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보다는 지스타가 소중하죠" 레이저 민 리앙 탄 대표
좋아하는 게임의 발매일과 회사의 중요한 행사가 겹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게이머로서는 난감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게임을 택하자니 회사가 울고, 회사를 택하자니 게임이 운다. 게이밍 주변기기 전문업체 레이저(Razer)의 민 리앙 탄(Min-Liang Tan, 이하 민) 대표가 이 난관에 봉착했다.
지난 11월 12일, 민 대표는 한국에서 열리는 국제게임박람회 지스타 2011에 레이저의 대표 자격으로 참석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 날은 민 대표가 손꼽아 기다렸던 게임 ‘스카이림(Skyrim)’이 발매되는 날이기도 했다. 둘 중 하나는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 평소 게임을 좋아하기로 유명한 민 대표는 고민에 빠졌다. 그는 트위터에 “지스타 2011에 참석하는 대신 스카이림을 하기 위해 병가를 내야 할 것 같다”는 우스갯소리를 남기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민 대표는 지스타 2011을 택했다. 최근 한국에서 레이저의 인지도가 급격히 상승하고 있고, 레이저가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는 신제품에 대해 할 말도 많았기 때문이다. 만일 지스타 2011이라는 행사가 없었다면 그를 당분간 볼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스카이림 이외에도 ‘모던워페어3’, ‘배틀필드3’ 등 그가 점 찍어놓은 게임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는 정말 게임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오랜만이다. 스카이림을 포기하다니, 힘든 결정을 한 것 같다.
게이머라면 항상 겪는 일이 아닐까 싶다. 게임을 좋아하긴 하지만 레이저 CEO로서 책임져야 하는 부분이 더 크기에 지스타 2011을 택했다. 일할 때 열심히 일하고 게임할 때 열심히 게임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사실 ‘월드오브워크래프트: 리치왕의 분노’가 출시됐을 때는 병가를 내긴 했지만. (웃음)
레이저 본사 및 지사에는 자유롭게 게임할 수 있는 근무 환경이 갖춰져 있다. 일과 게임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좋은 곳이다. ‘for gamers, by gamers’가 우리의 철학이지 않나. 게임을 좋아하더라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으니 문제 없다고 본다.
‘통제’에 대해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최근 한국에서는 청소년들의 게임 과몰입을 방지하기 위해 심야 시간 접속을 차단하는 셧다운제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게임에 유독 강한 중독성이 있다기보다는) 무엇이든 지나치면 좋지 않은 것 같다. 가령 음식물도 지나치게 섭취하면 중독이라고 할 수 있고, 성생활이 과도하면 타이거 우즈처럼 섹스중독이 되기도 한다. 결국 자기가 통제할 수 있는 문제다. 정부가 주도하는 강제적인 정책보다 가족과 함께 자발적으로 해결하려는 문화를 형성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지스타 2011은 어땠나? 게임을 포기할만한 가치가 있었나?
지난 해에도 느낀 것이지만, 한국의 게이머들은 정말 열정적이다. 더구나 올해에는 하드웨어에 대한 관심도 부쩍 늘어난 것을 느낀다. 부스를 쭉 둘러봤더니 절반 가량은 우리 레이저 제품을 쓰고 있었다. 이제 한국 게이머들도 하드웨어가 중요한 차이를 만든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 같다. 시장 자체가 성장하고 있어 고무적이다.
이제 레이저가 선보인 신제품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올해 레이저는 PC게임용 동작인식기기 ‘레이저 히드라(Razer Hydra)’를 출시했다. 이미 닌텐도 ‘위(Wii)’나 마이크로소프트 ‘키넥트(Kinect)’ 등 비디오게임기 부문에서는 동작인식기기가 전세계적인 대세를 이루고 있지만, 온라인게임 위주인 한국에서는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온라인 게임에 레이저 히드라를 지원할 계획이 있나?
레이저 히드라는 인텔과 합작해서 만든 동작인식기기다. 그래서 개발 초기부터 인텔 프로세서를 기반으로 하는 패키지 게임을 염두에 뒀다. 현재 ‘포탈2’, ‘모던워페어2’, ‘폴아웃3’, ‘문명5’ 등 총 125개 유명 게임을 지원한다. 물론 이 중에는 ‘리그오브레전드’와 같은 온라인게임도 있으며, 앞으로 더 많은 게임을 지원할 예정이니 기대해 달라.
인텔과의 합작품이 하나 더 있다. 레이저가 ‘세계 최초의 진짜 게이밍 노트북’이라고 자신하며 출시한 ‘레이저 블레이드(Razer Blade)’다. 주변기기 기업인 레이저가 노트북을 내놓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갑자기 노트북 시장에 도전장을 던진 것인가?
갑자기 내놓은 것이 아니다. 공개적으로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애플 엔지니어 출신들로 이루어진 PC업체 OQO를 인수하고 2007년부터 차근차근 게이밍 노트북을 준비해왔다. 최근에는 2008년 인텔의 소형 노트북 ‘어반맥스’ 개발에 참여했던 대만 설계팀을 영입하기도 했다. 내부에서 꾸준히 개발에 몰두했고, 이제 완벽하게 만들어냈다고 생각해서 출시를 결정한 것이다. 참고로 레이저는 전세계에서 가장 큰 시스템 엔지니어링 그룹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레이저 블레이드가 최초의 게이밍 노트북은 아니다. 이미 시중에는 수많은 게이밍 노트북이 나와 있고, 레이저 블레이드는 후발주자에 가깝다. 레이저 블레이드가 다른 제품들과 차별화되는 부분은 무엇인가?
레이저 블레이드는 현존하는 게이밍 노트북 중 가장 얇고 가볍다. 기존의 게이밍 노트북은 너무 무거워서 책상 위에 놓고 쓸 수밖에 없었다. 휴대할 수 없다면 노트북으로서의 의미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레이저 블레이드는 맥북 프로보다 얇고, 기존의 게이밍 노트북보다 절반 가량 가벼워 휴대성이 뛰어나다.
최근 내 일정은 매우 빡빡하다. 지스타 2011이 끝나면 바로 중국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 집에 갈 수가 없으니 오늘 출시된 스카이림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럴 때 레이저 블레이드가 있다면 여행을 하면서도 게임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기존의 무거운 게이밍 노트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레이저의 클라우드 서비스인 ‘레이저 시냅스 2.0(Razer Synapse 2.0)’ 공개를 목전에 두고 있다. 레이저 시냅스 2.0에 대해 자세한 설명 부탁한다.
레이저는 2007년 마우스 하드웨어 안에 프로파일을 저장할 수 있는 서비스 ‘레이저 스냅스 1.0’을 발표한 바 있다. 이 서비스는 프로게이머들에게는 물론이고 하나의 PC를 여러 사람이 공유해야 하는 상황에서 인기가 많았다. 이후 다른 주변기기 기업들도 이와 비슷한 서비스를 내놓았지만, 레이저 스냅스의 모방품에 불과하다. 미국에서는 “다른 기업들이 1년 후에 무엇을 할지 알고 싶다면 현재 레이저가 무엇을 하는지를 지켜봐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레이저 스냅스 2.0은 전작의 불편함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이제 하드웨어 대신 클라우드에 프로파일을 저장할 수 있다. 따라서 평소 사용하던 PC 대신 다른 PC를 사용하게 될 때도 자신이 쓰던 프로파일을 불러올 수 있다. 예를 들어 PC방에 가면 마우스를 셋팅하기 위해 5분에서 10분 정도 할애해야 한다. 하지만 앞으로 레이저 스냅스 2.0을 사용하게 된다면 10초 안에 모든 준비를 끝낼 수 있다.
아직은 레이저 스냅스 2.0의 베타 서비스를 운영 중이다. 아마 12월쯤 정식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그리고 지금은 ‘나가 (Naga)’ 마우스만 지원하지만, 향후 선보이는 제품 전부에 이 서비스를 적용할 것이다. 물론 사용료는 없다.
지난 기자간담회에서 국내 e스포츠 산업에 500만 달러를 후원하겠다고 공언했다. 현재 구체적으로 실행중인 계획이 있는가?
현재 크게 세 부분으로 집행하고 있다. 첫 번째는 프로게이머 후원이다. 임요환 선수와 ‘스타크래프트2’ 게임단 팀 리퀴드 (Team Liquid), 에프엑스오픈(FXOpen)을 지원하고 있다. 이 선수들이 전세계로 진출할 수 있도록 돕고 있으며, 반대로 해외 선수들도 한국에 올 수 있도록 지원하기도 한다. 앞으로 더 많은 프로게이머를 후원할 계획이다.
두 번째로 프로게이머들이 활동할 수 있는 이벤트를 후원한다. 현재 한국의 GSL( 글로벌 스타크래프트2 리그)을 비롯해 WCG, IEM 등의 대회를 후원하고 있다. 훌륭한 프로게이머들이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주기 위해 노력 중이다.
세 번째는 커뮤니티 지원이다. 프로게이머들의 경기를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유튜브 커뮤니티를 운영하고 있다. 레이저의 공식 페이스북을 통해서도 프로게이머들의 소식을 알리고 있는데, 회원 수가 100만 명이 넘는다.
마지막으로 2012년 레이저의 한국 활동 계획에 대해 간단하게 말해달라.
한 해 동안 정말 바쁘게 일했다. 레이저의 이름을 알리고, e스포츠 후원에 많은 투자를 했다. 이를 통해 레이저 제품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는 것을 확인했다. 성과가 높았다고 확신한다.
2012년에는 한국 시장에 맞게 현지화한 제품을 내놓을 계획이다. 또 더 많은 프로게이머와 게임단을 후원하려고 한다. 커뮤니티 활동도 꾸준히 전개할 것이다.
지스타 2011은 레이저의 헤드셋 ‘엘렉트라(Electra)’를 쓴 사람들로 녹색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민 대표가 지스타에 보낸 애정에 한국 사람들이 화답하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부디 내년 지스타는 그가 좋아하는 게임 출시일과 겹치지 않기를. See you again, Min-Liang Tan!
글 / IT동아 서동민(cromdandy@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