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일상이 된 꿈의 용량 - 기가(Giga)
기가는 십억(109)이라는 뜻의 접두어로 짧게 G라는 기호로 쓰며, 그리스어 ‘Gigas(거대한)’에서 유래했다. 우리에게는 기가바이트, 기가헤르츠 등 디지털 디바이스의 성능을 표시하는 단위로 익숙하다. 하지만, 기가는 한때 이론적으로만 존재하는 실현하기 힘든 아주 큰 단위로 여겨진 적도 있다. 그만큼 컴퓨터 및 관련 기술이 아주 빠른 속도로 발전해 왔다는 뜻일 것이다. 컴퓨터 발전의 역사를 설명하는 특별한 접두어, ‘기가’에 대해 살펴보자.
비트와 바이트, 킬로와 메가에 담긴 의미
1981년은 IBM사에서 ‘PC(Personal Computer)’를 첫 출시한 기념비적인 해다. IBM의 PC는 현재 널리 사용하는 개인용 컴퓨터의 원조로, 첫 모델인 ‘IBM 5150’은 4.77MHz(메가헤르츠)의 속도로 작동하는 CPU(중앙처리장치)와 최대 256kB(킬로바이트)까지 확장 가능한 메모리를 갖추고 있었다. 지금 기준으로는 매우 보잘것없지만, 당시로서는 상당한 고사양·고성능으로 평가 받았다. 그런데 이 즈음 당시 IBM PC에 운영체제를 공급하던 마이크로소프트 사의 빌 게이츠(William H. Gates) 회장이 “PC에 640kB 용량의 메모리가 탑재된다면 이는 모든 사람에게 더할 나위 없이 충분한 용량이 될 것”이라는 발언을 했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후 빌 게이츠는 이런 발언을 한 적 없다고 부인했지만, 아무튼 1981년 기준으로 640kB는 상당히 큰 용량이었던 것이 사실이었고, 현재에 이르러 컴퓨터의 성능은 당시 컴퓨터 업계에서는 미처 예측하지 못할 정도로 급속히 발전해 왔다. 참고로 2012년 현재 출시되는 PC는 640kB를 훌쩍 뛰어넘어, 4,194,304kB에 해당하는 4GB(기가바이트), 혹은 그 이상의 메모리가 탑재되어 있다.
컴퓨터에서 다루는 데이터의 양을 표기하는 최소 단위는 ‘비트(bit)’로, 이는 0 혹은 1의 값을 가진다. 컴퓨터에서는 0과 1만으로 구성된 2진수의 조합으로 여러 가지 데이터를 저장한다. 만약 10진수 기준 ‘4’라는 데이터를 저장하고자 한다면 이는 ‘100’이라는 2진수로 환산되므로 총 3비트의 저장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컴퓨터 등장 초기에는 다루는 데이터의 용량이 적어서 비트 표기만으로도 문제가 없었지만, 이후 대용량 데이터를 사용하게 되면서 비트보다 상위 단위인 바이트(byte)를 더 많이 사용하게 된다. 1바이트는 8비트에 해당하며 ‘1B’로 표기하곤 한다(1b는 1비트).
바이트 표기만으로도 소화가 힘들 정도로 데이터 양이 커진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바이트 앞에 ‘킬로(kilo, 약자 k)’라는 접두어를 붙이게 됐다. 이 접두어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킬로는 본래 10진수 기준 1,000을 뜻하지만, 컴퓨터에서는 2진수를 사용하므로 1kB(킬로바이트)는 210바이트, 즉 1,024바이트에 해당된다. 이후 1980년대에 들어서는 킬로의 상위 개념인 메가(mega, 백만) 단위를 많이 쓰기 시작했다. 이 역시 같은 2진수로 계산, 1MB(메가바이트, 즉 220바이트)는 1,024kB에 해당된다.
다만 하드디스크의 경우, 실제 용량보다 큰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2진수가 아닌 10진수 단위로 계산한 용량을 제품명에 표기하는 것이 관행처럼 자리잡았다. 따라서 하드디스크의 1kB는 1,024바이트가 아닌 1,000바이트로 계산된다. 예를 들어, 10GB로 표시된 하드디스크의 실제 용량은 약 9.31GB(10,000,000,000바이트)인 것이다. 때문에 PC 운영체제 상에서는 하드디스크 용량이 실제 용량보다 적게 표시되는 것이 정상적이다.
킬로, 메가 등의 단위는 데이터의 양 뿐만 아니라 CPU의 클럭(clock: 동작 속도)를 표기할 때도 쓰인다. 이는 1초당 CPU 내부에서 몇 단계의 작업이 처리되는지를 측정해 이를 주파수 단위인 ‘Hz(헤르츠)’로 나타낸 것이다. 1971년에 등장한 인텔 4004 CPU의 클럭은 440kHz 였지만, 1982년에 나온 인텔 80286 CPU의 클럭은 6MHz로 향상, CPU 역시 메가 급의 성능을 갖추게 되었다. 참고로 저장장치의 데이터양은 2진수로 환산해 접두어를 붙이지만 CPU의 클럭은 일반적인 10진수를 사용한다. 따라서 1kHz는 1,000Hz, 1MHz는 1,000kHz에 해당된다.
‘메가’의 시대에서 ‘기가’의 시대로
‘메가’는 1980년대까지 대용량, 고성능의 대명사처럼 인식되었다. 현재 PC에서 사용하는 유사한 형태의 하드디스크는 1980년에 처음 등장했다. 씨게이트(Seagate) 사에서 내놓은 이 제품의 용량은 5MB로, 당시 PC에서 쓸 수 있는 저장장치 중에 최대 용량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였다. 또한, 1988년, 일본의 세가(Sega) 사는 자사의 최신 비디오 게임기의 고성능을 강조하기 위해 ‘메가드라이브(Mega Drive)’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메가보다 한 단계 위의 접두어인 기가(giga: 십억, 1기가바이트는 1,024MB)도 존재했지만, 이는 1980년대까지는 이론적으로만 존재하는 아득한 미래형 단위처럼 여겨졌다. CD(Compact Disc)가 시장에 처음으로 등장한 1982년, 당시 언론에서는 650~ 700MB를 저장할 수 있는 이 디스크를 ‘용량 제한이 거의 없는 꿈의 매체’라고 추앙했으며, CD 한 장만 있으면 도서관 한 채 분량에 해당하는 방대한 데이터를 담을 수 있다는 과장된 수사를 매번 덧붙이곤 했다.
하지만 기술이 점차 발전하면서 ‘기가’ 단위는 꿈이 아닌 현실이 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 중반에 이르러 GB(기가바이트) 단위의 용량을 갖춘 하드디스크가 PC 시장에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고, 2000년대 초반부터 출시된 PC들은 하드디스크뿐 아니라 주기억장치용 메모리의 용량 역시 GB 단위로 향상되었다.
1GHz의 벽을 넘어라
CPU의 기가급 진입은 더 극적이었다. 1990년대 말을 즈음하여 PC업계에서는 1GHz(1000MHz)를 돌파하는 CPU가 언제 출시될 것인지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특히 CPU 업계의 선두주자인 인텔, 그리고 인텔의 강력한 라이벌로 떠오른 AMD는 경쟁사보다 먼저 1GHz의 벽을 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결국 2000년, AMD가 인텔보다 한 발 먼저 1GHz로 작동하는 ‘애슬론(Athlon)’ CPU를 출시했고, 이는 세계 최초로 기가급 클럭을 실현한 PC용 CPU로 기록된다.
1GHz라는 벽을 넘은 이후에도 CPU 업체들은 클럭 높이기 경쟁을 그치지 않았다. 특히 AMD에게 ‘1GHz 최초 돌파’라는 타이틀을 빼앗긴 인텔은 더욱 의지가 강했다. 인텔은 2000년에 고클럭 구현에 유리한 ‘펜티엄 4(Pentium 4)’ CPU를 내놓고 거의 매 분기마다 2배로 클럭을 높인 CPU를 내놓았으며, 2004년에는 무려 3.8GHz로 작동하는 펜티엄4를 출시하기도 했다.
다만 이러한 무리한 클럭 경쟁은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높은 클럭을 얻은 대신 전력 소모와 발열도 그에 못지 않게 심해졌기 때문이다. 결국 2005년을 즈음하여 CPU 업체들은 무한대로 클럭을 높이는 경쟁을 포기하는 대신, CPU의 코어(Core, CPU 내 핵심 요소)를 여러 개로 늘려 성능을 강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이 때문에 2006년 이후부터는 오히려 이전 CPU에 비해 클럭 수치가 낮은 2개의 코어를 갖춘 듀얼 코어(Dual Core), 4개를 갖춘 쿼드 코어(Quad Core) 형태의 CPU가 등장해 시장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기가’라는 접두어에 담긴 땀과 정열, 그리고 애환
2012년 현재, 기가급의 용량이나 동작속도를 발휘하는 하드디스크나 메모리, CPU 등은 흔히 볼 수 있는 부품이 되었다. 이제는 PC는 물론, 스마트폰 같은 휴대용 기기에도 기가급 성능의 부품이 들어가곤 한다. 한때는 꿈 같은 수치라고 생각되던 ‘기가’ 단위가 어느덧 일상이 된 것이다. 컴퓨터 업계는 이미 기가급을 넘어 테라(tera: 1조, 기가의 1000배)급을 지향하고 있다. 특히 하드디스크 업계에서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는데, 2007년, 히타치(Hitachi) 사는 1TB(테라바이트) 용량의 하드디스크를 출시했으며, 2011년 씨게이트 사는 4TB의 하드디스크를 내놓아 판매를 시작했을 정도다.
저장장치나 CPU의 기가급 진입은 공교롭게도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를 즈음해 동시 다발적으로 실현되었다. 이 때문에 일부 컴퓨터 전문가들은 21세기를 기가급 컴퓨팅이 본격화된 기념비적인 시기로 보기도 한다. ‘기가(giga)’는 꿈을 현실로 바꾸기 위해 노력한 기술자들과 관련 기업들의 땀과 정열, 그리고 애환이 듬뿍 깃들어있는 특별한 접두어라 할 수 있다.
글 / IT동아 김영우(pengo@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