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임의 세계] 덧셈 속에 숨겨진 함정, '로보77'
로보77 (1993) <출처: divedice.com>
보드게임 카페 열풍이 일던 2000년대 초반, 가장 인기 있는 보드게임은 무엇이었을까? 흔히 잘 알고 있는 할리갈리, 젠가는 물론, 이에 못지않은 인기를 구가한 게임이 있다. 바로 '로보77'이다. 운에 따라 웃고 우는 이 게임은 보드게임 입문자에게 보드게임 세상의 재미를 엿보게 하기 가장 좋은 작품으로 알려졌다.
게임 방법
로보77은 숫자 카드 게임이다. 각 플레이어들은 돌아가면서 숫자 카드를 내고, 카드에 적힌 숫자를 더한다. 자신의 차례에 숫자의 합이 11의 배수가 되거나 77 이상이 되면 패배한다. 라운드를 반복해서 다른 모든 플레이어를 탈락시키고, 최후의 1인으로 살아남으면 승리한다.
플레이어들은 매 라운드마다 다른 플레이어들을 탈락시키기 위해 어떤 카드를 낼지 고심하게 된다. 누군가 11의 배수나 숫자 77에 도달하는 카드를 내면 생명칩을 잃는다. 따라서 손에 있는 카드를 적절하게 활용해야 한다.
로보77의 구성물 <출처: divedice.com>
게임 시작 전, 각 플레이어들은 생명칩 3개와 카드 5장을 나누어 받는다. 남은 카드는 뒷면이 보이도록 쌓아 더미로 만든다.
이제 시작 플레이어부터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며 게임을 진행한다. 시작 플레이어는 손에 있는 카드 중 1장을 내려놓고, 그 카드의 숫자를 크게 외쳐 다른 플레이어에게 알려준다. 그리고 더미에서 카드를 1장 가져간다. 다음 플레이어부터는 자기 차례에 카드를 1장을 내려놓고, 이전 플레이어가 외친 숫자에 자신이 내려놓은 카드의 숫자를 더한 수를 외친다.
카드를 낼 때는 더미의 합을 크게 부르자 <출처: divedice.com>
이렇게 외친 숫자가 11의 배수 또는 77 이상의 숫자라면, 플레이어는 생명칩을 하나 잃게 된다. 생명칩을 잃지 않으려면 자기 차례에 어떤 카드를 낼지 신중해야 한다.
카드는 2부터 10까지의 평범한 숫자 카드들도 있지만, 11부터 66 등 11의 배수가 되는 숫자들도 있고, 0, 76과 같은 기상천외한 숫자 카드도 있다. 0 카드를 사용하면 다음 사람에게 순서를 넘길 수 있어 위험을 회피하기 좋다. 시작 플레이어가 76 카드를 내면 초반부터 게임의 판도를 난장판으로 만들 수 있다.
특수 카드도 3종(-10, X2, 방향 바꾸기) 있다. -10은 총합에서 숫자 10을 빼는 카드로, 높아져 가는 숫자를 잠깐 낮출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X2는 다음 사람이 2장의 카드를 내도록 하는 카드로, 한 번에 부담을 늘리는 특수 카드다. 방향 바꾸기는 시계 방향이나 반시계 방향으로 진행되던 게임을 반대로 돌리는 역할을 한다. 이를 이용하면 방금 전 자신을 괴롭힌 상대에게 복수를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수 카드와 11의 배수가 되면 안 된다는 규칙이 결합하면 예상치 못한 재미를 유발한다. 예를 들어 76인 상태에서 -10 카드를 내고 66이 되어 칩을 잃는 경우가 있다. 76이라는 위기 상황에서 벗어날 생각만 하며 카드를 낸다면, 66을 외친 뒤 '아차'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특수 카드를 잘 활용해야 한다. <출처: divedice.com>
자기 차례를 마칠 때에는 더미에서 카드를 1장 가져가야 한다. 만약 카드를 가져가는 것을 잊었다면, 이후에는 카드가 더 적은 상태로 라운드를 진행해야 한다. 숫자를 더하고 외치는데 집중하다 보면 카드 가져오기에 소홀해질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누군가가 77 이상의 숫자를 외치면 생명칩을 제거하고 라운드를 종료한다. 그리고 모든 카드를 다시 섞어 다음 라운드를 준비한다. 만약 플레이어가 3개의 칩을 모두 잃어버린 상태에서 또 한번 칩을 잃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되면, 그 플레이어는 게임에서 탈락한다. 이렇게 모든 플레이어를 탈락시키고 최후까지 살아남은 플레이어가 게임에서 승리한다.
98, 99 혹은 100
로보77처럼 목표 숫자를 정하고 이를 피하는 형식의 더하기 게임은 오래 전부터 존재했다. 다만, 그 기원이 확실치는 않다. 카드 게임들을 잘 정리한 사이트 중 하나인 Pagat.com에서는 로보77과 유사한 형태의 98, 99, 100등의 게임이 1993년부터 존재했다고 보고 있다.
Pagat.com에서 발매한 카드 게임들과 관련된 책들 <출처: amazon.com>
98 (Ninety-eight)
카드게임 '98'은 1993년 제이 피스터(Jay Feaster)와 친구들이 애리조나 주립 대학에서 제작한 게임으로 알려져 있다. '98'은 플레잉 카드(트럼프 카드)로 즐기는 술자리 게임이었다. 누군가 98이 넘는 숫자를 외치면 게임에서 지고, 벌칙으로 술을 마셔야 했다.
이 게임은 그들의 고교 동창과 고향 친구들을 통해 다른 학교로 널리 퍼져 나갔고, '99'나 '100'과 같은 수많은 변형게임을 낳았다. 태국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99'라는 이름의 게임이 있었다고 하니, 오래 전부터 전세계적으로 퍼진 게임이 아닌가 한다.
1970년대 서울에서 유년기를 보낸 사람들은 나인티나인이라는 이름의 동일한 게임을 즐겼다고 증언하기도 해, 그 기원은 더 오래됐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인지 Pagat.com에서는 이 게임에 대한 자료 및 제보를 여전히 수집하고 있다.
98은 52장의 플레잉 카드 중에서 A에서 9까지는 숫자 카드로 사용하고, 10은 -10으로, 잭(Jack) 카드나 퀸(Queen) 카드는 0으로 사용했다. 특이한 것은 킹(King) 카드였는데, 킹은 플레이하면 현재 숫자를 무조건 98로 만드는 카드였다. 로보77에서는 숫자가 2라도 나와 있을 경우 76 카드를 내면 생명칩을 잃게 되는데, 이와 달리 98의 킹 카드는 숫자를 98로 맞춘다.
98의 확장 규칙 중에는 로보77에 영감을 주었을 법한 규칙이 꽤 있다. 변형 규칙에서 숫자 9 카드는 게임 방향을 바꾸는 역할을 했고, 잭은 -10 카드처럼 사용됐다. 퀸이나 4는 숫자 0처럼 사용할 수 있었다.
로보77에서 볼 수 없는 확장 규칙도 있다. 1에서 11까지 숫자를 골라 지정할 수 있는 에이스 카드가 있는가 하면, 더미를 98로 만들고 다음 플레이어에게 카드를 2장 내도록 하는 강력한 조커(joker) 카드도 있었다.
특히 재미있는 아이디어는 같은 숫자의 카드가 여러 장이 있다면, 한 번에 낼 수 있는 확장 규칙이다. 예를 들어 9를 3장 들고 있다면, 카드 3장을 한꺼번에 내어 그 합계인 27만큼 숫자를 크게 끌어올릴 수 있다. 이러한 변형 규칙을 로보77에 도입해보면 재미있을 듯하다.
99 (Ninety-nine)
카드게임 99는 5개의 동전을 사용한다. 98 게임에서 98 이상의 숫자를 외치게 되면 게임에서 즉시 탈락하는 것과 달리, 99 게임은 플레이어들에게 여러 번의 생존 기회가 주어졌다. 이 때문인지 카드 더미가 모두 소모되면 다시 섞어서 진행한다는 규칙이 추가됐다. 자기 차례가 끝났을 때 카드를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리면 다시 가져올 수 없다는 규칙도 생겨, 로보77을 연상케 한다.
생명을 표시할 동전이 없으면 지폐를 사용하는 방법도 있다. 각자 지폐를 꺼내 99를 넘을 때마다 한 귀퉁이를 접어 표시하고, 모든 귀퉁이가 접히면 게임에서 탈락했다. 돈이 걸린 게임이라면 최후에 남은 플레이어가 귀퉁이가 접힌 모든 지폐를 가져가기도 했다.
생명칩 개념이 게임 규칙에 도입됨에 따라, 99에 재미있는 확장 규칙도 생겼다. 99의 확장 규칙에서는 33과 34사이, 66과 67사이, 99와 100 사이의 경계를 지나면 생명칩을 잃는다. 이 때문에 한 라운드에 평균 3개의 생명칩을 잃게 되지만, 숫자를 낮춰 경계를 지나가는 방식으로 생명을 더 잃을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69에서 -10 카드를 쓰면 경계를 지나기 때문에 생명칩을 하나 잃고, 59에서 다시 66을 넘으면 생명칩을 잃는 식이다. 로보77에서 11의 배수를 이용해 생명칩을 잃게 한 규칙과 유사한 느낌이다.
또, 플레이어가 숫자 69를 외치면 추가 생명칩을 받거나 숫자가 0으로 돌아가는 등, 특별한 변형 규칙이 적용되기도 했다. 술자리 게임을 하고 있다면 69를 만든 플레이어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벌칙으로 술을 마시기도 한다.
플레이어가 탈락하는 형식의 게임은 긴장감을 유발해 흥미진진하지만, 탈락한 사람들은 이후 구경꾼으로 전락한다는 단점이 있다. 이 부분을 보완하는 변형 규칙도 등장했다. 플레이어들은 매 라운드마다 3개의 생명칩을 받아 게임을 진행하는데, 이전 라운드에서 생명칩을 잃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생명칩을 계속 누적한다. 이렇게 15개의 생명칩을 먼저 얻는 플레이어가 승리하는 규칙을 적용하면, 탈락한 플레이어들도 끝까지 게임에 참여할 수 있다.
100 (One hundred)
또 다른 게임 '100'은 앞서 말한 98, 99와 같은 게임들과 거의 유사하다. 다만 특수 카드가 조금 다른데, 퀸은 내려놓는 카드 더미의 숫자를 0으로 만들고 빨간색 5 카드는 -5로 사용되는 정도다. 스페이드 2 카드는 내려놓는 카드 더미의 숫자를 2배로 만드는 기능을 한다. 가끔 어떤 이들은 로보77의 X2 카드를 곱하기 2로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규칙과 유사한 느낌이다.
하우스 룰
앞서 소개한 98, 99, 100과 같은 게임은 플레잉 카드를 바탕으로 한 게임 규칙이다. 로보77의 작가 토마스 파울리(Thomas Pauli)에 대해 알려진 것은 전혀 없지만, 그의 다른 작품들은 널리 알려진 게임 규칙들을 정돈하거나 변형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로보77 또한 동시대에 널리 유행하던 게임 규칙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로보77 작가의 다른 게임, 솔로(Solo, 1993). 이 게임은 우노(Uno, 1960)의 변형 게임이다. 같은 색의 같은 숫자 카드라면 차례를 무시하고 카드를 낼 수 있다거나, 손에 있는 카드를 모든 플레이어가 왼쪽으로 넘기는 등 더욱 다이나믹한 규칙이 들어있다. <출처: divedice.com>
어떤 게임을 자신만의 형태로 변형해 즐기는 것은 흔한 일이다. 이렇게 게임의 규칙을 변형해 특정 그룹에서만 사용되는 게임 규칙을 하우스 룰(house Rule)이라고 한다. 마치 '뒤집어라 엎어라'처럼, 어렸을 적 즐긴 게임들이 동네마다 규칙이 달라 친구들 사이에서 조정했던 기억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이런 하우스 룰 중 일부는 잘 정제되어 출판되는데, 대표적으로 모노폴리가 있다. 미국 애틀란타에서 집집마다 유행하던 게임 규칙을 정리해 출판된 '모노폴리'를 떠올리면, 보드게임의 발전에서 하우스 룰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스트로우(Straw, 2006)는 비교적 최근 출시된 더하기 게임(adding Game)이다. 로보77처럼 숫자를 더하되, 라운드가 끝났을 때 살아남은 플레이어들이 손에 든 카드가 곧 플레이어들의 점수가 된다는 점이 특이하다. 특히, 혼자서 점수를 획득할 수 있는 갈대(Straw) 카드가 있어 흥미롭다. 이처럼 흥미 있는 변형 규칙은 그 독창성을 인정받아 쉽게 출판되곤 한다. <출처: boardgamegeek.com>
로보77이 국내에서 소개된 지 어느덧 10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다. 이 게임을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시간이 지난 셈이다. 하지만 보드게임을 취미로 즐기는 인구 자체가 적었을뿐더러, 하우스 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그리고 로보77과 같은 간단한 게임에 대한 무관심 등이 겹쳐 로보77의 하우스 룰이 많이 개발되지는 않았다.
_조용히 카드를 내보자. 암산이 틀려 생명칩을 잃으면, 정말 즐겁다. <출처: divedice.com> _
하지만, 국내 게이머들이 자신 있게 추천하는 하우스 룰이 하나 있다. 바로 침묵으로 진행하는 로보77이다. 암산으로 숫자를 더해가며 긴장하는 맛이 꿀맛 같다고 한다. 말을 하지 않고 게임을 진행하면 계산이 틀릴 확률이 높아,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지기 쉽다. 혹시 책장 속에 로보77이 잠들어있다면, 오늘 한번 꺼내서 해보면 어떨까. 이렇게 나만의 규칙을 만들다 보면, 새로운 게임 아이디어가 떠오를 수도 있다.
글 / IT동아 보드게임 필자 권성현
편집 / IT동아 안수영(syahn@itdonga.com)
※본 기사는 네이버캐스트 게임의 세계: 보드게임의 세계(http://navercast.naver.com/list.nhn?cid=2883&category_id=2883)에 함께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