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맞춤형 모빌리티, PBV가 주도하는 이동 패러다임의 변화
[IT동아]
서울 성수동의 한 스타트업 CEO는 최근 색다른 결정을 내렸다. 사무실 한 켠에 있던 회의실을 없애고, 대신 이동형 오피스 차량을 도입한 것이다. 중요한 미팅이 있으면 팀원들과 한강공원으로 이동해 회의를 진행하는데, 탁 트인 공간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훨씬 잘 나온다는 이유 때문이다. 일하는 공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이러한 경계의 변화는 사무공간에 국한되지 않는다. 자동차 역시 이동 수단의 틀을 넘어 새로운 공간으로 재해석되면서, 일과 생활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흐름이다. 자동차가 단순 이동 수단에서 '움직이는 라이프스타일 공간'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모빌리티 패러다임의 대전환
자동차의 개념이 바뀌고 있다. 사용자/운전자의 목적, 용도와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자동차가 설계되고 운용되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 있는 개념이 바로 'PBV(Purpose Built Vehicle)', 즉 목적기반 차량이다.
PBV는 '왜 이동하는가'라는 목적 중심의 사고에 기반한다. 기존 차량을 용도에 맞게 단순 개조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특정 목적을 고려해 설계, 제조되는 차량이다. 휠체어 사용자에게 최적화된 택시, 배달 전용 소형 전기차, 이동형 카페, 캠핑 숙소 등이 PBV의 활용 사례다.

전 세계 모빌리티 산업계는 이미 PBV의 잠재력에 주목하고 있다. 오리온 마켓 리서치(Orion Market Research, 2023)에 따르면 글로벌 PBV 시장은 2023-2030년 동안 연평균 6.1%의 성장률을 보일 것으로 전망되며, 현대자동차그룹 역시 2020년 32만 대 수준이던 연간 PBV 생산량이 2025년까지 130만 대 규모로 확대될 것이라 예측한 바 있다.
전 세계 완성차 업체들도 이런 시장 변화에 발빠르게 대응한다. GM은 2024년 '브라이트드롭(BrightDrop)' 브랜드를 통해 전기 상용차 시장에서 PBV 전략을 본격 가동하고 있으며, 아마존 등과 라스트마일 배송 설루션도 상용화하는 등, PBV 콘셉트 차량을 실제 시장으로 연결하고 있다. 포드도 'E-트랜짓(E-Transit)' 모델을 통해 PBV 시장에서의 입지를 강화한다. E-트랜짓은 세 가지 지붕 높이 옵션과 두 가지 차체 길이 옵션을 제공하며, 다양한 용도로 변형 가능한 19가지 구성을 공급하고 있다. 특히 상용차 시장에서 요구되는 다양한 맞춤형 솔루션을 위해, 섀시캡과 커스터마이징 모델을 통해 PBV의 유연성을 구현하고 있다.
메르세데스-벤츠는 더욱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내년 모든 신규 개발 밴을 'VAN.EA(Van Electric Architecture)' 플랫폼 기반으로 출시할 예정인데, 이 플랫폼은 상용차와 개인용 고급 밴을 모두 아우르는 모듈러 구조로 설계됐다. 메르세데스-벤츠는 2030년까지 글로벌 밴 판매량의 50% 이상을 전기 밴이 차지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단순한 전기화를 넘어 PBV 시장에서의 프리미엄 포지셔닝을 통한 차별화 전략이라 할 수 있다.
국내에서도 PBV는 미래 전략사업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특히 기아의 첫 PBV 모델인 'PV5'는 콘셉트 단계를 넘어 현재 본격적으로 판매되고 있다. PV5는 지난 6월 사전계약을 시작해 8월부터 고객 인도가 진행됐으며, 향후 PV7, PV9, 초소형 PV1까지 풀라인업 확장을 계획하고 있다. 또한 기아는 올해 1월에 우버와 업무협약(MOU)을 체결해, PV5 기반 차량을 우버 드라이버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제공하기로 했다. PBV가 신차 콘셉트를 넘어 실제 현장에 적용되는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특장차에서 PBV로, 기술의 연속과 비즈니스 모델의 전환
PBV의 본질은 '맞춤형 구조'다. 모듈러 시스템을 통해 설계 단계부터 사용자가 원하는 기능과 요소를 반영해 제작한다. 이는 기존의 특장차 기술과 동일 선상에 있다. 산업 현장의 요구에 따라 실내 구성, 기능, 안전 설비 등을 달리 설계해온 특장차 기술이 이제는 일반 소비자를 위한 라이프스타일 맞춤형 차량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즉 PBV는 특장차의 진화된 형태이자 생활 중심 모빌리티 시장으로의 확장판이라 할 수 있다.
PBV의 기술적 연속성과 시장 확장성을 포착하고 전략적으로 대응하는 국내 주요 기업으로 케이씨모터스와 차봇 모빌리티 등이 있다. 케이씨모터스는 2006년 기아 카니발 하이리무진 개발·생산을 시작으로, 국내 최고 수준의 자동차 디자인 및 특장차 제작 역량을 갖춘 기업으로 성장했다. 특히 2012년 설립한 자체 R&D 센터를 통해, 기획부터 스타일링, 엔지니어링 디자인, 프로토타입, 양산까지 차량 개발의 전 과정을 독자 수행할 수 있는 인프라를 확보했다. 이는 다양한 베이스 차량을 기반으로 고객 맞춤형 설계를 빠르게 실현할 수 있는 기술 경쟁력으로 이어진다.

이 같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탄생한 프리미엄 리무진 브랜드 '노블클라쎄(Noble Klasse)'는 고급 의전 차량 시장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했다. 특히 2021년 출시된 메르세데스-벤츠 스프린터 기반 'L13' 모델은 '도로 위의 개인 전용기'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며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최근에는 특장차와 맞춤형 설계 역량이 자율주행 셔틀 분야로도 확장된다. 케이씨모터스는 A2Z(Automous A to Z)의 레벨4 자율주행 셔틀 'ROii(로이)'의 설계를 맡으며 포트폴리오를 넓혀가고 있다.

노블클라쎄는 현재 기존 차량을 특정 목적에 맞게 맞춤 개조하는 컨버전 차량의 형태를 취한다. 이는 케이씨모터스가 PBV 시장으로 진화하기 위한 핵심적인 기술 기반이 된다. 실제로 케이씨모터스는 이러한 맞춤형 차량 제작 노하우를 바탕으로, 차체 설계부터 플랫폼 자체를 특정 목적에 맞게 기획·제작하는 본격적인 PBV 개발 역량을 구축하는 중이다.
차봇모빌리티와도 디지털 딜러십 단독 협약을 체결하며, PBV 트렌드 안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했다. 이번 협업은 단순한 유통 채널의 확장을 넘어, 오프라인 중심이던 고부가 맞춤형 차량 판매 모델을 디지털 환경에서 구현함으로써, PBV의 경험을 '제품'이 아닌 '서비스'로 전환하려는 전략이다. 특히 단기 판매는 물론 장기 서비스 모델로 진화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부분이다.
고객은 차봇 모빌리티의 '디지털 컨시어지 서비스'를 통해 온라인에서 다양한 차량 옵션을 간편히 비교하고, 보험·금융·시공·차량관리까지 아우르는 통합 서비스를 한번에 이용할 수 있다. 이후 양사는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에 특화된 차량 구독 상품도 선보일 계획이며, 이를 통해 고객은 차량을 소유하지 않고도 자신의 일상에 맞는 맞는 모빌리티를 유연하게 선택, 경험할 수 있다.

한편, 차봇 모빌리티는 케이씨모터스와 함께 고객 사용 패턴, 지역별 선호도 등을 데이터로 분석하고, 이를 기반으로 맞춤형 차량 기획, 마케팅, 사후관리까지 연계하는 선순환 구조를 구축한다. 차를 '잘 만드는' 기술에서 차를 '잘 사용하는' 구조로의 패러다임 전환이자, PBV 시장이 제조 산업을 넘어 서비스형 모빌리티 산업으로 진화되고 있음을 증명하는 사례가 된다.
PBV 시장의 전략적 협업, 새로운 시너지
PBV는 단순한 신차 트렌드를 넘어, 이동의 개념 자체를 재정의하는 산업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글로벌 OEM 제조사들은 이미 전용 플랫폼과 생산체계를 구축하며 PBV 라인업을 확장하고 있고, 정부와 지자체 역시 라스트마일 물류, 휠체어 탑승형 택시, 이동형 진료소 등 공공 영역에서 PBV 도입을 본격화하는 중이다. 이제 차량은 '어디로 갈 것인가'를 묻는 수단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담아내는 공간으로 진화한다. 그리고 그 공간을 누가, 어떤 방식으로 설계할 것인 지에 관해 이 두 기업이 해답을 찾아 가고 있다.
IT동아 이문규 기자 (munch@itdong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