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임의 세계] 신나는 종치기 게임, '할리갈리'
간단한 게임의 대명사, 할리갈리. <출처: divedice.com>
'시드마이어의 문명'과 같은 전략 게임을 즐기는 사람이 1명 있다면, 그 사람의 주변에는 '애니팡'과 같은 캐주얼 게임을 즐기는 사람이 1,000명 가량 있기 마련이다. 보드게임도 마찬가지다. '아그리콜라(2007)'와 같은 심오한 전략 게임을 즐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주변에는 간단한 게임을 즐기는 1,000명 이상의 사람이 있다.
2002년 보드게임 카페가 생긴 이래 '카탄의 개척자(1995)'를 필두로 다수의 해외 전략 게임이 국내에 소개됐지만, 가장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많이 판매된 보드게임은 간단한 게임이다. 그 중 가장 잘 나가는 게임은 무엇일까? 바로 '할리갈리(1990)'다.
게임 방식
할리갈리는 지난 10여 년간 국내에서 독보적인 캐주얼 게임으로 자리잡은 보드게임이다. '과일 다섯 개가 보이면 종을 쳐라'라는 한 마디로 압축되는 간단한 규칙, 속도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극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환경, 재미를 극대화하는 소도구 '종'의 사용 등 간단하지만 흥미로운 게임 요소가 많은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할리갈리의 과일은 딸기, 바나나, 라임, 자두 4종이며, 카드에는 각각의 과일이 1개에서 5개까지 그려져 있다. 먼저, 카드를 잘 섞은 뒤 모두 똑같이 카드를 나눠 갖는다. 카드 더미는 그림이 보이지 않도록 뒤집은 채 각자 앞에 둔다. 각 플레이어들은 서로 돌아가면서 카드 더미에서 맨 위에 있는 카드를 1장 펼친다. 카드를 펼칠 때는 상대방이 먼저 볼 수 있도록 바깥쪽으로 펼쳐야 한다.
과일이 5개가 되면 종을 친다. <출처: divedice.com>
어떤 한 종류의 과일이 5개가 되면 재빨리 종을 쳐야 한다. 종을 가장 빨리 친 사람은 현재까지 테이블에 쌓인 카드들을 가져가 자신의 카드 더미 밑에 넣는다. 실수로 종을 잘못 친 경우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카드를 1장씩 나눠줘야 한다.
이렇게 해서 카드를 모두 잃은 사람은 게임에서 탈락하고, 최후까지 남은 사람이 게임에서 승리한다.
보드게임 카페와 할리갈리
2002년, 국내에서 보드게임 카페가 생기면서, 국내 시장에 해외 보드게임이 널리 알려지게 됐다. '카탄의 개척자(1995)', '카르카손(2000)', '클루(1949)', '보난자(1997)' 등의 작품이 보드카페 손님들의 입소문을 타고 '신기하고 재미있는 놀이'로 알려졌고, 보드게임 카페는 유망한 창업 아이템으로 인식됐다.
보드게임 카페 시대를 연 주역은 '카탄의 개척자'와 '카르카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국내 보드게임 카페의 대표 게임은 설명이 용이하고 손님 회전이 잘 되며, 규칙이 간단한 '할리갈리'와 같은 게임으로 바뀌어 갔다. 초창기 보드게임 카페는 해외 게임을 많이 알아야 열 수 있는 창업 아이템으로 인식됐지만, 시간이 흐르며 창업의 문턱은 점점 낮아졌다. 그리고 2003년에는 어지간한 동네에 보드게임 카페가 하나씩 있는 수준으로 늘어났다. 당시 보드게임 카페는 새로 유입되는 고객들에게 '할리갈리'와 같은 쉬운 게임 한두 가지를 선보이는 역할로 자리잡으며, 보드게임 산업에서 점점 영향력이 줄어들게 된다.
초창기 유통된 할리갈리 페이퍼이야기판. 영문 제목 아래 한글 제목을 쓰는 방식으로 제작됐다. 최근에는 제목도 모두 한글로 다시 디자인되어 출시되고 있다. <출처: 게임동아>
소비자가 게임에 대한 정보를 얻고 게임을 구입하기 쉬운 환경이 되면서, 보드게임 카페는 소비자에게 돈을 쓸 이유를 제시하지 못했고 점차 쇠퇴했다. 2004년 가을을 기점으로 보드게임 카페 다수가 문을 닫았고, 보드게임 유행은 싸늘하게 식었다. 할리갈리는 보드게임 카페가 그 명맥을 유지하는 데 공헌하고 있었다.
할리갈리 한국어판의 수난사
할리갈리 한글판의 변천사. 페이퍼이야기에서 코리아보드게임즈로 유통사가 바뀐 초판(왼쪽). 최근 여러 번 눌러도 튼튼한 종으로 변경되었다. (중간, 오른쪽순) <출처: koreboardgames.com>
2002년 국내 최초의 보드게임 카페로 시작한 회사 '페이퍼이야기'는 2004년 해외 보드게임의 한국어판 정식 발매를 시작했다. 시작은 '할리갈리', '카르카손', '보난자'였다. 기업 입장에서는 많이 팔리는 제품을 정식 발매하는 것이 일반적이기에, 간단한 게임들을 위주로 한국어판을 낸 것. 하지만, 보드게임을 취미로 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국내 보드게이머들은 번역이 꼭 필요할 만큼 복잡하고 전략적인 게임들이 한국어판으로 출시되길 바랐다.
대만판 할리갈리. 제목은 무려 '독일(덕국) 심장병'이다. <출처: Boardgamegeek.com>
페이퍼이야기 폐업 이후, 이를 이어받은 국내 공식 유통사가 유통 채널을 늘리고 보드게임 저변을 넓히며 새로운 시장을 창출했고, 할리갈리의 판매량도 늘어났다. 이후 국내 보드게임 시장은 유통 중심으로 다시 성장했으며, 할리갈리는 이러한 분위기를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는 이때부터 세계에서 할리갈리 판매량이 가장 많은 나라로 부상했고, 현재도 우리나라 할리갈리 판매량은 독일이나 미국보다도 훨씬 많다.
오늘날 아그리콜라 한글판을 즐길 수 있는 이유는 할리갈리의 성장과 관련이 깊다. <출처: divedice.com>
이러한 분위기에서 할리갈리의 국내 유통사는 당시 보드게임 유저들이 갈망하던 '아그리콜라(2007)'의 정식 한국어판을 발매했다. 이후에는 '도미니언(2008)'과 같은 국내 보드게임 유저들의 기대작을 한국어판으로 발매하며 보드게이머들에게 직접적인 이익으로 느껴질 활동을 함께 벌이게 된다.
그 결과, 보드게이머들의 신뢰와 지지를 얻게 되는데, 이는 전적으로 할리갈리의 대성공에 기인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할리갈리가 국내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를 기반으로 유통사는 보드게이머들이 만족할 만한 게임을 한국어판으로 발매했다. 그러한 게임 중 하나가 바로 '아그리콜라'인 것이다.
할리갈리 시리즈
현재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할리갈리 시리즈들 <출처: koreaboardgames.com>
할리갈리는 국내에서 TV CF로 방영되고,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종종 등장하면서 대중적인 인기를 한껏 누렸다. 이에 따라 할리갈리는 연령과 난이도에 따라 다양한 상품으로 출시됐다. 특히, 국내 시장 상황에 따라 다양한 게임이 새롭게 출시되는 등, 다른 보드게임에 비해 독특한 현지화를 거쳤다.
할리갈리 딜럭스 <출처: divedice.com>
"조금 더 하고 싶은데 게임 플레이 시간이 약간 짧다", "한두 사람이 더 할 수 있으면 좋겠다"라는 국내 소비자의 요청에 따라 만들어진 게임이 '할리갈리 딜럭스'다. 할리갈리 딜럭스는 현재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에만 판매되고 있으며, 카드가 19장 더 들어있다. 참고로 해외에서도 원작을 고급화한 '할리갈리 딜럭스'라는 제품이 나온 적 있었으나, 이렇게 추가 카드가 들어있지는 않았다.
할리갈리 주니어(1998) <출처: divedice.com>
숫자를 세기 어려운 유아들을 위한 할리갈리 버전도 나왔는데, 바로 '할리갈리 주니어'다. 카드에 그려져 있는 삐에로의 색이 같으면 종을 치면 된다. 다만, 삐에로의 표정은 웃는 표정과 슬픈 표정으로 나뉘어 있는데, 웃는 표정일 때만 종을 치도록 했다. 이는 플레이어가 흔히 하기 쉬운 실수를 일부러 만들어 놓은 셈이지만, 이를 통해 어린 아이들도 게임의 재미를 확실히 느낄 수 있도록 했다.
할리갈리 익스트림(2005). 돼지는 바로 종을 쳐야 하고, 원숭이는 라임이 없을 때, 코끼리는 딸기가 없을 때 종을 쳐야 한다. <출처: divedice.com>
'할리갈리 익스트림'은 가장 난이도가 높으며, 카드의 구성 형태가 다르다. 한 카드에 3종류의 과일이 그려져 있으며, 똑같은 카드가 2장 보이면 종을 쳐야 한다. 여기에 돼지, 원숭이, 코끼리의 식성을 이용한 특수 규칙이 추가돼, 할리갈리 기본판보다 더 높은 집중력과 손놀림을 요구하고 있다.
손가락에 링을 끼우는 할리갈리 링엘딩(2011) <출처: divedice.com>
'할리갈리 링엘딩'의 원제는 '링엘딩(RingLding)'으로, 국내에서는 게임방식이 익숙한 할리갈리 브랜드로 출시됐다. 플레이어들은 중앙에서 카드를 한 장 넘겨 그림을 확인한다. 카드에는 고리가 끼워진 손이 그려져 있는데, 자신의 손에 색깔에 맞춰 그림과 똑같이 고리를 끼워야 한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빨간색 고리를 끼우고, 중지와 약지 사이에 고리를 꼽다 보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마치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옷 빨리 갈아 입기'를 손으로 옮긴 모양새다.
카드를 연결하라! 할리갈리 링크 (Kuddelmuddel, 2013)
2013년 발매된 할리갈리 링크 또한 할리갈리 브랜드로 국내에 출시된 게임이다. 외국에서는 'Kuddelmuddel'이라는 이름으로 발매된 게임으로, 작가는 할리갈리의 작가 하임 샤피르다. 종이 울리면 동시에 한 손으로 같은 그림이 그려진 카드를 찾아 잇는 게임으로, 7장의 연결된 카드를 만들면 게임에서 승리한다.
가로로 놓을지, 세로로 놓을지 빠르게 판단해야 하는 할리갈리 컵스(2013) <출처: divedice.com>
'할리갈리 컵스'는 할리갈리 시리즈의 최신작으로, 외국에서는 '스피드 컵스(Speed Cups)'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에서는 100만 개나 팔린 할리갈리 브랜드를 그대로 차용하고, 게임 박스도 수납하기 더 좋은 형태로 변경됐다. 플레이어들은 이제 카드가 아니라, 컵을 쌓는다. 컵을 위로 쌓거나 옆으로 늘어놓아 속도를 겨룬다. 먼저 카드 한 장을 펼친 뒤, 카드에 그려진 그림이 가로로 늘어놓은 그림인지, 세로로 높이 쌓아둔 그림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그 형태와 색상을 맞춰 다섯 개의 컵을 배치한다. 일반 할리갈리와 달리, 컵을 만지고 쌓는 느낌이 상당해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할리갈리 바캉스(2011), 할리갈리 크리스마스판(2003). 할리갈리 골든 에디션(2013) <출처: divedice.com>
이 외에 단종된 게임으로는 '할리갈리 바캉스'와 '할리갈리 크리스마스판'이 있다. 할리갈리 바캉스는 카드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물이 묻을 수 있는 환경에서도 게임을 즐길 수 있다. 유튜브에는 외국인들이 물 속으로 잠수하면서 게임을 즐기는 영상이 있어 웃음을 주기도 한다.
할리갈리 크리스마스판은 과일 대신, 크리스마스 트리, 종, 촛대, 눈사람으로 바꿨다. 크리스마스 시즌을 겨냥해서 나온 게임이라 할 수 있다.
할리갈리는 100만 개 이상 팔리며 큰 인기를 끌었는데, 인기가 높은 만큼 대형 할인점을 중심으로 특별한 할리갈리가 제작되기도 했다. 바로 '할리갈리 골든에디션'이다. 이는 박스가 파란색으로, 종이 금색으로 변경됐다는 점을 제외하면 할리갈리와 큰 차이가 없다.
작가 하임 샤피르
할리갈리는 이스라엘의 보드게임 작가 '하임 샤피르(Haim Shafir)'의 대표작이다. 하임 샤피르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성공한 보드게임 작가이며, 30년 가량 창작 활동에 종사한 원로다.
하임 샤피르 <출처: shafirgames.com>
할리갈리는 그가 만든 보드게임 중 가장 성공한 작품으로 한국,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 전 세계 20개 이상 국가에서 정식 발매됐으며 '쉽고 재미있는 보드게임의 교과서' 같은 작품이 되었다.
하임 샤피르가 할리갈리 게임을 만들게 된 계기는 독특하다. 그는 어느 세탁소에서 점원이 세탁물 5개마다 작은 종을 울려서 세탁소 내 다른 직원에게 일감의 양을 알리는 것을 보았다. 이것이 바로 할리갈리의 아이디어가 됐다. 주변의 모든 것에서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찾아내는 것은 게임 작가의 중요한 덕목일 것이다.
하임 샤피르에게 게임에 대한 철학이 있다면, ‘즐거운 아이디어가 제품의 품질을 결정하는 가장 큰 힘이며, 이것이 잘 구축된 작품은 당장 유행하지 않아도 꾸준히 인기있는 작품이 된다는 것’이다. 그의 게임 철학이 말해주듯, 하임 샤피르는 간단한 게임 분야에서 굵직한 작품을 다수 만들었다. 물론 이 가운데 상당수 제품이 국내에도 정식 발매됐다.
정식 한국어판의 의미
할리갈리 시리즈 <출처: koreaboardgames.com>
한국어판 정식 라이선스는 여러모로 의미가 깊다. 최근에는 할리갈리의 '종'만을 '슈어딩'이라는 이름으로 따로 판매하기도 한다. 자주 고장나던 종을 더 튼튼한 형태로 바꾼 것인데, 확실하게 소리가 난다하여 위와 같은 이름이 붙었다.
보통 이런 보드게임 부품은 수입되지 못하고 독일에서만 판매되지만, 공식 유통사가 있어 한국에서도 판매가 됐다. 게다가 보드게임의 A/S는 보통 해외에 있는 제조사에 직접 신청하는데, 정식 한국어판이 나오면서 이런 A/S 부분을 유통사에서 빠르게 대신 해결해주는 등, 소비자의 편익이 증대되고 있다.
한국어판 라이선스 취득은 더 저렴한 가격에 더 쉽게 게임을 구매하게 하며, 한글로 된 박스 그 자체만으로도 보드게임이라는 취미에 쉽게 다가서도록 한다. 영어로 된 게임을 하는 것은 그 자체의 재미를 즐기지 못하고 공부가 되기 십상인데, 한국어판이 발매되면서 재미에 몰입할 수 있게 된 것도 의미가 있다.
할리갈리가 성공을 거둠에 따라 다른 보드게임들의 한국어판 라이선스 취득이 늘어났고, 이를 통해 소비자는 더욱 다양한 보드게임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즉, 할리갈리는 보드게임 산업의 시작을 경쾌하게 알린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글 / IT동아 보드게임 필자, 코리아보드게임즈 박지원
편집 / IT동아 안수영(syahn@itdonga.com)
※본 기사는 네이버캐스트 게임의 세계: 보드게임의 세계(http://navercast.naver.com/list.nhn?cid=2883&category_id=2883)에 함께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