산요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했다. 신임 회장 취임 후 산요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갔지만, 결국 회생에 실패했다. 노나카 토모요 회장은 이사회와 마찰을 빚고 2007년 사임을 발표했다.
<산요의 대표 제품 '작티' 캠코더(좌)와 '에네루프' 충전용 건전지>
위기에 처한 산요에게 손을 내민 건 얄궂게도 파나소닉이었다. 2008년 파나소닉은 산요의 인수를 선언했다. 이듬해 산요는 파나소닉의 자회사가 되었다. 60여년 전 집안을 떠난 ‘처남’이 ‘매형’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파나소닉 역시 회사 사정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2차전지 및 태양전지를 비롯한 일부 사업 부문, 그리고 아웃도어용 캠코더인 ‘작티’ 및 충전용 건전지 ‘에네루프’ 등의 일부 산요 브랜드가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해 인수를 진행했다.
하지만 파나소닉의 산요 인수를 즈음해 터진 미국 리먼 브라더스 파산 사태로 전세계 경제가 휘청거렸다. 기대했던 2차전지 산업은 한국 업체들의 맹추격으로 인해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결국 파나소닉은 2011년 산요의 가전부문을 중국 하이얼(Haier)에 매각했으며, 2013년에는 산요 자체를 해체한다고 발표했다. 이로서 한때 일본 가전업계의 한 축이었던 산요는 설립 64년만에 사라지게 됐다.
실력보다 혈연을 강조한 산요의 몰락
집안의 가업을 대대손손 물려받아 사업을 이어가는 가족기업의 장점도 분명 있다. 이를 통해 주인의식이나 사명감을 더욱 고취시킬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잊혀져 가는 전통을 되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 기업 사회에서 실력보다 혈연을 우선한다는 건 합리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기회의 평등 법칙에도 크게 어긋난다. 특히 국가적, 혹은 세계적인 규모의 큰 기업을 실력이 검증되지 않은 경영자가 운영한다면 기업 구성원은 물론, 해당기업의 소비자 및 투자자들이 심각한 손해를 볼 수 있다.
글 / IT동아 김영우(pengo@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