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AP2022] 전시회보단 경제 포럼…주역은 사우디 정부와 통신업체
[IT동아 권택경 기자]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지난 1일부터 열린 국제 기술 전시회 ‘LEAP 2022’가 3일을 마지막으로 사흘간의 일정을 마쳤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올해 처음으로 연 이번 행사는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디지털 경제 중심지로 거듭나고자 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야심이 묻어나는 자리였다.
각 기업들의 신제품이나 신기술이 중심이 되는 미국 소비자 가전 전시회(CES)나 유럽 모바일 월드 콩그레스와 달리 LEAP2022 행사의 중심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였다. 전시회보다는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한 중동·북아프리카 지역의 디지털 경제 포럼에 더 가까웠다. 연결성, 접근성, 지속가능성 등 기술을 둘러싼 세계적 현안에 관한 논의, 관련 정책 및 비전 제시가 이어졌다. 세계경제포럼 연례 회의의 별칭인 ‘다보스 포럼’에 빗댄 ‘디지털 다보스’라는 표현도 나온다.
행사 첫날 하이라이트였던 압둘라 알스와하 사우디아라비아 정보통신부 장관의 기조연설도 사우디를 중동·북아프리카 지역의 디지털 경제 중심지로 키우기 위한 인프라에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밝히는 데 할애됐다. 사우디 국영 통신기업인 STC는 중동·북아프리카 지역의 디지털 허브 역할을 하는 통신 인프라 및 데이터센터를 구축하는 독립 법인 설립에 10억 달러(약 1조 2천억 원)를 투자한다고 밝혔다.
이외에도 사우디 북서부에 지어지고 있는 첨단 신도시 ‘네옴’의 디지털 생태계를 담당하는 네옴 테크 앤 디지털이 개인 데이터 관리 앱과 메타버스 ‘XVRS’ 플랫폼 등에 10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하고, 인도네시아 물류 기업인 J&T가 파트너사들과 함께 20억 달러(약 조 4천억 원)를 투자해 중동·북아프리카 지역 본부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기조연설에서 발표된 투자 계획 및 이니셔티브를 모두 합치면 64억 달러 규모다.
스타트업 창업 지원 및 투자 유치 정책도 발표됐다. 사우디 왕립과학기술원은 사우디판 ‘실리콘밸리’를 키우기 위한 스타트업 지원 플랫폼을 발표했다. 이름부터 실리콘밸리의 빅 테크 기업들의 출발이 ‘차고’였다는 일화들에서 따와 ‘더 개러지(차고): 스타트업 디스트릭트’라고 지었다. 일종의 스타트업 단지 조성 계획으로, 사무공간 제공은 물론, 스타트업을 위한 각종 지원과 훈련을 제공할 예정이다.
이러한 스타트업의 해외 진출을 돕기 위한 제도인 ‘DCO 스타트업 패스포트’도 도입한다. DCO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하여 바레인, 요르단, 쿠웨이트, 나이제리아, 오만,파키스탄, 르완다 등 8개 국가가 참여하고 있는 다국적 디지털 경제 협력기구다. ‘DCO 스타트업 패스포트’가 도입되면 기업들이 DCO 회원국 사이의 입국 절차를 간소화하고 각종 지원을 제공해 해외 진출 문턱이 대폭 낮아진다. 사우디와 나이지리아를 시작으로 점차 적용 국가를 확대할 예정이다.
이번 행사에서 사우디 정부가 제시한 의제를 관통하는 핵심은 ‘비전 2030’이었다. 비전 2030은 지난 2016년부터 사우디가 추진하고 있는 장기 국가 개혁 계획이다. 사우디 실권을 잡고 있는 모하메드 빈 살만 왕세자의 주도하에 사회적으로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는 동시에, 경제 다각화로 석유 의존도를 낮추는 걸 목표로 하고 있다. 사우디는 이를 통해 계획 이전 55%였던 비석유 GDP를 지난 2020년 59%까지 끌어올린 바 있다. ICT 분야는 이 중 6%, 디지털 경제 분야는 18%를 차지한다. 사우디 정부는 이번 행사로 ICT 분야를 포괄하는 디지털 경제 육성을 비전 2030의 한 축으로 보고 있다는 걸 대외적으로 알리고, 전 세계 국가와 기업, 투자자들의 협력 및 투자를 끌어내겠다는 계획이다.
이번 행사의 또 다른 주연은 사우디텔레콤(Saudi Telecom Company, STC), 에티하드 에티살랏(모빌리) 같은 현지 통신 서비스 회사나 화웨이, 에릭슨, 노키아 같은 글로벌 통신장비 업체들이었다. 이들은 대규모 전시관을 차리고 5G 통신 인프라를 기반으로 한 스마트 시티나 스마트 팩토리를 비롯한 각종 솔루션부터 인공지능, 가상현실, 증강현실 등 최신 기술을 과시했다.
디지털 경제의 초석이 되는 게 통신 인프라인 만큼 사우디 정부와 통신 관련 기업들의 협력이 두드러진 모양새다. 나와프 D. 알호샨 사우디아라비아 정보통신기술부 차관보는 취재진에게 사우디가 가장 많이 투자한 분야가 통신 인프라라고 언급했다. 이번 행사에서도 사우디 통신정보위원회(The Communications and Information Technology Commission, CITC)는 차세대 와이파이인 ‘와이파이 6E’ 도입으로 최대 2.4Gbps의 대역폭을 확보하고, 저궤도(Low Earth Orbit) 위성을 활용해 외딴 지역까지 인터넷 연결성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올해 상반기에는 5G 주파수 경매도 열 예정이다.
사우디는 이를 통해 사우디의 GDP 성장에 와이파이가 기여하는 규모를 지난해 47억 달러(약 5조 6천억 원)에서 오는 2030년까지 180억 달러(약 21조 6천억 원) 이상, 5G가 기여하는 규모는 지난해 14억 달러(약 1조 7천억 원)에서 150억 달러(18조 75억 원) 이상으로 증가하길 기대하고 있다. 주최 측 집계에 따르면 전 세계 80여개 국가에서 10만 명이 이번 행사에 참가했으며, 전시 출품 기업은 700여 곳이 넘는다. 첫해 행사로서는 역대 최대 규모라는 설명이다. 이번 행사로 이뤄낸 성과도 분명하다. 주최 측은 이번 행사에서 발표되거나 성사된 투자 건이 2억 6600만 달러(약 3200억 원) 규모라고 밝혔다.
다만 여러 아쉬움도 남는다. 먼저 행사 규모에 비하면 구경거리가 부족하다는 인상이었다. 행사 성격 자체가 CES나 MWC, 베를린 국제가전박람회(IFA)와 달리 소비자 대상 제품이 아닌 국가나 기업 대상 솔루션에 치중했다는 걸 고려해도 그렇다.
전시관 대부분은 새로운 기술이나 제품, 서비스를 선보이기보다는 이미 보유하고 있는 기술이나 솔루션을 소개하는 데 그쳤으며, 전시 형태도 단순히 소개 영상을 틀어놓는 정도에 그치는 곳이 많았다. 전시관보다는 사업 논의를 위한 미팅 룸에 가까웠다. 그나마 눈에 띄는 전시관을 차린 업체는 뜻밖에도 중국 화웨이였다. 화웨이는 자사 솔루션들을 시각화한 미니어쳐로 전시관을 꾸미며 관람객들 눈길을 끌었다.
참가한 기업들의 기조연설도 새로운 제품 공개나 기술 발표 대신 다소 구체성이 떨어지는 비전 제시에 그쳤다. 그마저도 이미 알려진 내용이나 소비자 가전 전시회에서 소개했던 내용을 재확인하는 수준이었다. 발표 대부분이 중동·북아프리카라는 지역성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도 한계로 지적할 만하다. 국제 행사를 표방하는 만큼, 향후 행사에서는 전 세계 이목을 집중시킬 글로벌 기업들의 독점적 발표를 더 많이 유치할 필요가 있어보인다.
글 / IT동아 권택경 (tk@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