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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인물열전] 애플을 세운 타고난 개발자, 스티브 워즈니악

이상우

[IT동아 이상우 기자] 애플 컴퓨터가 만든 애플 I은 대표적인 초기형 개인용 컴퓨터 중 하나다. 1976년 4월 11일 출시된 이 기계는 키보드와 모니터 등의 입출력 장치를 갖췄고, 독특하게 나무로 된 케이스를 사용했다. 1977년 출시한 애플 II는 1970년대 말부터 개인용 컴퓨터 시장의 부흥을 이끈 주역이 됐으며 이후 등장한 개인용 컴퓨터의 UX에 많은 영향을 줬다.

애플1 컴퓨터

애플 컴퓨터의 첫 번째 제품인 애플 I <출처: (CC BY-SA) Ed Uthman (originally posted to Flickr as Apple I Computer)@Wikimedia Commons>

사실 애플 I이 등장하기 전에도 *개인용 컴퓨터는 존재했다. 하지만 애플 I과 애플 II가 등장한 이후 기업에서 데이터나 복잡한 계산을 처리하기 위해 쓰이던 컴퓨터가 개인의 책상 위에 올라올 수 있게 됐고, 이후 HP나 IBM 등이 개인용 컴퓨터를 내놓으면서 애플과 경쟁했다.

*제록스 팔로알토 연구소는 1973년 GUI를 적용한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 제록스 알토를 개발했다.

애플이라는 기업 이름을 들었을 때 우리 머리에 떠오르는 인물은 스티브 잡스다. 하지만 애플에서 개인용 컴퓨터 개발을 담당했던 인물은 애플의 공동 창립자이기도 한 스티브 워즈니악(Stephen Gary Wozniak)이다.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 <출처: Computer History Museum>

스티브 워즈니악이 처음으로 개인용 컴퓨터 개발에 관한 꿈을 꾸었던 것은 그가 대학생 시절, HP에서 근무할 때였다. 스티브 워즈니악은 HP의 경영진에게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어보자고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당시 HP의 주요 사업은 기업용 컴퓨터, 도면 출력용 대형 프린터 등 산업용 제품군이 주류를 이뤘으며 개인용 컴퓨터에 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이는 비단 HP뿐만 아니라 IBM 등 당시 업계의 주류였던 기업 역시 마찬가지였다.

스티브 워즈니악

컴퓨터 역사 박물관 혁신 전시관 개관 기념식에 참석한 스티브 워즈니악 <출처: (CC BY-SA) vonguard from Oakland, Nmibia (Uploaded by YMS)@Wikimedia Commons>

워즈니악이 HP를 떠나기로 결심한 것은 스티브 잡스를 만난 이후이다. 스티브 잡스는 중학생이던 시절에 스스로 고주파 측정기를 조립하던 중 부품이 부족하자 HP 창업자 중 한 사람인 윌리엄 휴렛에게 전화를 걸어 남는 부품이 있으면 달라고 요청한다. 이러한 진취성에 감명받은 윌리엄 휴렛은 스티브 잡스에게 주파수 측정기 생산 라인에서 잠깐 일해 보지 않겠냐고 제안했고, 스티브 잡스는 3년 뒤인 1971년 HP를 방문한다.

윌리엄 휴렛과 데이비드 팩커드

HP 창립자인 윌리엄 휴렛과 데이비드 팩커드 <출처: Computer History Museum>

HP에서 함께 일하는 여름 동안 잡스와 워즈니악은 친분을 쌓았다. 이들은 홈브루 컴퓨터 클럽(Homebrew Computer Club)이라는 컴퓨터 동호회에서 활동하면서 부품, 회로, 컴퓨터 장치 조립 등의 정보를 교환했다. 당시 이 동호회에는 프로그래머인 존 드레이퍼, 휴대용 컴퓨터를 개발한 아담 오스본 등의 인물이 활동하고 있었다. 홈브루 컴퓨터 클럽은 실리콘밸리의 해적(드라마, 1999)이나 잡스(영화, 2013) 등에서는 개인용 컴퓨터의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단체로 묘사했다.

홈브루 컴퓨터 클럽의 잡스와 워즈니악

홈브루 컴퓨터 클럽의 스티브 워즈니악과 스티브 잡스 <출처: Computer History Museum>

잡스와 워즈니악은 이 활동을 통해 1976년 3월, 개인용 컴퓨터 시제품을 만들었다. 모토로라의 저가형 프로세서인 MOS 6502를 탑재했고, 전반적인 회로 설계를 단순화해 단가를 생산성 및 단가를 효율화했다. 워즈니악은 이를 HP에 보여주고 대량 생산하자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애플1의 메인보드를 쥐고 있는 워즈니악

애플 I의 메인 보드를 들고 있는 스티브 워즈니악 <출처: woz.org>

생산 공장과 판매처를 찾지 못했던 워즈니악과 잡스는 직접 부품을 모아 수작업으로 제품을 만들어야 할 상황에 놓였다. 애플 I 컴퓨터가 독특하게 나무로 제작됐고 생산 대수가 적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던 중 홈브루 컴퓨터 클럽의 회원 중 하나인 폴 테렐이 관심을 보였고, 자신의 매장인 '바이트 샵'에서 이를 팔고 싶으니 납품해줄 것을 요청한다.

애플2 컴퓨터로 작업 중인 잡스와 워즈니악

애플 II로 작업 중인 워즈니악과 잡스 <출처: Computer History Museum>

잡스와 워즈니악은 충분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아타리에서 근무하던 론 웨인의 투자를 요청했고, 이렇게 잡스, 워즈니악, 웨인 등 3명은 애플 컴퓨터를 설립한다. 애플 I의 출발은 순조롭지 못했고, 론 웨인은 자신이 받기로 한 애플 주식의 10%만 받고 회사를 떠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입소문을 타고 애플 I을 찾는 사람이 늘었다. 약 10개월 간 200여 대를 팔았으며, 잡스와 워즈니악은 8,000 달러 정도의 이익을 얻었다.

이듬해인 1977년, 스티브 워즈니악은 애플 II 컴퓨터를 개발한다. 애플 I의 인기에 자신감을 얻은 스티브 잡스는 다음 제품을 대량생산하기로 마음먹는다. 애플 II는 이전 세대보다 프로세서의 성능을 높이고, 컬러 모니터 출력 기능을 갖췄고, 이밖에 여러 확장 슬롯으로 메모리 용량을 높일 수 있었다. 애플 I의 경우 스티브 잡스가 나무 케이스를 수공으로 깎아 만들었지만, 애플 II 부터는 플라스틱 케이스를 적용했기 때문에 사실상 스티브 워즈니악 혼자서 제작한 제품이다.

애플2 컴퓨터

개인용 컴퓨터 시장의 부흥을 이끈 애플 II 컴퓨터 <출처: (CC BY-SA) Rama@Wikimedia Commons>

이렇게 탄생한 애플 II는 애플 I보다 두 배 정도 비싼 제품이었지만, 당시 시중의 컴퓨터 중에서는 아주 저렴한 편에 속했고 폭발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잡스와 워즈니악은 큰 돈을 손에 넣게 됐다. 애플 II는 1993년까지 계속 생산됐고 누적 판매량은 500만 대에 이른다.

이처럼 승승장구하던 잡스와 워즈니악은 1980년대 들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1981년 2월, 워즈니악은 경비행기 추락사고를 당한다. 이 사고로 얼굴과 머리를 크게 다치고 5주 동안 기억상실증에 시달리게 된다. 당시를 기록한 글에 따르면 워즈니악은 자신의 이름은 물론,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고 한다. 워즈니악은 기억이 돌아온 이후 애플로 돌아가지 않고 대학으로 돌아가 다시 공부를 시작한다.

멜버른 컨벤션 센터에서 연설 중인 스티브 워즈니악

멜버른 컨벤션 센터에서 연설하는 스티브 워즈니악 <출처: (CC BY-SA) Nichollas Harrison@Wikimedia Commons>

이와 비슷한 시기인 1981년 8월에는 IBM이 PC 5150을 내놓으면서 개인용 컴퓨터 시장에 뛰어든다. 개방형 아키텍처를 내세우며 IBM 이외의 제조사가 만든 주변기기나 소프트웨어도 쉽게 호환할 수 있었고, 곧 개인용 컴퓨터 시장의 주류가 됐다. 여기에 위기를 느낀 스티브 잡스는 스테디 셀러였던 애플 II를 등한시하고 새로운 컴퓨터에 매달린다. 제록스 알토와 제록스 스타에서 영감을 얻어 GUI를 적용한 애플 리사 컴퓨터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리사 컴퓨터는 혁신적인 GUI와 마우스를 이용하는 입력방식 등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비싼 가격과 이를 감당하기 부족한 본체 성능 때문에 시장에서 그리 많이 팔리지는 않았다.

애플 리사 컴퓨터

애플 리사 컴퓨터 <출처: (CC BY-SA) Rama@Wikimedia Commons>

스티브 워즈니악이 애플로 돌아왔을 때 그는 크게 실망한다. 성적이 그리 좋지 않았던 제품을 홍보하는 데만 몰두하고, 효자와도 같은 애플 II를 홀대하는 모습을 보고 처음 회사를 세웠을 때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고 느낀 것이다.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제품을 홍보하고 파는 것이 아니라 설계하고 제작하는 일에 더 가까웠다. 더 이상 애플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느낀 워즈니악은 1985년 애플을 떠난다.

애플을 떠난 워즈니악은 초등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은사(恩師)가 한 아이의 일생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던 그는 초등학생부터 중학생을 대상으로 컴퓨터 교실을 열었다. 애플을 떠났지만 애플과의 관계도 계속 유지했다. 워즈니악은 여전히 애플 직원으로 등록돼 월급을 받았으며, 스티브 잡스가 죽기 전까지도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았다.

WWDC에서 만난 잡스와 워즈니악

애플 세계 개발자 회의(WWDC)에서 만난 워즈니악과 잡스 <출처: woz.org (photo by Alan Luckow)>

워즈니악은 현재 일선에서 물러나 자원봉사와 교육사업에 전념하고 있다. 지난 2015년 9월에는 한국을 방문해 '기술, 미래, 그리고 인류'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펼쳤다. 이 자리에서 워즈니악은 개인 및 공공분야에 관한 혁신을 두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워즈니악은 이 토론회에서 현재 학교 구조의 가장 큰 문제는 여러 명의 학생이 똑같은 교실에 앉아 똑같은 수업을 받는 것이라며, 가장 이상적인 형태는 교사과 학생이 1:1이 돼서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인재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미래에 컴퓨터가 선생님을 대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스티브 워즈니악

2015년 9월 18일 한국을 방문한 스티브 워즈니악 (Stephen Gary Wozniak, 1950.8.11.~) <출처: IT동아>

사실 스티브 워즈니악이라는 인물은 스티브 잡스를 비판할 때 주로 언급되고는 한다. 잡스가 사업적 관점에서 독단을 가졌다면, 워즈니악은 순순한 개발자로 컴퓨터 만들기에만 몰두했다. 워즈니악은 전자 기기를 설계하고 이를 제작하는 일을 중시했고, 잡스는 이를 상품화하고 사업화하는 수환이 좋았던 인물이다. 각자 애플을 통해 이루려는 바는 달랐지만, 이런 대조적인 성격 덕분에 오늘날의 애플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글 / IT동아 이상우(lswoo@itdonga.com)

※본 기사는 네이버캐스트(http://navercast.naver.com/)의 'IT 인물 열전' 코너에도 함께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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