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임의 세계] 주사위를 굴려 오르락내리락, 뱀사다리 게임
주사위를 굴려 나온 눈만큼 게임 말을 전진하고, 100번째 칸에 도달하면 승리하는 게임. 사다리가 그려진 칸이 걸리면 사다리를 타고 윗칸으로 한 번에 올라가고, 뱀이나 미끄럼틀이 있는 칸에 걸리면 아래 칸으로 떨어져 내리는 게임. 바로 뱀사다리 게임(사다리 게임)이다. 나이가 많은 어른들이라면 아마 '뱀주사위 게임'이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을 수도 있다.
사다리 게임은 어른들에게는 옛 추억을 상기시키고, 아이들에게는 보드게임 세계에서 걸음마를 시작하게 하는 게임이다. 사실, 이 게임은 알고 보면 전세계적으로 굉장히 유서가 깊다.
유아 교육전의 베스트셀러, 스머프 사다리게임(2011년) <출처: divedice.com>
사다리 게임의 플레이 방식
사다리 게임을 플레이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게임판 위에는 1부터 100번까지 칸이 있다. 각 플레이어는 돌아가면서 차례를 갖고, 자신의 차례가 되면 주사위를 굴려 나온 눈만큼 게임 말을 전진한다. 이동 중에 사다리가 그려진 칸이 걸리면 그 사다리가 닿아 있는 윗칸까지 한 번에 올라가고, 뱀 또는 미끄럼틀이 있는 칸에 걸리면 그 뱀의 꼬리나 미끄럼틀의 아랫단이 닿아 있는 밑 칸까지 곧바로 떨어져 내린다. 이런 이동을 반복하면서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100번째 칸에 도착하면 승리한다.
뱀사다리 게임의 역사와 목적성
사실, 사다리 게임에 미끄럼틀이 들어간 것은 비교적 후대의 이야기이며, 원형인 뱀사다리 게임(Snakes and Ladders)은 인도에서 시작됐다. 뱀사다리 게임은 'Moksha Patam'이라는 이름으로 고대 인도에서 선사시대 때부터 즐겼던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된다고 한다. 뱀이 그려진 이유는 이 게임의 목적과도 관련이 있는데, 게임의 목적은 바로 힌두교의 교리를 설법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다리는 관용, 신념, 겸손 등 건전한 도덕성으로서의 선 혹은 숙명을 의미하며, 뱀은 욕정, 분노, 살인, 강탈 등 악에 근거한 업보를 의미한다. 사다리게임의 윗단으로 올라가는 것은 인간이 선을 행함으로써 차차 높은 단계로 이행하는 것이고, 100번 칸에 도달하는 것은 해탈(Moksha)의 의미를 지닌다. 반면, 악행을 하면 그 존재는 더 낮은 단계의 생명으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 사다리의 개수는 뱀의 개수보다 적은데, 이는 삶에서 선을 행하기가 악에 물들기보다 어렵다는 뜻을 지닌다.
힌두교에서 파생된 자이나교에서는 'Gyan Chauper'라는 뱀사다리 게임을 즐겼다고 한다. 설법의 의미는 동일하나 그 형태는 좀 더 종교적이다. 이 게임판은 전체적으로 인간의 형상을 지녔는데, 사각형 게임 판의 양 옆에는 팔이 그려져 있고 아래에는 다리가 그려져 있다. 9 X 9 사이즈의 게임 판 상단 중앙에는 십자가 모양으로 돌출된 칸이 더 있는데, 이는 머리를 의미한다. 머리에 해당하는 돌출된 칸에 도달하는 것은 바야흐로 전우주적인 존재, 즉 신으로 거듭남을 의미한다.
자이나교의 Gyan Chauper. 뉴델리 국립박물관 소장. <출처: Nomu420 at wikipedia.org>
이후, 이 게임은 1890년대에 인도가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영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이때, 이 게임의 종교성은 빅토리아 여왕 시기의 도덕성으로 변형되어 수용된다. 절약, 성찰, 근면 등을 상징하던 미덕의 사다리는 성공과 실현, 우아함의 칸으로 이어진다. 사치와 나태, 불복종을 상징하던 뱀은 병들고 가난함으로 바뀌어 이어진다. 인도판은 뱀이 사다리보다 더 많았지만, 영국판은 용서의 의미를 강조해 사다리가 더 많았다. 이때만 해도 영국은 인도와의 관계 속에서 인도식 원형을 살려 '뱀사다리 게임(Snakes and ladders)'이라는 이름을 유지했다.
1943년, 미국에서 밀튼 브래들리사가 이 게임을 새롭게 만들었고, 이 때부터 게임에서 뱀이 사라지고 종교적인 의미가 자취를 감추게 됐다. 밀튼 브래들리사는 이 게임을 '미끄럼틀과 사다리 게임(Chutes and ladders, 1943)'으로 만들었고, 이후 이 사다리게임은 전세계로 퍼져나가게 됐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종교적, 도덕적 목적은 거의 사라진 대신, 1부터 100까지 숫자 더하기의 개념을 익히는 차원의 교육적 용도만 남았다.
다양한 형태의 사다리게임
사다리 게임은 세계 각국에서 다양한 형태로 제작됐다. 편의상 100번째 칸을 마지막 칸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실제로 사다리 게임은 다양한 칸수와 형태를 가지고 있다. 10 X 10이라면 100번이 마지막 칸이겠지만, 8 X 8부터 12 X 12까지 다양한 형태로 확장할 수 있다.
캐나다판 사다리게임. <출처: Boardgamegeek.com>
뱀과 사다리 또한 다른 형태로 바뀌곤 한다. 20세기 초 캐나다 게임사(Canada Game Company)에서 나온 사다리 게임은 뱀 대신 눈썰매를 차용했다. '찰리 채플린 에디션'에서는 채플린이 떨어뜨리는 접시나 그가 타고 내려가는 가로등 따위의 요소들이 뱀을 대신했다. '토마스와 친구들 버전'에서 뱀은 터널로, 사다리는 선로로 묘사됐다. 대부분 뱀은 미끄럼틀 등 다른 형태로 많이 활용됐고, 사다리는 대체적으로 그대로 사용된 경우가 많았다.
찰리 채플린 사다리게임. <출처: Boardgamegeek.com>
1959년 영국 출판사인 Odhams Press에서 나온 사다리 게임은 위로 올라가는 것은 로켓으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낙하산으로 표현됐으며, 게임 판의 각 칸에는 역사적인 사건들이 적혀 있었다. 예를 들면 1914년 제1차 세계대전과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1846년 아일랜드 대기근 같은 불행한 사건 칸에 닿으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반면, 1580년 드레이크의 세계 일주나 1833년 영국의 노예제 폐지와 같은 칸에서는 로켓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영국에서 만들어진 게임인 만큼, 게임판에 기록된 역사들 중에는 프랑스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칸이 상승칸으로 제작됐다.
Odham Press의 사다리 게임에는 모든 칸에 역사적 사건이 적혀 있다. <출처: Boardgamegeek.com>
한국에서는 군사 정권 시절에 '뱀주사위 놀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판이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떨어지는 것은 뱀이었지만 올라가는 것은 고속도로였다. 또한, 상승하는 칸에는 나무 심기, 간첩 신고, 독서 등의 내용이 있었고, 추락하는 칸에는 불법 벌목, 불장난 등이 그려져 있었다. 이는 놀이 문화가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군사정권 당시의 뱀주사위놀이. <출처: Boardgamegeek.com>
밀튼 브래들리와 사다리게임
밀튼 브래들리는 미국의 보드게임 개발자다. 1836년 미국 메인주에서 태어나 1911년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처음 개발해 성공시킨 보드게임은 '인생의 체커 게임(The Checkered Game of Life, 1860)'인데, 이 게임은 뱀사다리 게임을 따서 제작됐다. 바로 주사위를 굴려 나온 숫자만큼 말을 움직여, 100번째 칸에 먼저 도착하는 이가 승리하는 게임이었다. 1861년, 이 게임은 무려 4만 5,000카피 이상 판매됐다.
인생의 체커 게임. 체커판의 형태를 명확히 지니고 있다.
게임을 개발한 1861년 초, 미국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밀튼 브래들리는 보드게임을 만들기보다 무기 산업에 뛰어들고자 했다. 그러나 그가 있던 스프링필드에서 무료함에 빠져 있는 군인들을 보고, 병사들이 한가한 시간에 즐길 수 있는 가벼운 게임을 만들기로 했다. 그는 자신의 친구 조지 테플리(George Tapley)를 찾아갔고, 조지가 소개한 영국 고전 게임의 안을 따서 미국적인 게임을 만들었다. 그가 만든 8 X 8 사이즈의 체커판 형태의 게임판에는 각 칸에 특정한 장소와 지시 사항이 그려져 있다. 그래서 '정직' 칸에 걸리면 그보다 위인 '행복' 칸으로 이동하고, '범죄' 칸에 걸리면 그보다 아래인 '감옥' 칸으로 이동하는 형태였다.
오늘날 출시되고 있는 인생게임. <출처: divedice.com>
이 게임이 발전, 변형된 형태가 바로 오늘날의 '인생 게임(The Game of Life)'이다. 인생 게임에서는 숫자판을 돌려 나온 수만큼 말이 전진하고, 멈춘 칸에 나와 있는 지시를 이행하며 돈을 얻거나 잃는다. '인생의 체커 게임'에서 '인생 게임'으로 넘어오면서 생긴 가장 큰 변화는 '부'다. 마지막 칸에 먼저 도착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가장 많은 돈을 버는 것이 중요해진 것이다. 황혼에 들어 은퇴를 할 때까지의 삶의 성취도를 부로 따지게 된 것은, 당시 미국 사회에서 급증한 부의 축적 욕구를 반영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인생 게임은 모노폴리와 더불어 미국적 가치관을 반영한 양대 게임 중 하나로 꼽히게 됐다.
부의 축적이 중요해진 인생 게임. <출처: divedice.com>
밀튼 브래들리는 1911년 세상을 떠났다. 1920년대를 지나 30년대로 넘어가면서 경제 대공황이 찾아오자, 브래들리사는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걸었다. 이 과정에서 제임스 j. 셔(James J. Shea)가 회사를 살리기 위해 공장에서 낡은 공정은 제거해 버리는 등 극단의 조치를 감행해 회사의 빚을 줄여나갔다. 이후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셔는 전투기 부품 생산과 동시에 군인들이 즐길 수 있는 게임 키트 개정판을 생산했고, 200만 달러의 수익을 거두었다. 브래들리사는 410개의 생산라인을 150개로 줄여가면서도 보드게임 제작을 강행했고, 바로 이때 '캔디랜드(Candyland, 1949)'와 더불어 '사다리 게임(Chutes & Ladders, 1943)'이 나왔다.
한국의 사다리 게임
사다리 게임은 오랜 역사를 지닌 만큼, 전세계적으로 매우 다양한 버전들이 만들어졌다. 국내에서도 여러 버전이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입지가 큰 것은 스머프 사다리 게임(2011)이다.
가가멜 칸에 들어가면 가가멜이 쫓아온다. 스머프 사다리게임(2011)
스머프 사다리 게임은 국내에서 2011년 영화 '개구쟁이 스머프' 개봉을 염두에 두고 제작된 게임이다. 1958년 발표된 스머프 캐릭터는 1980년대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어 현재의 부모세대에게 익숙하고, 새로 개봉한 영화를 통해 세대가 함께 호흡할 수 있다는 점이 제작의 동기가 됐다.
다른 사다리 게임과 다른 것은, 가가멜과의 추격전 개념이 있다는 것이다. 이 게임에서 스머프들은 가가멜의 추격을 피해야 한다. 게임 판에는 가가멜이 그려진 칸이 여럿 있는데, 해당 칸에 누군가 도착하면 모두 가가멜에게 쫓기게 된다. 가가멜 칸에 누군가가 도착하면 가가멜 카드를 펼쳐, 카드에 제시된 불이익을 받는 것. 이를 통해 사다리 게임에 박진감을 더했다.
어린이들에게 인기 있는 캐릭터를 사용한 또봇 배틀사다리(2014). <출처: divedice.com>
2014년에는 '또봇 배틀사다리'와 '트랜스포머 배틀사다리'가 각각 출시됐다. 기본적인 규칙은 사다리 게임을 바탕으로 하며, 스머프 사다리 게임에서 호평 받은 카드 진행 방식을 계승했다. 차이점은 쫓아오는 누군가가 없는 대신에, 주사위 굴림을 통해 추가로 더 이동하거나 뒤로 가는 복불복 요소가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플레이어가 게임 판에 있는 배틀 칸에 도착하면, 카드를 뽑아 주사위를 굴리게 되고, 이를 통해 박진감 넘치는 로봇 전투의 느낌을 잘 살렸다. 마지막 100번째 칸에서 최종 보스와 대결이 있다는 점도 기존 사다리 게임과 다르다. 숫자를 먼저 부르고, 주사위를 굴러 정확하게 숫자를 맞춰야 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다. 6이 나오면 후퇴해야 하기 때문에 최종 보스와의 결투에서 승리했을 때의 카타르시스가 대단하다.
신의 세계에서 공평한 세상으로
고대 인도에서 종교적 의미를 지녔던 뱀사다리 게임은 영국으로 건너가 자본주의의 양식에 맞게 옷을 입기도 하고, 반공 정서에 맞춰 옷을 갈아입기도 하는 등 사회 기저에 깔린 정서를 유지, 전승하는 형태로 발전해 왔다. 이 게임이 이렇게 긴 시간을 이어져 내려온 것은 재미와 교육적 요소를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 아닐까.
현재 출시된 사다리 게임들은 논란이 될 수 있는 종교적, 사회적 이슈를 게임에 반영하는 것을 줄이고 단순히 재미만 추구했다. 하지만 보드게임이 가진 공감과 소통 기능은 그대로 살아있다.
어른, 아이 모두 익숙한 캐릭터를 사용한 트랜스포머 배틀사다리. <출처: divedice.com>
이 게임은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의미가 있는데, 그 이유는 운의 요소가 강하게 적용되어 있다는 점이다. 대개, 행운이 크게 작용하는 게임들은 국내 플레이어들에게 어필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때문에, 운의 요소를 차용한 전략 게임들은 대부분 그 운을 조금이나마 플레이어들이 조절할 수 있게끔 되어 있다. 하지만, 사다리 게임은 운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이는 게임 진행의 대부분을 주사위 굴림으로 해결하기 때문인데, 이 운이 재미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아이들은 이런 운의 요소를 좋아하며, 설사 지더라도 게임에 승복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운이니까 쉽게 승복하며 "다시 한 판!"을 외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사다리 게임이 가족 게임으로서 각광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글 / IT동아 보드게임 필자, 코리아보드게임즈 현 수
편집 / IT동아 안수영(syahn@itdonga.com)
※본 기사는 네이버캐스트 게임의 세계: 보드게임의 세계(http://navercast.naver.com/list.nhn?cid=2883&category_id=2883)에 함께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