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올 땐 막귀였지만 나갈 땐 아니란다 - 젠하이저 MM80
손잡이조차 확보하기 힘든 출퇴근길 만원 지하철. 인터넷 서핑으로 지루함을 달래려 아이폰을 꺼내 보지만, 작은 덜컹거림에도 주체할 수 없는 저질 균형감각에 이내 포기하고 만다. 손잡이를 놓는 순간 뒤쪽의 누군가가 잽싸게 손잡이를 차지하게 될 테고, 의지할 곳 없는 나는 로데오 경기를 하는 것처럼 뒤뚱거리며 힘겹게 인터넷을 하게 되겠지. 차라리 아이폰을 주머니에 넣고 편하게 음악을 듣는 것이 백배 낫겠다. 이것이 내가 아이폰을 주로 MP3 플레이어로 사용하는 이유다.
사실 아이폰은 꽤 괜찮은 MP3플레이어다. 음장(sound effects)이 국내 사용자들에게 다소 심심하게 느껴진다는 불평은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별도의 MP3플레이어를 구입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따지고 보면 아이폰은 미디어 플레이어인 아이팟의 형제 아닌가. 아이팟 시리즈를 통해 쌓은 애플의 명성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바로 아이폰에 번들로 제공되는 이어폰이다. 번들 이어폰이 다 그렇겠지만, 아이폰용 번들 이어폰은 색상과 디자인이 아이폰에 어울린다는 점만 제외하면 형편없는 수준이다. 물론 평소에 MP3플레이어 기능을 잘 활용하지 않거나 ‘나는 막귀라서 차이를 잘 모르겠다’고 생각한다면 번들 이어폰으로도 족하다. 하지만 막귀에서 벗어나 소위 ‘귀가 트인’ 음악 마니아들에게는 번들 이어폰이란 아이폰과 자신의 귀를 모욕하는, 당장 휴지통으로 직행해야 할 몹쓸 존재다.
번들 이어폰을 처단했다면 그 자리에 걸맞은 쓸만한 이어폰을 구해야 한다. 어떤 제품이 좋을까. 일단 막귀용인 저가 제품과 입문용인 중저가 제품을 제외한다. 또한 음악으로 밥벌어먹고 살지 않는 이상 최고급 제품은 비용이 부담스럽다. UE(Ultimate Ears), 닥터드레(Dr. Dre), 소니 또는 젠하이저(Sennheiser)의 제품 중 비교적 대중적인 지지를 받는 20~30만원 대 제품이 적합할 것이다.
이 중 젠하이저(Sennheiser)의 커널형 이어폰인 MM80을 살펴보려고 한다. MM80은 아이폰 및 아이팟에 최적화된 이어폰으로, 젠하이저만의 스테레오 사운드 기술을 통해 우수한 음질을 제공한다. 아이폰에 최적화됐다고 하는 이유는 아이폰을 콘트롤할 수 있는 리모콘이 탑재됐기 때문인데, 이 리모콘을 제외하면 3.5mm 표준규격 단자를 지원하는 다른 모든 기기에서도 동일하게 사용할 수 있다. 가격은 2011년 6월 기준 인터넷 최저가 20~30만원대다.
내 은밀한 곳을 침범하는 그대, 커널형 이어폰
솔직히 말하면, 본 리뷰어는 일반적인 형태의 이어폰만 써봤다. 커널형 이어폰을 오래 사용해본 것은 이 MM80이 처음이다. 커널형 이어폰 특유의 이물감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리뷰어에게만 해당하는 일은 아니고, 상당수의 사람들이 커널형 이어폰에 거부감을 표하는 게 사실이다. 이 MM80이 IT동아에 도착했을 때를 떠올려보면, 처음엔 상당수의 사람들이 젠하이저 제품이라는 점에 관심을 보였지만 커널형 이어폰이라는 것을 안 이후에는 정색한 얼굴로 뒤돌아 섰다. 사진을 찍기 위해 동원한 모델 역시 귓구멍 깊숙이 침범하는 이어폰의 무례함(?)에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모두 일반형 이어폰만 사용해봤던 막귀들이다. 혹시라도 자신의 은밀한 귓구멍에 (자신의 손가락을 제외하고) 무엇인가 들어오는 것에 불쾌함을 느끼는 사람들이라면 무턱대고 MM80을 사기 전에 커널형 제품에 대한 적응과정을 거치길 바란다.
일반형 이어폰은 번들을 포함한 중저가용 제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이다. 소리를 내는 본체에 해당하는 유닛(unit)을 귓구멍 바깥쪽에 끼우는 형태를 띠고 있다. 외부의 소리를 완전히 차단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어폰을 끼고 있는 상태에서도 대화를 할 수 있다.
커널형 이어폰은 유닛을 귓구멍에 깊숙이 밀어넣어 외부 소음을 차단하는 방식이다. 집중도를 높여주지만 외부의 소리를 거의 들을 수 없어 야외활동 시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다. 또한 귓구멍 안쪽이 꽉 차는 듯한 착용감이 불편하다고 호소하는 사람들도 있다.
업무 특성상 주위 사람들과 끊임없이 의사소통을 할 일이 많은데, 이 MM80 때문에 본의 아니게 나만의 음악 세계에 빠져 있는 일이 잦았다. 큰 소리로 부르다 못해 자리로 직접 찾아와 어깨를 두드리는 일은 부지기수, 다들 회의실로 이동했는데 리뷰어 혼자 아무것도 모르고 사무실에 남아 있던 일도 다반사였다. 사실 착용감이나 소음 차단에 관해서는 사람에 따라 일반형을 선호하기도, 커널형을 선호하기도 한다. 어느 쪽이 더 좋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고, 개인적인 취향에 맞는 제품을 선택하는 것이 좋겠다.
참고로 MM80에는 다양한 크기의 슬리브가 포함돼 있다. 귀에 꽂았을 때 개인적으로 가장 편안한 슬리브로 교체해서 사용하면 된다.
멋스러운 차도남에 적합, 단 허리는 길어야 한다
디자인은 나무랄 데 없다. 전체적으로 검은색을 띠고 있으며, 은색 메탈느낌 소재로 처리한 유닛 부분에는 젠하이저 로고가 박혀 있다. 혹시나 젠하이저 로고를 이용해 허세를 부릴 요량은 일찌감치 접는 게 좋다. 며칠 동안 젠하이저 이어폰을 낀 채로 대중교통을 이용했지만, 리뷰어의 귓구멍에 눈을 바짝 붙이는 수고를 하면서까지 상표를 확인하는 사람은 없었다. 좀 더 보여주고 싶은 열망이 강한 사람에게는 이어폰 대신 로고가 커다랗게 박혀 있는 헤드폰을 구입하는 것을 추천한다.
기본적인 착용 방식은 귓바퀴를 따라 한 번 돌리는 것이다. 이는 조깅이나 사이클과 같은 야외활동 시 이어폰이 빠지지 않도록 안전하게 고정하기 위한 것이다. 탈착이 가능한 이어후크를 끼워 사용하면 더욱 안정감을 높일 수 있다. 물론 이 방식이 불편한 사용자들은 일반적인 이어폰처럼 사용할 수도 있다.
줄은 약간 뻣뻣하다. 아무래도 보관 시 엉킴을 방지하기 위한 것 같다(사실 이 정도의 중고급형 이어폰은 같이 동봉되어 있는 케이스에 넣어서 보관하는 것이 좋다). 줄 길이는 왼쪽과 오른쪽이 동일한 Y 형태로, 번들 이어폰과 같다. 번들 이어폰의 경우 리모콘이 너무 위에 위치해 셔츠 칼라와 부딪치거나 소음을 발생시키기도 했는데, MM80의 경우 그런 일은 없었다. 정상적으로 착용했을 경우 리모콘이 가슴 한가운데 놓이기 때문에 음량 및 곡 순서를 조절하기에도 편하고 소음이 발생하지도 않았다.
다만 1.3 미터에 달하는 길이가 거슬린다. 길어도 너무 길다. 번들 이어폰을 사용하면 바지 앞주머니에 아이폰을 넣었을 때 활동하기에 무리가 없는 적절한 길이가 확보되는데, MM80의 케이블은 한참 남아 치렁치렁하게 달고 다녀야 한다. 독일 사람들은 한국 사람보다 허리가 긴 것일까? 아니면 독일 사람들은 아이폰을 건빵바지 주머니에 넣는 것일까?
이 외에도 인플라이트 어댑터(In-flight adapter)가 번들로 제공돼 비행기내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 제품을 사용하는 동안에는 비행기를 탈 일이 없어서 직접 사용해보지는 못했지만, 없는 것보다야 있는 것이 좋을 듯 싶다. 다만 어댑터 하나 달랑 있다고 MM80이 여행에 적합하다고 말하기는 좀 민망하지 않을까(박스에도 ‘MM80 Travel’이라고 새겨 있다).
막귀 탈출에 경배하라
이제 음질을 테스트할 차례다. 최근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나는 가수다’ 음원이 좋겠다. 참고로 이어폰 에이징(새 이어폰의 진동판을 길들이기 위해 다양한 음악을 틀어놓은 채로 두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이어폰 에이징이 별 의미 없다는 이야기도 있고, 기존에 사용하던 이어폰과 동일한 조건 하에서 음질을 비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음원을 아이폰에 내려 받고, MM80을 연결하고, 재생버튼을 누르고, 이내 감동의 도가니에 빠졌다. 평소 막귀로 통하는 리뷰어지만 확실한 음질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이소라 누님의 노래는 마음을 흔들었고, 임재범 형님의 노래는 영혼을 움직였다. 누군가는 소파에서 뒹굴면서 ‘나는 가수다’를 보다가 임재범의 ‘여러분’을 듣는 순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자세를 고쳐 앉고 들었다는데, 이 MM80으로 들었다면 차려 자세라도 했을 기세다.
전체적인 소리는 풍성했고, 특히 낮은 베이스 부분이 더욱 무겁게 들렸다. 소리의 차이를 글로 표현하기 애매한 부분이지만, 베이스 소리가 과장되게 부풀려진다기보다는 깨끗하고 선명하게 들렸다. 또한 커널형 이어폰 특성상 외부의 소음을 거의 완벽하게 차단해주기 때문에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드디어 막귀에서 탈출한 것일까. 이게 플라시보 효과인지, 진짜 음질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게 된 것인지 확언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계속해서 저가형 이어폰만 썼다면 알 수 없었을 미지의 세계에 다가선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문제는 가격, 너무 찰지구나
MM80의 음질과 성능이 뛰어나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이는 본 리뷰어를 포함해 전 세계의 많은 리뷰어들이 높은 점수를 주고 있는 부분이다. 다만 문제는 가격이다. 전문가용이 아닌 일반 사용자용 제품 치고 꽤 비싼 제품이다. 이제 갓 막귀를 졸업하고 이어폰 세계에 입문하는 초보자들에게는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제품인 것은 맞다. 하지만 일단 MM80의 세계에 들어서면, 막귀였던 사람들도 나갈 땐 막귀가 아니게 될 것이다. 누구나 위시리스트에 이 제품을 올려놓고 ‘누군가 선물해줬으면’ 하고 바라지 않을까.
글 / IT동아 서동민(cromdandy@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