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흥망사] 70년 전통의 자동차 브랜드, '사브'의 비극

김영우 pengo@itdonga.com

[IT동아 김영우 기자] 스웨덴은 철광과 목재를 비롯한 풍부한 자원, 그리고 수력발전에 유리한 지리적 요건을 바탕으로 일찍부터 공업이 발달했다. 특히 19세기 후반을 시작으로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군수 및 자동차 산업 면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스웨덴 기업들이 속속 등장했다. 1937년에 설립된 '사브(Saab, Svenska Aeroplan AB: 스웨덴항공기회사)'도 그 중의 하나였다.

2012년까지 이용하던 사브의
로고
2012년까지 이용하던 사브의 로고

사브는 제2차 세계대전 중 군용기를 생산하며 사세를 키워갔으나 전쟁이 끝난 후에는 사업 다각화를 위해 자동차 산업에도 진출한다. 참고로 사브는 자사에서 생산한 제품 종류를 모델명 앞에 붙는 숫자로 구분했는데, 폭격기는 '1(예: 사브 17)', 공격기는 '2(예: 사브 21)', 전투기는 '3(예: 사브 39)'이 붙는 식이었다. 이러한 전통대로 사브의 승용차에는 '9(예: 사브 9-3)'라는 숫자가 붙게 되었다. 이는 사브의 승용차 부분이 별도의 회사로 분리된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다.

항공기 제조사가 자동차를 만든다고?

사브 최초의 승용차는 1946년에 발표된 콘셉트카인 '우르사브(Ursaab, 모델 91001)'이었다. 이는 당시로선 보기 드물었던 전륜구동(앞 바퀴 굴림) 형식의 차량이었으며, 하체에 커버를 갖춰 눈길 주행에도 강했다. 무엇보다 항공기 제조에서 쌓은 노하우를 살린 유선형의 차체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우르사브의 양산형 제품인 '사브 92'는 1949년에 출시되었으며, 몬테카를로 랠리 대회에도 참가하는 등, 다양한 활약을 펼치며 큰 인기를 끌었다. 사브 92의 기본적인 콘셉트는 이후 사브 93, 사브 94 등의 후속 모델에도 이어지며 사브 승용차의 기반이 된다.

사브에서 처음 발표한 콘셉트카인 '우르사브(Ursaab, 모델
91001)'
사브에서 처음 발표한 콘셉트카인 '우르사브(Ursaab, 모델 91001)'

1967년, 사브는 트럭 및 버스 제조사인 스카니아(Scania)를 합병해 회사 이름을 '사브 스카니아(SAAB-SCANIA AB)'로 변경한다. 사업영역이 넓어지면서 한층 다양한 기술이 적용된 차량을 선보이게 되었는데, 1968년에 첫 출시된 '사브 99'가 대표적이었다. 이 차량은 세련된 디자인과 함께 높은 내구성과 안전성까지 갖추고 있어 시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사브 99의 1977년형 모델부터는 양산형 승용차로서는 세계 최초로 터보 엔진을 탑재하기도 했는데, 고성능을 인정받아 미국 등의 해외 시장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우수한 기술력과 안전성 앞세워 승승장구한 사브

그리고 1978년에는 사브 99의 후속 모델인 '사브 900'이 등장, 사브의 전성기를 열었다. 사브 900은 설계 단계부터 미국 시장에 최적화된 모델이었는데, 전작인 사브 99보다 차체를 키우고 충돌안전성을 강화했으며, 4도어 세단, 5도어 해치백, 3도어 쿠페 등, 다양한 모델을 제공했다. 여기에 개성적인 스타일링에 강렬한 배기음, 고출력 터보 엔진을 무기로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1979년에 첫 출시된 사브 900은 터보 엔진을 탑재해 고성능을 발휘했다(출처=당시
지면광고)
1979년에 첫 출시된 사브 900은 터보 엔진을 탑재해 고성능을 발휘했다(출처=당시 지면광고)

터보 엔진 외에도 사브는 각종 신기술의 개발과 도입에 적극적이었다. 아직 시기상조라는 평이 많았던 DOHC 방식의 엔진을 1983년부터 다양한 모델에 적극 적용하여 고성능의 이미지를 한층 강화했으며, 교통사고가 우려되는 급제동 순간에 안전벨트를 안쪽으로 당겨주는 안전벨트 프리텐셔너 기술을 1985년에 처음 도입하기도 했다. 그리고 1972년에는 열선 시트, 1997년에는 통풍 시트를 도입 하는 등, 성능 및 안전 관련 기술 외에 편의기능 면에서도 많은 투자를 했다.

기술력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한계, 찾아온 위기

하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사브의 성장세도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다. 성능 면에서의 평가는 높았지만 자동차 업계는 차츰 개성적인 디자인을 중시하는 추세로 가고 있었다. 사브 차량들의 디자인은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었고, 토요타나 혼다와 같은 일본 브랜드의 차량에 비해 가격 경쟁력도 떨어지는 편이었다. 결국, 모기업인 사브 그룹은 1989년, 미국 GM의 지분을 받아 승용차 부분을 '사브 오토모빌'이라는 이름의 별도 기업으로 독립시켰다. 그리고 2000년부터 사브 오토모빌은 GM의 완전 자회사로 편입된다.

사브 9-3은 호평을 받으며 컨버터블 모델도
출시된다
사브 9-3은 호평을 받으며 컨버터블 모델도 출시된다

GM의 자회사가 된 이후에도 사브 오토모빌의 사정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사브 900의 후속 모델이자 미국적인 스타일을 도입한 ‘사브 9-3’이 1998년에 출시되어 호평을 얻기도 했지만, GM 그룹의 공용 플랫폼을 적용한 모델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사브 고유의 개성을 점차 잃고 있다는 비판도 강해졌다.

물론 사브 오토모빌의 기술자들 입장에서 이런 비판은 다소 억울한 측면도 있었다. 비록 GM 그룹의 공용 플랫폼을 이용해 차량을 개발하긴 했지만, 사브 오토모빌 자체적으로 상당한 수준의 튜닝을 가해 성능과 안전성 면에서 차별화 하고자 노력했기 때문이다. 다만, GM 경영진 입장에서 볼 때 이는 불필요한 비용과 시간의 지출이기도 했다. 일본 브랜드에 비해 가격 경쟁력은 떨어지면서, 메르세데스 벤츠나 BMW 등에 비해 브랜드 프리미엄이 부족한 건 사브의 엄연한 현실이었다.

이에 더해 2000년대 들어 GM 그룹 전체가 경영위기에 처하면서 사브 9-3과 사브 9-5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브 차량이 단종되었고, 신차 개발을 위한 지원도 사실상 중단된다. 당연히 사브 차량의 시장 점유율은 급락했고, 극심한 적자행진을 이어가게 된다. GM 입장에서 사브 브랜드는 골치덩어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락으로 떨어진 명성, 비참한 공중분해

2009년, GM은 스웨덴의 슈퍼카 제조사인 코닉세그에 사브 오토모빌을 매각한다고 발표했으나, 코닉세그가 매입을 위한 자금을 확보하지 못해 계약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리고 2010년 2월, 네덜란드의 슈퍼카 브랜드인 스파이커가 사브 오토모빌을 인수했다. 사브 9-3과 사브 9-5의 생산도 재개되어 사브 오토모빌은 기사회생 하는 듯 했다.

하지만 이미 실추된 사브의 브랜드 이미지, 그리고 대규모 누적적자를 소규모 브랜드인 스파이커가 감당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2011년 4월, 부품 부족으로 다시 차량 생산이 중단되며 위기를 맞는다. 파산 위기에 처한 사브 오토모빌의 새 주인으로는 중국의 팡다자동차 및 영맨자동차가 거론되기도 했다. 하지만 사브 차량의 핵심 부품을 공급하고 있던 GM측이 기술 유출을 우려해 이를 반대했으며, 결국 2011년 12월 사브 오토모빌은 파산을 신청하게 된다.

NEVS에서 발표한 9-3 기반
전기차(출처=NEVS)
NEVS에서 발표한 9-3 기반 전기차(출처=NEVS)

우여곡절 끝에 2012년 6월에는 홍콩, 일본, 중국 등의 업체들이 합작해 설립한 법인인 NEVS(National Electric Vehicle Sweden)가 사브 오토모빌을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사브 차량에 관한 상당수의 부품 및 기술에 관한 권리는 여전히 GM이 가지고 있었다. 또한 '사브'라는 브랜드로 차량을 판매하기 위해선 GM 및 원래 주인이었던 스웨덴 사브(항공기, 군수품 생산업체)등의 이해관계까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결국, 2016년 6월, NEVS는 '사브'라는 브랜드의 사용을 포기하고 NEVS 브랜드로 9-3 전기차를 생산해 판매한다고 발표했다. 이로서 자동차 브랜드로서의 ‘사브’는 70여년 만에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기술력만' 좋았던 사브의 비극

사브는 한때 북유럽을 대표하는 자동차 브랜드로 명성을 떨쳤고, 고성능과 안전성을 양립한 우수한 차량을 다수 선보여 자동차 마니아들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의 기술에 지나치게 자신감을 가진 나머지, 시장의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했으며, 마케팅 실력의 부족으로 인해 자사 브랜드의 가치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끌어올리는데도 실패했다.

운 또한 좋지 못했다. 사브 오토모빌을 인수한 GM은 사브 브랜드의 매력을 극대화할 만한 경영방침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리고 본사의 사정이 어려워지자 사브 브랜드를 버리듯 처분해 버렸는데, 그 인수자들 역시 적절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업체들이었다. 이러한 복잡한 과정을 거치며 예전 사브의 명성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렸으며, 결국 브랜드 자체가 공중분해를 당하게 된다.

성공적인 기업이 되기 위해서 일정수준 이상의 기술력은 당연히 필요하다. 하지만, 우수한 기술력을 갖췄다고 하여 시장에서의 성공을 담보하는 건 아니다. 자사의 우수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적절한 마케팅 전략과 함께, 시장의 흐름에 민첩하게 대응하는 기민성도 필요하다. 특히 업체 간의 기술력이 상향평준화된 최근의 상황이라면 이를 더욱 명심할 필요가 있다. 사브 자동차의 비극은 현대 기업인들에게 있어 반면교사이기도 하다.

글 / IT동아 김영우(pengo@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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