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미국에 반도체 찍힌 유럽, RISC-V는 '독립선언서'가 되어줄까

남시현 sh@itdonga.com

[IT동아 남시현 기자] 2016년, 유럽연합 이사회에서 EU의 광범위한 디지털 단일 시장 구축을 위해 단합된 고성능 컴퓨팅 도입 및 관리 기관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에 따라 2017년 3월 고성능 컴퓨팅에 대한 유럽 선언이 연이어 열렸고, 2018년 6월 들어 유로HPC 공동 사업체가 설립된다. 유럽 고성능 컴퓨팅 공동 사업은 2021년부터 27년까지 약 70억 유로(약 11조 711억 원)의 예산을 조달하며, 2024년 10월 기준 27개 회원국과 비EU 연합국 8개가 포함돼있다.

목표 역시 구체적이다. 유로HPC는 세계 5위권 이내 슈퍼컴퓨터를 EU 영토 내 최소 두 대 이상 유치하는 것이 목표며, 유럽의 민간 및 공공 사용자, 과학 및 산업 대상으로도 세계 상위 25위 수준의 슈퍼컴퓨터 2대 이상을 구축해 800개 이상 기관 및 기업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지원할 예정이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와의 관세 전쟁, 그리고 자국 내 제품 생산을 우선시하는 기술패권주의로 인해 이러한 EU 내 슈퍼컴퓨터 전략도 흔들리는 중이다.

유럽 연합 내 9개 슈퍼컴퓨터, 순수 유럽제는 0개


유럽 최초의 엑사스케일 슈퍼컴퓨터가 될 ‘주피터’ / 출처=율리히 연구센터
유럽 최초의 엑사스케일 슈퍼컴퓨터가 될 ‘주피터’ / 출처=율리히 연구센터

2025년 3월 기준 유로HPC가 구축한 슈퍼컴퓨터는 ▲ 핀란드 루미 ▲ 이탈리아 레오나르도 ▲바르셀로나 마레노스트룸 5 ▲룩셈부르크 멜룩시나 ▲체코 카롤리나 ▲불가리아 디스커버러 ▲슬로베니아 베가 ▲포르투갈 듀칼리온 ▲독일 주피터까지 9개다. 이중 독일 율리히 연구센터에 구축 중인 주피터는 당초 설치 완료 시점인 2024년 말에서 조금 더 늦어져 2025년 현재 가동을 눈앞에 둔 상황이다.

문제는 슈퍼컴퓨팅 하드웨어 조달에 대한 전 세계의 규칙이 새로 정립되는 중이다. 지난 1월 15일, 바이든 행정부는 미국의 AI 동맹국을 세 단계로 구분하고 1등급의 동맹국은 미국의 AI 기술에 대한 무제한적인 접근을 허용하나, 그 아래 등급의 기업은 미국산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조달에 제한을 뒀다. 당장 2025년부터 2027년까지 2등급 국가는 3년 간 그래픽 카드 구매가 5만 개로 제한되고, 3등급인 20개 국가는 수출이 전면 금지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부임 전부터 전 세계 제조업 등을 미국으로 가져오는 등의 패권주의를 주장했다 / 출처=백악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부임 전부터 전 세계 제조업 등을 미국으로 가져오는 등의 패권주의를 주장했다 / 출처=백악관

이어서 부임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반도체 산업을 되찾겠다’, ’미국의 반도체 사업을 해외에 도둑맞았다’는 논리로 반도체 업계에 유래없는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당장 TSMC에 미국 인텔의 공장 지분을 인수하도록 요청하는가 하면, 반도체 지원법이 끔찍하다며 TSMC, 삼성전자, SK하이닉스를 겨냥해 투자를 더 이끌어내려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유럽의 슈퍼컴퓨터 구축 전략에도 수정이 불가피하다. 당장 루미, 베가, 멜룩시나, 듀칼리온, 디스커버러는 AMD 에픽 CPU를 사용하고, 레오나르도와 마레노스트룸은 인텔 사파이어 래피즈 기반이다. 그래픽 카드도 8개가 엔비디아 기반, 1개는 AMD 기반이다. 조달 기업도 프랑스 아토스를 제외하면 HPE, 레노버, 후지쯔 등 EU 외 기업 비중이 높다.

기술 독립 꿈꾸는 EU, 최소한 CPU는 RISC-V 전환 꿈꿔

상황이 이렇다 보니 유럽 역시 기술 자립을 목표로 자체 기술력 기반의 슈퍼컴퓨터 구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올해 구축되는 주피터가 프랑스 아토스(Atos)에서 설계한 불세콰나 XH3000(BullSequana XH3000)을 탑재한다. 주피터는 EU 최초의 엑사스케일 시스템으로, Top500 슈퍼컴퓨터 순위 중 3위 혹은 4위에 안착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주피터도 내부 구성은 유럽 자산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프랑스 앙제에 있는 JETI 모듈, JETI는 주피어 12분의 1 규모의 시험용 슈퍼컴퓨터다 / 출처=에비든
프랑스 앙제에 있는 JETI 모듈, JETI는 주피어 12분의 1 규모의 시험용 슈퍼컴퓨터다 / 출처=에비든

주피터는 불세콰나 XH300 액체 냉각 시스템으로 구성되며, 높은 대역폭 메모리 프로세서로 구성된 범용 클러스터 모듈과 확장성이 뛰어난 GPU 가속 부스터 모듈로 나뉜다. 범용 클러스터 모듈은 프랑스 사이펄(SiPearl)에서 Arm 네오버스 V1 코어 80개를 기반으로 만든 Rhea 1 CPU 및 삼성전자 HBM2E 메모리로 구성되고, 가속 컴퓨팅 모듈은 Arm 네오버스 코어 및 엔비디아 호퍼 아키텍처로 구성된 GH200 그레이스 호퍼 슈퍼 칩 2만 4000개가 탑재된다. 즉 핵심 연산은 미국과 영국 기술인 셈이다.


유럽 프로세서 이니셔티브가 설계한 최초의 RISC-V 기반 ‘유럽 프로세서 가속기(EPAC)’ / 출처=EPI
유럽 프로세서 이니셔티브가 설계한 최초의 RISC-V 기반 ‘유럽 프로세서 가속기(EPAC)’ / 출처=EPI

비록 최초의 엑사스케일 컴퓨터는 미국 자산으로 만들어지지만, 두 번째부터는 부분적으로 기술 자립이 예상된다. 2018년 출범한 유럽 프로세서 이니셔티브(EPI)는 지난 21년 최초의 RISC-V 기반 유럽 프로세서 가속기(EPAC)를 선보였었다. 2026년 프랑스에 완공되는 두 번째 엑사스케일 슈퍼컴퓨터 ‘앨리스 레코크(Alice Recoque)’의 벡터 가속기에는 EPAC가 탑재될 수 있다. 현재까지 구체적인 계획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성능 한계 때문인지 메인 프로세서는 사이펄의 Rhea 1 및 2를 탑재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유럽은 앞으로 RISC-V의 시대가 올 것으로 본다. RISC-V는 축소 명령어 집합 컴퓨터(RISC) 기반의 개방형 명령어 집합으로, 누구든지 칩과 소프트웨어를 설계 및 제조, 판매할 수 있도록 오픈소스 형태로 제공된다. 즉 Arm이나 인텔, AMD가 아닌 자체 기술 프로세서 구현에 가장 적합한 형태인 셈이다. 소프트웨어 및 개발, 제작 생태계가 부족하고, 장기적인 안정성이 확보되지 않아 비효율적임에도 가장 시도할만한 선택지로 본 것이다.


유로HPC는 세 번째 슈퍼컴퓨터 계획은 비워둔 채 RISC-V 개발을 우선한다. 이미지는 DARE SGA 1 프로젝트 핵심 주제 및 파트너사 정리 / 출처=유로HPC
유로HPC는 세 번째 슈퍼컴퓨터 계획은 비워둔 채 RISC-V 개발을 우선한다. 이미지는 DARE SGA 1 프로젝트 핵심 주제 및 파트너사 정리 / 출처=유로HPC

이를 증명하듯 유럽은 세 번째 슈퍼컴퓨터 계획은 공란으로 둔 상황에서, RISC-V 개발에 먼저 박차를 가한다. 지난 3월 7일, 유로HPC는 38개의 주요 파트너가 참여하는 ‘디지털 오토노미’라는 기술 그룹을 출범하고, RISC-V 기반 CPU를 개발하는 DARE SGA 1 프로젝트를 구성했다.

이 프로젝트는 1단계에서 2억 4000만 유로(약 3797억 원)를 투입해 완전한 유럽 슈퍼컴퓨팅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스택을 구성한다. 유로HPC는 유럽의 디지털 주권 확보를 위해 공동으로 설계하고, 1단계가 끝나면 완전한 유럽형 HPC 구축에 나선다.


엑셀레라 AI는 유로HPC로부터 서버용 칩 티타니아 개발을 위해 6160만 유로(약 975억 원)를 지원받았다 / 출처=엑셀레라AI
엑셀레라 AI는 유로HPC로부터 서버용 칩 티타니아 개발을 위해 6160만 유로(약 975억 원)를 지원받았다 / 출처=엑셀레라AI

이 프로젝트는 바르셀로나 슈퍼컴퓨팅 센터에서 조정하며, 바르셀로나의 오픈칩이 주도하는 벡터 수학 가속기, 네덜란드 스타트업 엑셀레라 AI(Axelera AI)의 차세대 추론 칩셋, 독일 코다십(Copdasiop)의 범용 프로세서 세 개의 칩을 RISC-V로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미 엑셀레라 AI는 엣지 컴퓨팅용 AI 모델 프로세서는 완성했고, 곧 서버용 칩인 티타니아(Titania) 칩셋을 공개할 예정이다. 코다십 역시 32비트 임베디드 및 64비트 애플리케이션 등급 RISC-V CPU를 제공하고 있고, DARE 프로젝트에 맞게 빅데이터 처리 및 슈퍼컴퓨팅용으로 포트폴리오를 확장할 예정이다. 오픈칩의 벡터 가속기에 대한 정보는 아직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전례 없는 미국발 반도체 위기, 대안과 해법 모색해야

유럽의 기술자립은 디지털 주권 확보 차원이다. 당장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에 수입하는 모든 철강, 알루미늄에 25% 관세를 부과하자 유럽연합 역시 이에 대한 보복으로 4월부터 美 제품에 41조 원 상당의 관세를 물리기로 했다. 더 강력한 미국의 보복이 이어질 상황이어서 미국이 유럽에 의존하는 방사선 치료 동위원소, 항생제, 고급 철강 등을 무기화하자는 목소리도 나온다. AI 등 미래의 시장 가능성을 볼모로 잡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슈퍼컴퓨터 같은 국가적 자산만큼은 자체 기술을 활용하겠다는 의미다.


유로HPC 프로젝트의 끝은 유럽판 양자컴퓨팅 사업의 시작과 맞닿아있다 / 출처=유로HPC
유로HPC 프로젝트의 끝은 유럽판 양자컴퓨팅 사업의 시작과 맞닿아있다 / 출처=유로HPC

이미 유럽연합은 RISC-V 뿐만 아니라 장치 간 통합 기술인 인터커넥트 목적의 NET4EXA, 시스템 아키텍처와 소프트웨어 및 SDK, 앱까지 통합하는 HPC용 유럽 플랫폼 유펙스(EUPEX),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및 하드웨어를 결합하는 오픈소스 유럽 풀스택 생태계인 e프로세서 등도 종합적으로 진행 중이다. Arm 역시 미국의 최우방인 영국 자산이다 보니 생태계 전반을 독자적으로 구축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한편 우리나라는 메모리 반도체 주요 생산국이고, 미국의 우방국이어서 반도체 무기화에도 협상의 여지는 있다. 유럽은 그마저도 없기 때문에 기술 자립이 절실한 상황이다. 우리나라도 유럽과 마찬가지로 마이크로프로세서와 그래픽 카드가 거의 종속돼 있어 손 놓고 있을 상황은 아니다. 장기적으로는 RISC-V나 신경망 처리 장치(NPU) 등 자체 반도체 생태계도 꾸준히 투자해야 한다.

IT동아 남시현 기자 (sh@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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