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에 처한 ‘인텔 인사이드’와 ‘무어의 법칙’
컴퓨터 반도체의 성능이 18개월 주기마다 2배로 향상된다는 ‘무어의 법칙’은 참으로 오랫동안 IT업계의 진리처럼 여겨졌다. 1965년에 이 법칙을 처음 매놓은 고든 무어(Gordon Earle Moore)가 1968년에 설립한 인텔(Intel) 사는 이러한 무어의 법칙을 충실히 따르며 매번 고성능 프로세서를 발표, 1980년대 이후부터는 자타가 공인하는 PC 업계의 맹주가 되었다.
그런데 요즘 인텔은 딜레마에 빠졌다. 다름 아닌 무어의 법칙 때문이다. 인텔은 여전히 PC 시장에 고성능 프로세서를 개발, 공급하며 무어의 법칙을 고수하고 있지만, 최근 IT시장 전반의 흐름은 이 법칙의 가치를 의심하게 하고 있다.
‘탈PC’ 시대를 맞아 의미가 퇴색된 ‘무어의 법칙’
몇 년 전만해도 ‘컴퓨터’라면 당연히 데스크탑이나 노트북 같은 PC를 이야기하는 것이었고, 졸업선물, 입학 선물로 최신 PC는 최고의 인기를 끌었다. 게다가 새로운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얼리어답터’들은 인텔에서 새로운 프로세서가 나올 때마다 비싼 비용을 감수하면서 기존 PC를 업그레이드하거나 새 PC를 장만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사뭇 다르다. IT관련 뉴스를 보면 항상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컴퓨터 같은 신세대 컴퓨터의 소식으로 채워져 있으며, PC 관련 소식은 헤드라인과는 거리가 멀다. 인텔의 고성능 PC용 프로세서가 새로 나온다는 소식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는 이미 일반인보다는 매니아에 가까운 사람일 것이다. 대중들의 관심은 이제 ‘성능’ 보다는 ‘편의성’에 몰리고 있으며, 이는 무어의 법칙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있다.
사라지고 있는 ‘Intel Inside’ 문구
이러한 사례는 최근 광고 시장을 보더라도 확연히 드러난다. 2000년대 초 까지만 하더라도 인텔 특유의 ‘빰~빰빰빰빰~’하는 광고 효과음, 그리고 ‘인텔 인사이드(Intel inside)’ 로고와 함께 등장하는 광고가 TV를 켤 때 마다 나오곤 했다. 하지만 요즘에는 PC 관련 광고 자체를 거의 볼 수 없을뿐더러, 가뭄에 콩 나듯 나오는 PC 광고에서도 인텔 인사이드 로고 대신 MS 윈도 7 운영체제의 로고가 대신 나오곤 한다. 고성능 프로세서가 탑재된다 해서 소비자들이 PC를 사는 시대가 아니라는 반증이다.
인텔코리아(대표: 이희성)에서는 이에 2011년 초, 인기 아이돌 그룹인 ‘소녀시대’를 영입해 로고송을 노래하는 광고(Visual Dream)를 제작하고, 유명 프로게이머 ‘테란의 황제, 임요환’ 선수를 홍보대사로 임명하는 등, ‘인텔 인사이드’ 마케팅을 강화하고자 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최근 삼성전자에서 집중 홍보하고 있는 ‘슬레이트 PC’에도 분명 인텔 프로세서가 탑재되어 있지만, 여전히 인텔 인사이드 로고 및 광고 효과음은 TV 광고에 노출되지 않는다. 게다가 PC 시장까지 위축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이후 인텔의 시장 영향력이 이전보다 약화될 수도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시행착오를 거듭한 인텔의 모바일 시장 도전
물론 인텔이 이러한 흐름을 벗어나기 위한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2008년, 인텔은 모바일 기기에 특화된 저전력 프로세서인 ‘아톰(Atom)’을 출시하며 많은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인텔은 아톰을 내놓으며 ‘MID(Mobile Internet Device)’라는 새로운 개념의 모바일 컴퓨터의 규격도 함께 발표했다. MID는 인터넷에 특화된 초소형 컴퓨터로, 인텔은 이 기기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시장에서 MID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정작 아톰 프로세서가 가장 많이 쓰인 제품은 MID의 곁가지 정도로 생각하며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넷북(NetBook)’이었다. 넷북은 기존의 노트북과 형태가 유사하면서 크기와 전력소모, 그리고 가격만 줄인 제품으로, 기존 노트북의 비싼 가격이 부담스러웠던 알뜰파 소비자들을 중심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애당초 아톰은 노트북에 적용하기에는 성능이 너무 낮은 프로세서였다. 넷북을 일반 노트북처럼 쓰고자 했던 소비자들은 느린 처리 속도에 실망했고, 2010년 즈음에 이르자 넷북의 인기는 거짓말처럼 수그러들었다. 그리고 이 때를 즈음해 스마트폰과 태블릿 컴퓨터가 새로운 돌풍을 일으키며 노트북이 차지하던 모바일 컴퓨터 시장을 차츰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인텔은 아톰 프로세서를 스마트폰에 탑재하려는 시도도 한 바 있다. 그 결과물이 2010년에 나온 아톰 기반의 신형 스마트폰 플랫폼인 ‘무어스타운(Moorestown)’, 그리고 인텔과 노키아가 협력해 개발한 모바일 운영체제인 ‘미고(MeeGo)’였다. 이후 LG전자에서 무어스타운과 미고를 탑재한 스마트폰의 시제품을 발표하는 등 많은 기대를 모았지만, 이 제품은 결국 시장성이 없다는 이유로 출시가 취소되고 만다. 당시 스마트폰 시장은 이미 ARM(암) 기반의 프로세서와 구글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를 탑재한 제품으로 대세가 굳어졌기 때문. 인텔의 ‘탈PC’ 시도가 다시 한번 시련을 맞이한 것이다.
울트라북에 인텔의 미래를 걸 수 있을까?
물론 이런 와중에도 PC 시장에서 인텔은 압도적인 입지를 지키며 모바일 시장에서의 부진을 상쇄하고 있었다. 특히 2011년에 출시한 2세대 코어 프로세서(코드명 샌디브리지)는 변함 없는 고성능을 인정 받으며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그리고 인텔은 최근 2세대 코어 시리즈를 이용한 새로운 경량 노트북 플랫폼인 ‘울트라북(UltraBook)’을 발표, 이전의 아톰 넷북에서 얻은 교훈을 반성함과 동시에 PC 시장의 확대를 동시에 노리고자 했다. 울트라북은 극단적으로 얇은 두께와 가벼운 무게를 추구하면서 상당히 높은 성능을 기대할 수 있는 신세대 노트북 플랫폼이다.
하지만 울트라북의 미래 역시 아직까지는 썩 밝지 않다. 2011년 중반부터 울트라북이 본격적으로 판매를 시작했지만 초기 판매량은 예상을 밑돌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2011년 11월, 대만의 대표적인 PC 제조사인 아수스와 에이서는 울트라북의 출하 수량을 40% 가까이 줄인다고 발표했다. 가장 큰 원인은 비싼 가격 때문이다. 인텔은 울트라북을 발표하면서 1,000달러(115만 원) 미만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실제로 시장에 나온 울트라북 중에서 그 정도로 저렴한 제품은 거의 없었다.
몇몇 울트라북 제품은 무려 2,000달러(230만 원) 이상에 달하는 가격표를 달고 나오기도 했다. PC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고성능과 얇은 두께를 실현하면서 가격까지 낮추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정도 되면 인텔이 아톰 넷북에서 얻은 교훈이 무엇이었는지 무색할 정도다. 게다가 울트라북의 컨셉은 이미 2008년에 애플에서 내놓은 ‘맥북 에어’ 흉내내기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나온 상태다.
기후 변화를 맞이한 공룡, 인텔
인텔은 올 2012년부터 새로운 모바일 프로세서인 메드필드(Medfield)를 출시하고 다시 한번 스마트폰과 태블릿 컴퓨터 시장을 노크할 예정이다. 메드필드는 특히 성능 면에서는 현존하는 어떤 모바일 프로세서보다 강력하다고 한다. 다만 소비 전력 측면에서는 경쟁 상대인 ARM 계열 프로세서에 비해 불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배터리 유지 시간이 중시되는 모바일 컴퓨터 시장에서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성장 동력을 잃어가고 있는 PC 시장과 울트라북의 불확실한 미래, 그리고 모바일 컴퓨터 시장의 급속한 성장은 ‘인텔 인사이드’와 ‘무어의 법칙’의 가치를 점차 퇴색시키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인텔은 앞으로도 한동안 IT 업계를 대표하는 기업 중 하나로 군림하겠지만, 예전과 같은 압도적인 영향력은 기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IT공룡’ 인텔이 얼마나 기민한 움직임을 보일 수 있을지 업계는 주목하고 있다.
글 / IT동아 김영우(pengo@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