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임 제작도 하나의 놀이 문화입니다" - 김건희 보드게임 작가
[IT동아 안수영 기자] '보드게임'이라 하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르는가. 아무래도 어린 시절 즐기던 '부루마블', 공든 탑이 쓰러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막대기를 빼내는 '젠가'를 떠올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같은 모양의 과일이 5개 나오면 종을 치는 '할리갈리'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조금 더 잘 아는 사람이라면 '카탄의 개척자'나 '카르카손' 등의 게임을 해 봤을 것이다. 물론, 이런 유명한 게임 외에도 보드게임의 세상은 무궁무진하다.
그렇다면 이런 재미있는 보드게임은 누가 만드는 것일까. 바로 보드게임 작가다(보드게임 제작은 서적 출판과 유사한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보드게임을 만드는 사람은 보드게임 작가라 한다). 과연 보드게임 작가들은 어떻게 게임을 만들고 있을까. 이에 IT동아는 김건희 보드게임 작가를 만나, 보드게임 제작 및 보드게임 문화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국내 보드게임 개발의 물꼬를 트다
"오프라인 게임 개발자 김건희(Gary Kim)입니다. 주로 보드게임을 만들고 있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하는 게임(빅 게임) 및 교육용 게임도 제작하고 있습니다"
김건희 작가는 국내에서 가장 각광받는 보드게임 개발 전문가다. '피겨그랑프리(2010)', '고려(2013)', '조선(2014)', '세븐킹덤(2014)', '토끼와거북이(2014)', '아브라카왓(2014)' 등 다양한 보드게임을 선보였다.
2014 독일 에센 박람회 현장. 왼쪽에서 두 번째가 김건희 작가.
미국이나 독일 등 선진국은 보드게임을 즐기는 문화가 일상이지만, 국내의 경우 보드게임 문화가 점차 확산되는 단계에 놓여 있다. 보드게임 개발 역시 미국과 유럽이 강세를 보이고 있고, 국내에서 보드게임 작가를 찾기란 쉽지 않다. 2002년부터 보드게임을 만들기 시작한 김건희 작가는 불모지와 같던 국내 보드게임 개발의 물꼬를 튼 셈이다.
"제가 2002년 제대를 했는데요, 그 때는 마침 국내에서 보드게임 카페가 차차 생기던 시기였어요. 그 때 ‘카탄의 개척자’라는 보드게임을 해 봤는데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어린 시절 매일 보드게임을 했던 생각도 났고요. 그래서 저도 보드게임을 만들어보자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당시 보드게임을 만들 수 있는 길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런 자료도, 정보, 사람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시행착오도 많았다.
"보드게임을 만드는 데 필요한 정보도, 도움을 받을 사람도 찾기가 어려웠어요. 그래서 2003년 '한국보드게임개발자모임(Korea Boardgame Designers Association, 이하 KBDA)'을 만들었어요. 보드게임을 만들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서 좋은 의견을 공유하고, 테스트도 같이 하자고 한 거죠.
그때부터 쭉 보드게임을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게임이 나온 건 한참 뒤였어요. 몇 년 정도는 게임을 만들어보기만 하고, 출시하지는 못했던 거죠. 2010년 '피겨그랑프리'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수상하고, 처음으로 게임을 정식 출시했습니다.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게임을 내게 됐습니다"
이후 그는 2014년 독일 에센 박람회에서 '아브라카왓'으로 업계에서 많은 관심을 받았다. 2014년과 2015년에는 각각 '고려'와 '토끼와거북이'로 프랑스 칸느 게임어워드에 노미네이트되는 쾌거를 올렸다.
"현재도 계속해서 게임을 만들고 있습니다. 제작한 게임을 모두 출시하는 건 아니고, 일부만 출시합니다. 퍼블리셔 측에 게임을 보여주고 반응이 좋으면 출시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폐기하거나, 보완하고 개선해서 다른 게임으로 만들고 있어요"
보드게임 산업이 성장하려면? "작가가 늘어야 합니다"
김 작가는 국내 보드게임 시장 초창기부터 보드게임 개발에 도전했다. 그런 만큼 게임 개발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자신이 어려운 길을 걸어 게임을 만든 만큼, 보드게임을 개발하고 싶은 이들을 돕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하나의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다. 보드게임을 만들고자 하는 이들이 모여 서로 의견을 나누고 공유하고, 자신의 게임을 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보드게임을 만들고 싶어도 게임을 내지 못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우선, 비용 문제입니다. 자비 출판을 하면 작가가 될 수는 있지만, 보드게임을 직접 만들어서 출판하려면 최소 1,000만 원의 비용이 듭니다. 이 외에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제작을 모르고, 보드게임에 들어갈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디자이너를 알 길이 없는 경우가 많아요.
이런 분들을 돕고 싶어요. 제가 운영하는 한국보드게임개발자모임(KBDA)이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디자이너 14명이 모여 하나의 게임을 만드는 것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다 함께 코어 세트(게임 본판. 이를 기본으로 나머지 확장 게임을 붙일 수 있다)를 만들고, 각자 자신의 이름으로 확장 팩을 만듭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공유합니다. 예를 들면 게임 구조도 공유하고, 수익도 공유하고, 디자이너 분들도 수익을 나누고. 이렇게 모두가 함께 게임을 만들고 상생할 수 있는 생태계를 구상한다면 좋지 않을까요"
김 작가가 누구나 보드게임을 만들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이유는 또 있다. 그는 한국 시장에서 보드게임 산업이 성장하려면 작가가 늘어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영화 산업이 발전한 이유 중 하나가 영화 학교와 영화 학원들이 많아졌고, 이를 통해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보드게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보드게임을 만드는 분들이 늘어나면 보드게임에 대한 관심도 자연스레 커질 것입니다. '보드게임을 만드는 사람들도 있구나', '이것도 하나의 직업이 될 수 있구나'라는 인식이 퍼진다면, 보드게임 산업도 더욱 성장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현재 국내 보드게임 작가들은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 적은 것이 현실이다. 김 작가가 운영하는 KBDA 모임의 회원 수는 1,700여 명이지만, 그 중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게임을 낸 사람은 10명이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보드게임 작가가 늘어나려면, 먼저 보드게임 제작의 장벽이 없어져야 합니다. 요즘에는 소셜 펀딩(Social Funding)을 통해 보드게임을 제작하는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보드게임 제작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후원을 받는 거죠. 이러한 소셜 펀딩이 상당히 좋은 등용문이 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를 통해 작가가 되신 분들도 많은데요, 앞으로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예상됩니다"
게임 제작도 놀이이자 문화, "직접 도전해 보세요"
김 작가는 보드게임 제작을 꿈꾸지만 아직 도전하지 못한 이들을 위한 조언도 남겼다.
"보드게임을 만들 때는 테스트가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아이디어를 통해 게임을 구상했다면 게임을 많이 만들어 보고, 또 게임을 많이 해 보세요. 테스트를 통해 다양한 의견을 듣고, 게임을 수정하고 보완하면 게임의 재미와 질이 높아집니다. 테스트는 가급적 다양한 그룹에서 많이 할수록 좋은데요, 물론 이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기존에 있는 게임도 잘 안 하는데, '내가 지금 만드는 이 게임을 테스트해줘'라고 하면 잘 안 해줄 테니까요. 주변 분들에게 부탁할 수도 있지만, 여건이 안 된다면 KBDA 모임에 오시면 됩니다"
그는 현재 한 달에 한 번씩 정모를 열고, 사람들과 함께 게임을 테스트하고 의견을 제공하고 있다. 실제로 김 작가 역시 게임을 개발할 때 끊임없이 테스트하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이를 통해 게임을 보완해 나가는 작업을 반복한다고 한다.
한편, 김 작가는 보드게임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보드게임 제작에 도전해볼 것을 권했다. 그 이유는 보드게임을 즐기는 것뿐만 아니라, 보드게임을 개발하는 것도 하나의 문화이자 놀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저는 보드게임을 잘 모르는 분들도 한 번 만들어 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보드게임 제작은 본업으로 하기엔 수익이 좋지 않아 힘들지만, 부업으로 하기에는 상당히 좋다고 생각해요. 아이디어만 있다면 종이를 잘라서 만들어보고 테스트하고, 좋은 아이디어라면 퍼블리셔나 공모전, 소셜 펀딩을 통해 출판에 도전할 수 있을 테니까요.
보드게임 제작은 특히, 자녀를 둔 부모님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봅니다. 자녀들과 함께 게임 테스트를 하는 과정에서 교육적으로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게임을 만들어 보라고 하는 것도 좋습니다. 창의력 발달도 되고, 게임 규칙을 만드는 과정에서 논리력을 키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즐거워할 것입니다"
혹시 보드게임을 만드는 것이 어렵지는 않을까. 그는 "의외로 보드게임을 안 해본 분들이 정말 창의적인 게임을 만드는 경우도 많다"라고 설명했다.
"제가 10년 넘게 보드게임을 만들면서 느낀 건데요, '젠가'나 '할리갈리'처럼 단순한 게임을 만들기가 더 어렵더라고요.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런 게임들은 작은 아이디어로 출발합니다. 그래서 어려운 것 같지만, 의외로 쉽기도 합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도전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혹시 '대박'이 날지도 모르는 일이잖아요(웃음)"
"보드게임이 집집마다 있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 되길 바랍니다"
그 동안 국내에서 보드게임은 마니아들의 전유물로 인식됐지만, 최근에는 건전한 놀이 문화이자 교육적 효과를 인정받아 점차 확산되고 있다. 보드게임 전문기업 코리아보드게임즈에 따르면, 미국이나 유럽은 매년 2~3% 정도의 성장률을 보이지만 국내 보드게임 시장의 성장률은 20% 정도로 10배 가량 크다.
"국내에서 보드게임은 여전히 취미 시장이긴 하지만, 게임에 따라 다른 것 같아요, 국내의 경우, 초심자들이 할 만한 입문 게임은 널리 퍼졌습니다. 전세계에서 '할리갈리' 판매량이 가장 많은 나라도 한국입니다.
향후 국내 보드게임 시장 전망은 밝다고 생각해요. 보드게임은 선진국의 문화입니다. 돈이 있고 시간이 있어야 보드게임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도 미국과 유럽 시장이 가장 크고, 한국도 점점 선진국으로 가고 있죠. 현재 부모님들이 자녀와 함께 즐길거리로 보드게임을 찾고 있고, 젊은 세대와 실버 세대들은 여가 생활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이런 추세에 따라 보드게임 시장이 앞으로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김 작가는 "보드게임은 나쁜 점이 없다"고 말했다. 우선, 남녀노소 누구나 웃으면서 즐길 수 있다. 미국이나 독일에서는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3대가 함께 보드게임을 즐긴다. 여러 사람들과 둘러앉아 얼굴을 보고 하는 만큼 사회성 발달에도 좋다.
"미국은 취미 보드게임 시장이 굉장히 큽니다. 어려운 카드게임이 많이 발달했고, 테마성 게임도 다양합니다. 일본의 경우 만화책이나 애니메이션 등과 합작한 TCG(Trading card game)가 많이 나옵니다. 나중에는 한국도 그렇게 될 것 같아요.
물론, 세계 보드게임 시장은 아직도 선진국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캐주얼 게임이 주로 인기를 끄는 만큼, 국내 작가들이 쉽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게임들을 많이 선보인다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국내 보드게임 문화가 한층 더 풍부해지지 않을까요. 저 역시 여기에 일조해야겠지요(웃음). 보드게임이 집집마다 있는 게 당연한 세상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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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IT동아 안수영(syahn@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