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 통하는 만화 그리는 예술가 '김정기 작가'
[IT동아 김태우 기자] 최근 방영되고 있는 SK이노베이션의 광고를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하얀 전지위에 아무런 밑그림 없이 펜 하나로 그림을 그리는 이 광고를 보고 있노라면 어떻게 저렇게 그려내는지 무척 신기해 보인다. 광고 속에서 그림을 그리는 이가 바로 '김정기' 작가다.
김정기 작가는 '라이브 드로잉' 이라는 독특한 분야를 만들어 낸 장본인이다. 4미터, 6미터, 9미터 등 커다란 종이 위에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실시간으로 그림을 그려내고, 이를 영상으로 제작해 온라인에 올린다. 작업에 따라 다르지만, SK이노베이션 광고의 그림 작업은 무려 20시간이나 걸렸다.
어떻게 이런 작업을 할 수 있는 것일까? 마냥 신기해 보였던 김정기 작가를 직접 만나러 합정동에 있는 그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김정기 작가의 첫인상은 그야 말로 동네 아저씨 마냥 푸근했다. 편안한 복장으로 작업을 하던 김정기 작가는 만화가라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라고 상상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처음의 어색함은 금방 사라졌으며, 1시간 30분 동안 유쾌하게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라이브 드로잉은 하나의 종이 안에 다양한 모습을 담아내는 작업이다. 그런 만큼 표현의 영역이 무엇보다 넓어야 한다. 다양한 사람, 동물, 배경을 모두 그릴 수 있어야 하는 것. 보통 작가들은 그릴 수 있는 영역이 한정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김정기 작가처럼 라이브 드로잉을 할 수 있는 이는 거의 없다. 김정기 작가는 "그때 그때 관심이 많았던 걸 계속 그리다 보니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넓어진 것 같다"며 "사물, 공간에 대한 관찰을 많이 했으며, 자료 수집 많이 하고, 오래 기억하고 표현하는 나만의 방식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사실 김정기 작가를 만나기 전만 하더라도 라이브 드로잉이 무엇인지 몰랐다. 하지만 유튜브에 올려진 영상을 보면서 라이브 드로잉은 단순히 만화가 아닌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과정 자체가 행위 예술처럼 보였다. 김정기 작가는 자신이 활동하는 영역에 대해 "만화 + 현대 미술 + 엔터테인먼트 + 게임 + 책 삽화 등 그림으로 하는 일은 다 걸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국내선 무척 특이한 부류의 작가라고 할 수 있다.
활동은 국내보다 국외에서 더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작년에는 국내에서 지낸 시간이 6개월이 채 되지 않는다. 올해는 해외 일정을 많이 줄였음에도 매달 한번 이상은 해외에 나가야 한단다. 비중을 보자면 해외 : 국내가 80 : 20 정도.
김정기 작가는 해외에서 인지도가 상당하다. 오히려 국내에 너무 덜 알려져 있다. 세계 2대 경매 중의 하나인 크리스티 경매에서 김정기 작가의 작품이 2년 연속으로 판매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코믹콘에서 10만 원이 넘는 화보집만 200개 이상 팔리며, 해외서 싸인회를 하면 50유로에 판매를 함에도 줄을 서서 받아간다.
해외 할동이 많은 이유는 국내에 없는 시장에서 활동하기 때문이다. 김정기 작가는 작품은 원화라고 할 수 있는데, 국내는 원화 시장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 이에 비해 해외는 원화를 사고 파는 것이 보편적인 일이다. 김정기 작가는 1년 한번 화보집을 발행하는데, 2016년 한정판의 가격은 100만 원이었다. 50권이 배정된 미국의 경우 3시간만에 모두 팔렸지만, 10권 배정된 한국은 겨우 5권만 팔렸다.
그러다 보니 김정기 작가는 디지털 작업을 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만화가 개척하지 않은 시장인 원화는 작품을 남겨야 팔수 있다"고 김정기 작가는 말한다. 디지털 작업을 하지 않는다기 보다는 할 수 없는 셈이다.
하지만 디지털과는 꽤 친숙하다. 이미 라이브 드로잉은 동영상을 제작해 유튜브로 배포하고 있으며, 페이스북에서 생방송으로 라이브 드로잉을 중계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김정기 작가 이름을 붙인 스마트펜도 출시된 바 있다. '네오스마트펜N2 X 김정기 작가'가 바로 그 제품이다.
김정기 작가는 네오스마트펜 첫 제품때부터 네오랩과 인연을 맺은 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현재 팔리고 있는 2세대 제품에 대한 김정기 작가는 어떻게 평가하는 지 물어보니 "첫 제품보다 손 느낌을 많이 살렸다"며 "예전에는 실시간을 못 따라가는 경우도 있었는데 개선됐다"고 설명했다.
김정기 작가 개인적으로 많이 쓰는 기능은 리플레이. "그리는 과정이 녹화되기 때문에 화면을 복기할 수 있다"며 "어떻게 그려지는지를 설명할 때 좋다"고 밝혔다. 네오스마트펜은 그냥 종이에 그리면 디지털로 옮겨주는 제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디스플레이 위에 그리는 다른 스타일러스보다 이질감이 없어 좋단다. 하지만 "너무 얇은 선은 아직 제대로 표현하지 못 한다"며 "좀 더 민감해졌으면 좋겠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국내 만화 작가들은 대부분 웹툰에 종사하고 있다. 과거보다 작가들의 처우가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국내는 콘텐츠에 돈을 지불하는 것에 인색하다 보다 생계가 취약하다. 현 웹툰 시장에 대해 "마감 시간에 쫓기고, 디지털로 쉽게 만들다 보니 과거보다 하향 평준화된 거 같다"며 "괜찮은 작품은 많지만, 진정 멋진 작품을 만나는 것은 힘들어졌다"고 말했다.
또 국내 웹툰이 잘 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빠른 인터넷 속도라며 "만화 콘텐츠가 풍부한 미국이나 일본이 기존에 만들어진 것을 스마트폰에서 볼 수 있도록 마음먹는 순간 웹툰 주도권은 넘어갈 것이다"고 덧붙였다.
김정기 작가는 "일주일 1~2번 연재하는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며 "외국은 콘텐츠에 비용을 지불하려는 마인드가 있고 산업이 크다보니 퀄리티를 많이 따지는데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설명했다.
좋은 만화란 무엇일까? 이에 대해 김정기 작가는 "그림만 봐도 이해되는 만화"라고 설명한다. "그림 실력이 부족한 작가들은 말로 채운다"며 "표정만 봐도 상황이 이해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해외 활동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김정기 작가의 다음 목표는 '라이브 만화'다. 라이브 드로잉에 스토리를 입히겠다는 뜻이다. 완성된 만화만 보는 것이 아닌 만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영상을 함께 제공하는 방식이다. 기존에는 없던 만화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떤 작품이 만들어 질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글 / IT동아 김태우(TK@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