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사와 유통사, 상생의 길은 없는가?
한 제품이 생산자의 손을 떠나 소비자의 손에 도착하기까지 많은 유통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사실은 기본 상식이다. 물론 생산자가 온라인 쇼핑몰 등을 통해 소비자와 직거래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몇 단계의 유통 과정을 거쳐 소비자에게 최종 전달된다. 아무리 좋은 제품이라고 할지라도 판로가 없으면 소용없기 때문에, 생산자들과 유통업자들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상생해 나간다.
서로 대등한 위치에서 파트너십을 맺으면 좋겠지만 사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누군가 칼자루를 쥐면 누군가는 칼날을 쥐어야 하는 법, 생산자가 ‘갑’, 유통업자가 ‘을’이 되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생산자가 ‘을’, 유통업자가 ‘갑’이 되는 경우도 있다. 이를 테면, 월드스포츠 중계권을 따내기 위해 방송 3사가 치열한 출혈 경쟁을 벌이는 것이 전자에 해당하고, 대형할인마트에 입점한 업체들이 직원을 파견해 할인마트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것이 후자에 해당한다. 이처럼 생산자와 유통업자의 불평등한 관계로 인해 불합리한 관행이 생겨나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IT업계라고 별반 다를 게 없다. 일반적으로 IT제품의 생산자들은 대기업이고, 유통업자들은 대부분 영세업자들이다. 따라서 힘의 균형은 생산자 쪽으로 쏠릴 수 밖에 없고 유통업자들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관행을 받아들이며 속으로 끙끙 앓는다.
2010년 말 IT동아는 용산의 한 유통업체 관계자로부터 ‘생산자가 일방적으로 총판(유통) 계약을 해지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한국벨킨에서 제품을 공급받았던 총판업체 유니셀 정보통신(이하 유니셀) 김정진 대표였다. 약 3년간 원만한 파트너십을 유지했던 양 사에게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4년간 거쳐간 총판 유통 업체만 13곳
2006년 국내에 진출한 한국벨킨은 애플 사의 IT 제품 액세서리로 유명한 컴퓨터 주변기기 전문업체다. 한국벨킨은 각 제품군별로 총판업체를 지정해 거래하고 있으며, 이 중 유니셀이 2007년부터 벨킨 인터넷 공유기를 국내에 유통, 공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난 2010년 10월, 한국벨킨이 유니셀에게 총판 해지를 통보했기 때문이다.
김 대표에 따르면 그 동안 한국벨킨을 거쳐간 총판 업체는 4년 동안 13곳에 달한다고 한다. 김 대표는 “어떤 제조사도 4년 동안 거래처를 13번이나 바꾸는 경우는 없다”며 “이렇게 자주 거래처가 바뀐 데는 한국벨킨이 ‘밀어내기’식 영업을 고수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밀어내기식 영업이란 제조사와 유통업체가 총판/유통 계약을 체결할 때, 임의로 정한 매출액 이상을 강요하고 유통업체의 재고 현황에 상관 없이 계속 다음 계약을 종용하는 것을 말한다. 판매 및 재고 처리 부담은 고스란히 유통 업체가 짊어지게 되는 셈이다. 게다가 다음 계약에서는 더 많은 수량의 제품을 입고하도록 종용해 유통 업체의 부담은 한 층 커진다. 제조사 입장에서는 유통업체에게 이런 식으로 대량의 제품을 ‘밀어내어’ 매출 총액만 올리면 그만이다.
김 대표는 계약 과정에서 ‘울며 겨자먹기’로 재고 제품을 떠안게 됐다고 말했다. 계약서에 다음 계약에 제약이 있다는 사항이 공식적으로 명기된 것은 아니지만, 한국벨킨이 요구한 ‘밀어내기’ 물량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음 계약에 문제가 생길까봐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다는 것. 김 대표는 “물론 제조사와 유통 업체 간에 이런 식으로 거래가 진행되는 게 관행이긴 하지만, 한국벨킨의 과도한 밀어내기식 영업은 타 업체와 비교해 심한 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 과거 한국벨킨과 유통 계약을 맺었던 업체 중 5개 업체에 확인해 본 결과 유니셀과 비슷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유통사가 떠안는 재고 물품
김 대표는 한국벨킨의 밀어내기식 영업으로 인해 발생하는 가장 큰 문제로 재고 처리를 꼽았다. 그는 “과거 유니셀 정보통신이 한국벨킨과 제품을 거래한 양이 절대 작은 수치는 아니다. 2008년 월 평균 1억 4,000만원씩 총 16억 6천만 원, 2009년 월 평균 1억 5600만원씩 총 18억 8천만 원을 거래해 왔다. 가장 최근인 2010년 1월부터 10월 사이에는 월 평균 2억 600만 원씩 총 20억 6,000만 원을 거래했다”라며, “작년 8월 한국벨킨은 당시 거래 중이던 총판 3곳(유니셀 포함)에 100만 달러 이상을 발주하라 요구했다. 하지만 당시 유니셀은 그전부터 처리하지 못하고 있던 벨킨 제품 재고량만 8억 정도였다. 추가 발주가 어려워 8만 달러 정도만 계약했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그 이후에 발생했다는 것이 김 대표의 설명이다. “이후 9월과 10월, 한국벨킨과 새로운 제품 계약 시 인기 제품 발주를 요구하자 해당 제품 재고량이 없다는 답변을 전해 왔다. 하지만 다른 총판 업체와는 해당 인기 제품을 거래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라며, “그리고 10월 26일 한국벨킨은 일방적으로 총판 해지 통보서를 보내 왔다”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이어서 “계약이 해지된 것은 계약상 문제 될 것은 없다. 다만 무엇 때문에 일방적으로 계약이 해지했는지 궁금하다”라고 덧붙였다.
이와 같은 제조사의 밀어내기식 영업으로 유통 업체에 쌓여 가는 재고량은 분명 문젯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특히, 한국벨킨은 2009년 11월 애플 아이폰 3Gs가 국내에 본격적으로 출시되고 난 이후부터 아이폰 주변기기를 선보이며 성장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공유기 및 공유기 어댑터 일부 제품, 노트북 가방, 아이팟 주변기기 등을 유통하는 것에 불과했다. 때문에 벨킨 제품을 찾는 소비자들이 당시에는 많지 않아 재고 처분에 애를 먹었다는 것이 김 대표와 당시 벨킨 유통 업체들의 공통 주장이다. 물론 제조사가 유통 업체가 가지고 있는 재고량에 책임을 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가 심각하다면 어떤 조치가 필요하지 않을까?
계약 해지 이후 발생하는 불량품 처리
또한 김 대표는 “계약 해지 이후 발생하는 재고량도 문제다. 계약 해지 후 11월 중순까지 남은 재고량이 2억 원 가량이다. 이들 재고 제품은 이전처럼 아이마켓, 하이마트, 하이프라자 등의 대형 판매처에 유통할 수 없기에 처리할 수 있는 여건이 마땅찮다. 이에 자체적으로 매장 판매와 온라인 판매를 진행하고 있다. 문제는 소비자가 구매한 이후 고장이 나서 A/S가 발생했을 때다. 소비자는 구매한 곳에 반품이나 수리를 원하기 때문에 계약 해지가 된 유니셀로 제품을 보내온다”라고 현 상황을 설명했다.
고장이 나서 수리 요청이 들어오는 제품을 RMA(Return Material Authorization) 제품이라고 한다. 보통 한국벨킨과 같은 해외 제조사의 경우, 제품을 시장에 유통하는 유통 업체가 일괄적으로 RAM를 처리하고 이를 추후 보고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이는 제조사와 유통사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컴퓨터 부품 중 그래픽 카드 같은 제품도 이런 방식을 일부 취하고 있다.
여기서 김 대표가 강조하는 것은 이미 한국벨킨과 공식 유통 판매 계약이 해지된 시점에 지속적으로 RMA 제품이 들어왔고 이를 유니셀에서 자체 처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제품 환불 처리가 불가능해 고장이 난 제품을 보유하고 있는 제품과 1:1 교환 형식으로 진행했기에 문제가 많았다고 토로했다. 즉 계약 파기가 된 현 시점에 지속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A/S 제품을 떠안게 될 가능성에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이 김 대표의 의견이다. 또한 김 대표는 현재 계약 파기로 떠안게 된 2억 원 상당의 재고 물품에 대한 대책을 요구했다.
한국벨킨의 입장은?
이와 관련해 한국벨킨 정윤경 차장은 유니셀 정보통신 김 대표와 입장 차이가 있다며, “지난 4년 간 자사와 거래하던 유통 업체가 13번이나 바뀌었는지는 정확히 확인을 해봐야 한다. 다만 지금까지 유통 업체와 계약을 해지할 때는 서로 합의 하에 진행되었기에 큰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라며, “밀어내기식 판매로 유통 업체가 피해를 보았다는 부분과 작년 8월 총판 3곳에 100만 달러 상당의 제품을 발주해 달라고 요청한 부분도 정확한 확인이 어렵다”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계약 해지 후 발생하는 재고량과 RMA 제품에 대해서도, “기존 거래하던 총판 업체와 계약을 해지하면서 발생하는 제품 재고는 다른 총판 업체에게 넘길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RMA 제품은 자사에서 처리하고 있다. 유니셀 정보통신과 계약 해지 시 발생한 RMA 제품도 서로 협의 중이다. RMA 제품에 대한 정확한 통계를 요구했으며, 이에 대한 보상 지원을 논의 중이다”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재판매가 되고 있는 재고 제품에 대해서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유니셀 정보통신 김 대표에게 확실히 언급한 문제다. 소비자가 유니셀 측으로 A/S와 관련해 고장이나 환불 요청을 하면 한국벨킨 공식 서비스 센터로 문의하라고 전달해 놓은 상태다. 이 자리를 빌어서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제품 A/S 처리는 한국벨킨 공식 서비스 센터가 담당하는 것이니 유통 업체가 이를 처리하지 말아 달라. 현재 거래 중인 유통 업체에도 공식 서비스 센터로 문의하도록 전달해 놓은 상태다. A/S 발생 제품은 한국벨킨이 책임지겠다”라고 강조했다.
진정한 ‘파트너’로서 상생은 불가능한가?
제조사와 유통 업체 간의 문제는 사실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유통 업체는 제조사의 발주 요청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어쩔 수 없이 거래를 유지해 나가는 경우가 많다. 소위 ‘갑과 을’의 관계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다음 거래를 위해서 손해를 감수하고도 원치 않는 제품을 발주할 수밖에 없는 처지인 것이다. 물론 제조사와 유통 업체의 관계가 모두 이와 같다고는 할 수 없다. 현재 국내 유통 업체 중에는 해외 PC 메인보드 제조사와 거래를 10년 가까이 유지하고 있는 곳도 있다. 서로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열린 마음으로 다가서면 윈윈(Win- Win)할 수 있다는 사례를 보이는 곳도 제법 많다.
‘누가 옳다’고 단정내기는 어렵다. 기업은 결국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기 때문에 사람의 감정을 대입할 수는 없다. 다만 함께 상생할 수 없을 것 같은 관계라는 것이 그저 아쉬울 뿐이다.
글 / IT동아 권명관(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