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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열전: 야나이 다다시] 시골 양복점을 세계 최대 패션 브랜드로... 유니클로 창업자의 성공 비결

강일용

[IT동아 강일용 기자] 야나이 다다시(柳井正)는 스페인의 자라, 스웨덴의 H&M과 함께 세계 3대 SPA(Speciality retailer of Private label Apparel) 브랜드로 꼽히는 유니클로(패스트 리테일링)의 창업자이자 현 회장이다. 그의 재산은 163억 달러에 달한다. 작년 손 마사요시 소프트뱅크 회장에게 밀려 조금 빛이 바랬지만, 2016년까지 일본 최고의 부자이기도 했다.

(SPA란? 미국 브랜드 ‘갭(GAP)’이 1986년에 선보인 사업모델로 제품 기획, 디자인, 생산, 제조, 유통, 판매까지 의류 생산 및 유통이라는 전 과정을 하나의 회사가 맡는 의류 전문점을 말한다. 싼 가격에 제품을 대량 유통할 수 있고, 소비자의 요구에 재빨리 대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패스트푸드와의 유사성에 주목해 ‘패스트 패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유니클로
<유니클로 창업자 야나이 다다시 /출처 유니클로>

유니클로는 단조로운 디자인의 티셔츠와 바지를 시작으로 다양한 형태의 의류를 나름 합리적인 가격에 판매하는 브랜드다. 시가총액이 46억 달러에 달하는 이 회사는 전 세계 3160여 개의 매장에서 약 18조 원의 매출을 거뒀다(2016년 기준. 유니클로는 회계연도가 8월 마감이라 아직 2017년 매출이 나오지 않았다). H&M보다는 크고, 자라보다는 작은 SPA 업계의 2위 업체다. SPA라는 사업 방식을 처음 고안해낸 갭은 유니클로에 밀려 업계 4위에 불과하다.

양복점을 물려 받은 젊은 사업가... 패스트패션이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리다

야나이 회장은 작은 옷 가게였던 유니클로를 34년 만에 전 세계에서 손 꼽히는 의류 생산, 유통 회사로 성장시킨 인물이다. 야나이 회장이 자그마한 옷 가게를 굴지의 의류 업체로 성장시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 정신과 작은 성공에 만족하지 않는 자기 혁신이 바로 그 답이다. 올해로 69살을 맞는 야나이 회장은 "사람들은 의류를 사양 산업이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사양 산업이란 것은 없다. 사양 기업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1949년 일본 야마구치 현 우베 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태어난 해에 신사복을 판매하는 자그마한 매장을 열었다. 아버지가 시작한 이 자그마한 매장이 바로 유니클로의 시작이다. 야나이 회장은 평범하게 자랐다. 실리콘밸리의 천재 CEO들에게서 볼 수 있는 비범한 일화 같은 것은 없다. 물론 그도 나름 수재였다. 일본의 명문 사립대 와세다대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했다. 수 많은 일본의 CEO와 경제인을 배출한 일본에서도 손 꼽히는 명문 학부다. 하지만 대학에 입학한 야나이 회장은 좋은 대학을 졸업해 엘리트 코스를 밟는다는 인생 설계에 회의감을 느끼게 된다. 공부는 뒷전이고 당시 대학생들에게 유행한 히피와 록음악의 영향을 받았다. 일을 하지 않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할 정도였다.

유니클로
<유니클로 창업자 야나이 다다시 /출처 동아일보DB>

1971년 학교를 졸업한 야나이 회장은 일본의 슈퍼마켓 브랜드인 '자스코(현 AEON 그룹, 미니스탑을 운영 중이다)'에 입사했다. 하지만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았던 것인지 9개월 만에 사표를 내고 고향으로 돌아오고 만다. 하지만 야나이 회장의 아버지는 고향에 돌아온 그를 반겼다. 자신이 23년 동안 운영해온 양복점 ‘오고리(小郡) 상사’를 야나이 회장에게 물려주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야나이 회장은 아버지의 이러한 제안을 거부하고 아무런 일을 하지 않는 등 방황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아버지는 강요가 최선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야나이 회장에게 200만 엔이라는 엄청난 거금(약 1950만 원. 지금도 거금이지만 1970년대 초라는 점을 감안하자)을 주고 세계 여행을 다니며 견문을 넓혀보라고 권유했다.

야나이 회장은 훗날 이 여행이 자신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고 밝혔다. 전 세계의 다양한 문화를 접하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영어의 중요성을 통감했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야나이 회장이 유니클로 내에서 직원들에게 영어 교육을 제공하는 것을 강하게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야나이 회장은 MBA 과정을 밟기 위한 유학을 떠날 것인가 여자 친구와 결혼을 할 것인가 기로에 서게 되었다. 그는 결혼을 선택했다. 결혼을 하려면 안정적인 직장이 있어야 했다. 결국 그의 나이 23세인 1972년 아버지의 상점에 입사해 후계자 수업을 받게 된다.

오고리 상사는 시골마을의 상점치고는 제법 규모가 있었다. 하지만 더 성장하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야나이 회장은 자신이 대학교에서 배운 경험을 살려 회사의 문제점을 하나씩 고쳐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변화는 오랜 시간 일해온 직원들에게 반갑지 않은 일이었다. 야나이 회장의 아버지와 함께 오랜 기간 상점을 운영하던 직원들은 새파랗게 젊은 야나이 회장의 간섭을 거부하다가 결국 의견 차이를 이유로 회사를 그만두었다.

유니클로
<1990년대 중반 일본 유니클로 /출처 동아일보 DB>

남은 직원은 1명 뿐이었다. 직원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야나이 회장은 그들이 하던 일을 모두 떠맡아야 했다. 하지만 전화위복이라고 했던가. 야나이 회장은 상품조달, 진열, 판매, 재고관리 등 의류 사업을 위해 반드시 알아둬야 할 점들을 이때 배울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을 하며 그는 기존 의류 유통방식의 치명적인 문제점을 파악할 수 있었다. 재고와 반품되는 물건을 걱정해 처음부터 옷 가격을 높게 책정한다는 점이었다. 옷이 비싼만큼 손님들은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면 충분히 사업 규모를 키울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문제는 방식이었다. 야나이 회장은 해외로 눈을 돌렸다. 1980년대 미국에서 인기를 끌던 의류업체 갭과 패스트푸드 브랜드 맥도날드의 사업 모델에서 그 답을 찾았다. 햄버거처럼 소비자 기호에 맞는 의류를 빠르게 만들어 유통한다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패스트 푸드처럼 사용자들에게 빠르고 저렴하게 접근할 수 있는 '패스트 패션'이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이다.

오고리 상사가 22개에 달하는 매장을 보유할 만큼 성장한 1984년 야나이 회장은 신사복 대신 패스트 패션을 판매하는 매장을 설립하자고 아버지를 설득했다. 히로시마에서 패스트 패션을 판매하는 매장인 '유니크 클로싱 웨어하우스(Unique Clothing Warehouse)', 줄여서 유니클로 1호점을 차렸다. 야나이 회장은 기존 의류점들이 상상도 하지 못한 방식으로 상품 판매에 나섰다. 소비자들이 쉽고 빠르게 제품에 접근할 수 있도록 매장 문을 오전 6시에 열었고, 수많은 옷을 선반에 진열해 소비자들이 이를 직접 입어보고 상품을 구매할 수 있도록 했다. 소비자들을 제품을 구매하도록 권유하는 점원들은 모두 없앴다. 소비자들이 슈퍼마켓이나 패스트 푸드점에 온 것과 같은 감각으로 옷을 구매할 수 있게 했다. 제품 가격도 1000엔 전후로 책정해 소비자가 부담없이 구매할 수 있도록 했다. 급성장하는 매출을 보며 야나이 회장은 옷은 패션일 뿐만 아니라 생필품이기도 하다는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UNI'C'LO가 아니라 UNI'Q'LO가 된 사연? 히트 상품으로 매출 쑥쑥

1988년 야나이 회장은 유니클로의 상호를 등록했다. 원래 등록하려던 상호는 유니크 클로싱의 약자인 'UNICLO'였지만, 등록 담당자의 실수로 C를 Q로 쓰는 바람에 'UNIQLO'가 되었다. 상호를 등록한 후 야나이 회장은 유니클로의 성장이 정체된 것에 대한 해법을 찾기 위해 갭과 홍콩의 패션 브랜드 '지오다노'를 벤치마킹하기로 결심했다. 지오다노가 갭이 추구하는 SPA 모델로 성공한 것을 보고, 유니클로에도 SPA 모델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SPA는 유통 단계를 줄여 제품 가격을 낮출 수 있지만, 재고와 반품에 따른 손실을 모두 떠안아야 한다는 문제점이 존재한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려면 제품 판매량을 더욱 확대해야 한다. 때문에 야나이 회장은 1991년 사명을 오고리 상사에서 패스트 리테일링으로 바꾸면서 제품 판매량 확대를 위해 유니클로의 매장을 매년 30개씩 늘리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유니클로
<1990년대 중반 일본 유니클로 /출처 동아일보 DB>

지오다노는 단순히 갭의 사업모델을 벤치마킹하지 않고 자사 나름의 장점을 더했다. 갭이 추구하는 옷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창고형 매장에서 벗어나 제품 디자인 및 진열 방식, 매장 구조 등을 세련되게 배치해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야나이 회장은 이를 보고 자신의 패스트 패션 전략에 문제는 없지만, 성공을 위해 세부적인 전술을 다듬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유니클로에 지오다노 같은 세련됨을 더하기로 결정했다.

1990년대 들어 일본의 거품 경제가 사그라들면서 쓸만한 옷을 저렴한 가격에 대규모로 판매하는 유니클로는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야나이 회장은 패스트 패션의 유통에 걸리는 시간을 줄이는데 더욱 집중했다. 하나의 옷을 기획해서 생산한 후 판매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2주일 수준까지 줄였다. 1994년 유니클로는 일본에만 100여개의 매장을 설립하며 일본의 대표 패스트 패션 브랜드로 자리매김한다. 그해 회사를 히로시마 증권거래소에 상장하며 대규모 패션 기업으로 거듭났다. 1998년에는 일본 패션의 중심지인 하라주쿠에 플래그십 매장을 내며 당당히 입성했다. 히로시마 출신 싸구려 패션 브랜드가 일본 패션 브랜드의 중심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때마침 유니클로를 일본의 국민 브랜드로 만들어준 히트 상품이 등장했다. 바로 '후리스(fleece)'다. 일본의 화학 기업 도레이와 협력해 출시한 후리스는 1900엔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가볍고 따듯한 보온 능력을 보여줘 단숨에 스테디셀러로 등극했다. 1998년 200만 장, 1999년 850만 장, 2000년 2600만 장이 판매되는 등 유니클로가 성공을 거두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유니클로는 먼저 옷을 만들고 색을 입히는 방식을 도입해 재고 상황에 맞춰 생산량을 도입할 수 있었고, 덕분에 1900엔이라는 저가를 실현할 수 있었다. 후리스의 성공을 바탕으로 유니클로의 매출은 급격히 늘어났다. 1992년 143억 엔 수준에 불과했던 매출은 1998년 831억 엔 수준으로 늘어났고, 2000년에는 2290억 엔, 2001년에는 4186억엔으로 증가했다. 매년 두 배씩 성장한 것이다. 일본 시장의 성공에서 자신감을 얻은 야나이 회장은 2001년 영국을 시작으로 해외 시장에 진출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두 가지 큰 문제에 직면한 유니클로... 야나이 회장이 내린 결정은?

2000년대에 들어 유니클로는 성장 정체와 고객 선호도 감소라는 두 가지 문제에 직면했다. 이를 돌파하기 위해 야나이 회장이 내린 결정은 제품의 고급화와 히트 상품 발굴, 그리고 마케팅을 통한 브랜드 가치 상승 전략이었다.

2001년에 들어 유니클로는 일본내 매장만 500여개를 보유하게 되었다. 성장하려면 해외 진출이 필수였다. 영국 런던을 시작으로 중국 하와이 미국 뉴욕 등 18개국에 1000여개의 매장을 열었다. (한국의 경우 2004년 롯데쇼핑과 합자회사인 FRL코리아를 설립하는 형식으로 진출했다. 약 180개의 매장과 1조 2377억 원의 매출(2017년 기준)을 거두는 등 전 세계에서 손 꼽히는 진출 성공 사례다.)

유니클로

하지만 해외 진출은 생각만큼 순탄치 않았다. 영국에선 매출 부진으로 한때 21개에 달했던 매장을 8개로까지 줄여야했고, 중국 사업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야심차게 진행한 야채 판매 사업이나 인수, 합병(M&A)도 제대로된 성과를 내지 못했다. 2002년 3442억 엔에 도달했던 매출은 2003년 3098억 엔으로 하락했다.

야나이 회장은 초심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옷 생산 및 유통에만 집중하기로 결정하고 제품 품질 강화와 히트 상품 재발굴에 나섰다. 2004년 9월 야나이 회장은 일본 일간지에 유니클로는 더 이상 저가 정책을 추구하지 않겠다는 내용에 광고를 냈다. 실제로 저가 정책을 그만둔다는 것이 아니라, 저가 정책 때문에 고객들이 유니클로 제품의 품질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에서 내린 결정이다. 당시 유니클로는 최고급 캐시미어 스웨터와 오리털 다운 자켓 등을 판매하고 있었지만, 저렴한 가격 때문에 소비자들이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후 미국 뉴욕을 시작으로 도쿄, 파리, 밀라노 등 패션의 중심지에 R&D 센터를 설립해 우수한 디자이너를 기용했다. 전 세계에서 모인 디자이너들을 활용해 현재 패션 트랜드에 맞는 상품을 기획하고, 고객의 요구를 분석했다. 이를 바탕으로 각국 시장에 맞는 옷을 선보일 수 있었다.

도레이와 협력해 후리스의 뒤를 잇는 히트 상품 발굴에도 나섰다. 1만개가 넘는 샘플 제품을 만든 끝에 보온성을 강조(실제 기능에 대한 논란은 있으나)한 의류 제품인 '히트텍'을 출시했다. 히트텍은 전 세계적으로 1억 장이 넘게 팔리면서 후리스의 뒤를 이은 유니클로의 히트 상품으로 등극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2009년 유니클로는 자라, H&M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SPA 업계 빅3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유니클로가 직면한 또 한 가지의 문제는 브랜드 가치 하락이었다. 2000년대 말 유니클로는 일본 내에서 '싸구려'라는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유니클로를 입고다니는 것이 부끄럽다는 뜻을 담은 '유니바레(ユニバレ)'라는 신조어가 생겨날 지경이었다. 당시 일본 내에서는 유니클로는 패션에 관심이 없거나 옷을 못 입는 사람이나 구매하는 브랜드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일본의 패션잡지들이 특집기사로 유니클로를 입은 것을 티내지 않는 방법이라는 기사를 게재할 정도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야나이 회장은 유니클로는 결코 싸구려가 아니며 패션 리더들도 입고다니는 감각적인 브랜드라는 마케팅 플랜을 진행했다. 유명 모델을 광고 모델로 기용하고, 어떤 옷에든 매칭할 수 있는 기본적인 디자인에 집중해 이미지 개선에 나섰다. 이러한 노력 끝에 2010년대에 들어 누구나 부담없이 입을 수 있는 브랜드 수준으로 인식으로 끌어올리는데 성공했다.

이어지는 글: 유니클로의 경쟁력...실패도 빨리 하고, 빨리 수습해서, 또 도전하라

글 / IT동아 강일용(zero@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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