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임요환의 비상이 시작된다 - 임요환 선수 독점 인터뷰
스타크래프트가 우리나라에서 e스포츠로 정착한지 10년 남짓의 시간이 흘렀다. 1999년 투니버스 방송사 스튜디오 한 구석에서 관객도 없이 조촐하게 출발한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는 어느덧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 특설무대에서 수만 명의 관객을 동원할 정도로 크게 성장했다. 이렇게 스타크래프트가 성공하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겠지만, 그 중 한 사람만을 꼽으라면 과연 누굴 선택할 수 있을까?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을 고르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10년간 스타크래프트 판을 지켜 오며 누구보다 많은 사랑을 받았던 프로게이머, 바로 ‘테란의 황제’ 임요환(32) 선수다.
스타크래프트에서 그의 영향력은 엄청났다. 그의 팬카페에는 5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가입했고 그의 경기가 있는 무대에는 수천 명의 팬들이 몰려 들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많은 프로게이머들이 그의 게임에 영향을 받고 그와 같이 되려고 애썼다. 그는 말 그대로 스타크래프트 왕국의 황제였다.
그런 그가 모든 영예를 내려놓고 스타크래프트 왕국을 떠났다. 그리고 ‘스타크래프트2’라는 신대륙에서 새로운 출발을 다짐했다. 대체 왜 그랬을까. 왜 안정적인 길을 마다하고 불확실한 길을 택했을까. IT동아가 그 이유를 듣기 위해 임요환 선수를 직접 만나봤다.
“팀원의 승리는 대리만족일 뿐, 경기에 나가고 싶었다”
사실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몇 번의 기복이 있긴 했지만, 그는 여전히 스타크래프트에서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게임에 출전하는 횟수가 줄기 시작했다. 게다가 소속 게임단에서는 선수와 코치를 병행하는 플레잉코치를 제안했다. 선수 활동을 마무리하고 지도자를 준비할 때가 된 것이다.
승부욕이 강한 그로서는 엔트리에서 제외된다는 사실을 견디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30대 프로게이머로서 활동하겠다는 팬들과의 약속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선수라면 경기에 나가야죠. 지금까지 제가 선수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승부욕 때문이었는데, 엔트리에 밀려 경기에 나가지 못하게 되니 리그에 흥미가 없어졌어요. 물론 팀원이 대신 나가서 승리하는 것도 좋은 일이죠. 하지만 대리만족일 뿐이에요. 저는 경기에 직접 나가는 것 자체가 선수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코치직을 고사하고 다른 게임으로 전환하는 쪽을 택했다. 평소 스타크래프트뿐 아니라 여러 종목의 게임에서 활동하고 싶었던 그에게 오히려 좋은 기회였을지 모른다. 마침 클로즈베타(비공개 테스트)를 실시한 스타크래프트2(이하 스타2)를 해 볼 기회가 생겼고, 그는 자신과 맞는 게임을 찾았다고 확신했다.
“스타2는 전작보다 피지컬 매크로 조작(컨트롤/운영 능력)이 확연하게 개선돼서 저랑 맞을 것 같았어요. 전작에서는 좋은 전략을 시도했을 때 그게 통하더라도 상대방이 이를 운영으로 막아내고 역전하는 경우가 많았죠. 하지만 스타2는 정신적인 평정심만 유지하면 유리한 고지를 잃지 않고 갈 수 있어요. 때문에 전작보다 스타2에서 더 실력 발휘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벤치에 앉아있기보다 스테이지에 올라가기를 원했던 임요환은 이렇게 스타2를 통해 제 2의 프로게이머 인생을 시작하게 됐다.
든든한 지원군 얻고 심리적인 안정 찾아
스타2로 전향하는 과정에도 어려움이 많이 따랐다. 이제껏 소속 게임단이 맡아주던 일을 혼자서 다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팀원이 없어서 혼자 연습하다 보니 능률도 오르지 않고 막히는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는 스타2로 전향을 선언하면서 e스포츠협회에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자격 취소 신청서를 제출했고, 11월 3일부로 자격이 말소됐다. 스타2에서의 성공을 위해 배수진을 친 셈이다.
곤경에 빠진 그에게 든든한 지원군이 나타났다. 이전부터 국내 e스포츠 산업 육성에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인텔이 개인 후원에 나선 것. 임요환은 “프로게이머가 컴퓨터와 관련된 직업이다 보니 인텔에 믿음이 갔다”며 “좋은 성적을 내는 것으로 보답하겠다”고 밝혔다. 이제 그는 1월 13일 부로 무소속이 아닌 인텔의 이름을 달고 활동하게 된다.
또 다른 지원군은 그가 만든 ‘슬레이어스’ 클랜(동호회)과 팀 멤버들이다. 그는 11월 초 슬레이어스 클랜을 만들고 멤버 모집에 나섰다. 가입신청 조건은 다이아몬드리그 1,800점 이상으로, 총 370여 명의 지원자 중 엄격한 심사를 거쳐 최종 8명이 팀원으로 선발됐다. 그리고 변길섭, 주한진, 서경종, 정재훈, 백영민, 문성원 등 기존에 활동하던 선수 10명이 합류했다. 최근에는 2차 모집 공고를 통해 11명의 슬레이어스 팀원을 선발해 현재는 운영진을 포함 총 43명의 팀원이 활동 중이다.
“연습상대가 없어 답답했어요. 클랜을 통해 검증된 선수를 팀에 합류시키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친목을 위한 클랜이에요. 실력을 쌓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친목 클랜이 될 수 있고, 프로게이머를 지향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등용문이 되는 거죠. 참고로 여자분들 중 가입을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팀 분위기를 위해 조건 없이 가입시켜 드립니다(웃음). 정모도 할거에요.”
연습만이 살 길, 남들과 똑같은 건 의미 없어
사람들은 임요환을 천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는 지독한 연습벌레다. 자신이 정해놓은 연습량인 하루 30게임을 가능한 채우려고 노력한다. 젊은 선수들을 상대하려면 더 많이 연습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리한 연습 탓인지 그는 최근 어깨에 건염이 생겼다는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연습량을 줄일 수는 없었다. 대신 게임습관을 바꾸기로 했다. 원래 팔꿈치를 자유롭게 해야 게임이 잘 되지만 어깨를 보호하기 위해 이제는 불편하더라도 팔걸이에 팔을 걸친다. 연습게임에서 무리해서 이기기보다 한 게임이라도 더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0대가 되니 몸이 빨리 피로해지고 집중력이 사라져 걱정이에요. 20대 시절에는 아무 생각 없이 게임에만 몰두할 수 있었는데… 그 때는 군대 걱정만 하면 됐어요. 지금은 군대 걱정은 덜었지만 미래에 대한 고민이 새로 추가됐네요. 하하”
하지만 그는 지난 GSL 3차 32강전에서 ‘서울대 테란’ 최성훈에게 지고 말았다. 테란전에 강하다고 알려진 그가 패배하자 다들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이에 그는 저그전을 연습하느라 테란전을 이틀밖에 연습하지 못했다고 해명했다. 그가 저그전을 못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싶었던 것이다.
“어차피 저그한테 졌다면 폭파되는(?) 분위기였을 거예요. 차라리 테란한테 진 게 나았을지도 모르죠. 사실 그 동안 저그를 상대할 때는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이기는 게 제 컨셉이었어요. 해병/탱크 조합이 강하다고 해서 전략을 똑같이 따라 하는 건 저한테는 의미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사람들이 그런 저를 보고 자꾸 저그에 약하다고 하니까 컨셉을 변경할 수 밖에 없었어요. 과도한 질타가 선수들의 전략의 폭을 좁힐 수 있다는 점이 아쉽죠,.”
그는 GSL 3차에 대한 미련이 없다고 했다. 대신 다음 정규 시즌에서 저그를 만나면 꼭 강한 모습을 보이겠다고 약속했다.
팬들이 있기에 황제가 있다
황제 임요환의 권력은 전적으로 팬들이 있기에 가능했다. 왕권팬수설(?)인 셈이다. 항상 그를 지지해주는 팬들은 임요환과 함께 나이를 먹으며 여유로워졌다. 그와 함께 울고 웃었던 기간이 벌써 10년, 소녀팬들은 어느새 아줌마가 됐다. 그들은 이제 열광적인 환호 대신 홍삼, 떡, 쌀 등으로 그의 건강을 챙긴다. 또한 전향 이후로 새로운 팬들도 늘어나고 있다.
“스타2로 전향하면서 어린 팬들도 새로 생겼어요. 마치 스타크래프트 초창기를 보는 것 같아요. 사인은 받고 싶은데 부끄러워서 말도 못하고 주위를 서성이죠. 그러다가 누구 한 명이 용기를 내서 사인을 받으면 그제서야 쭉 줄을 서서 사인을 받아요.”
올드팬이나 신규팬이나 모두 고마운 존재지만, 임요환에게는 특별히 기억나는 팬이 있다. ‘LoveofTears’라는 아이디로 팬 사이트에 글을 남기는 ‘안지수’라는 친구다. 그는 임요환을 통해 프로게이머의 꿈을 키웠고 가끔 경기를 보러 경기장도 방문한다. 스타와 팬의 관계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좋은 형동생 사이가 됐다.
“10년 동안 슬럼프에 빠지거나 심적으로 어려울 때마다 그 친구의 글을 읽고 힘을 냈어요. 제가 다른 길로 빠지지 않고 좋은 길로만 갈 수 있게 채찍질을 해주는 좋은 친구죠.”
임요환은 안지수 군을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왜 게임을 해야 하는지 알려줘 고맙다”고 말했다. 지수군의 임요환에 대한 애정도 각별하다. 그는 임요환을 자신의 소울메이트라고 여긴다.
컴맹이라구요? 게임에 관한 시도는 많이 해봤다
한 때 ‘임요환은 컴맹’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그의 연인인 탤런트 김가연(40)이 방송에서 “임요환은 게임할 때는 멋지지만 사실 인터넷뱅킹도 할 줄 모르는 컴맹”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이 일을 두고 팬들 사이에서는 “임요환이 컴맹일 리 없다. 연인을 배려해 모르는 척 하는 것”이라는 추측까지 나왔다.
사실 그는 컴퓨터 박사는 아니지만 컴맹도 아니다. 컴퓨터 지식에 관해서는 일반인 수준일 뿐이라 말한다. 그는 “조립은 할 줄 모르지만 분해는 할 수 있다”고 웃으며, “먼지가 쌓였을 때 팬을 닦거나 메모리를 갈아 끼우는 정도는 거뜬히 처리 할 줄 안다”고 답했다.
그가 컴퓨터를 잘 다루지 못하는 이유는 어릴 때 집에 컴퓨터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식의 장래를 걱정한 부모님이 게임에 빠질까봐 컴퓨터를 들여놓지 않은 것.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컴퓨터를 갖게 된 것은 2002년 광고를 찍은 대가로 컴퓨터를 받았을 때였다. 이후 게임에 매진하느라 컴퓨터 지식을 쌓을 기회가 없었다고 한다. 컴퓨터 관련 전문 지식은 잘 모르지만, 대신 게임과 관련해서는 안 해 본 것이 없다고 한다. 이를 테면, 마우스의 경우 자체 튜닝한 제품으로 대회에서 써본 적도 있을 정도다.
그는 연인 김가연에 대해 “저보다 컴퓨터 지식이 아주 조금 나은 수준”이라며 “어차피 피차일반 컴맹”이라고 웃으며 맞받아쳤다.
연인의 내조, 방송에 보여진 것은 극히 일부일 뿐
얼마 전 케이블 채널에서 임요환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방송되면서 연인 김가연 씨의 내조가 화제가 됐다. 우스갯소리로 방송 제목을 ‘임요환의 날개’가 아니라 ‘김가연의 내조의 여왕’으로 바꿔야 한다는 말도 나올 정도다. 그만큼 그녀의 내조는 헌신적이다. 그가 게임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매니저를 자처하고 온갖 일을 도맡고 있다. 최근 감기에 편도선염까지 겹쳐 몸 상태가 매우 나빴지만 인터뷰 자리에도 동행해 애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저는 게임 하나만 잘하고 나머지는 다 못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게임만 빼고 다 잘해요. 방송에 나온 내조는 일부일 뿐이에요. 다 보여주지도 못했어요.”
그는 최근 몸이 아픈 그녀를 위해 못하는 요리 솜씨에도 불구하고 배즙을 손수 만들었다. 게임밖에 모르는 그가 연인을 위해 서툴게 배를 깎는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난다. 물론 그녀가 트위터에 남긴 표현에 의하면 ‘배의 3분의 1이 잘려나갔다.’ 하지만 예쁘게 깎은 배보다 훨씬 맛은 좋았을 게다.
우승 한 번 해보고 싶다, 진로는 그 후에 생각할래
앞으로의 목표에 대해 묻자 “프로게이머를 그만두기 전에 꼭 우승 한 번 해보고 싶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이 목표를 달성하기 전까지 조바심내지 않고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혹시 우승을 하게 됐을 때 해이해지면 팬들이 다잡아 줄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최근 인터뷰에서 35살까지 현역으로 뛰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물론 35살은 구체적으로 정해놓은 은퇴시기가 아니다. 그는 “가능하다면 40살, 50살에도 프로게이머 생활을 지속하고 싶다”는 희망을 내비쳤다. 은퇴 경기를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고 답변했다.
10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또 다시 프로게이머를 택할까?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프로게이머 생활을 하면서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당연히 (프로게이머를) 하겠다”고 말했다. 미래에 아들이 프로게이머가 되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냐는 질문에는 “흔쾌히 승낙할 수 있도록 좋은 환경을 만들어야죠”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는 천상 뼈 속 깊은 곳까지 프로게이머였다.
“슬레이어스 팀 창단을 앞두고 걱정이 좀 돼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처음으로 팀을 이끄는 거라 설레기도 하구요. 선수들을 잘 이끌어서 좋은 결과 낼 테니까 많은 관심 부탁 드립니다.”
마지막 인사말을 끝내고 일어서는 그의 뒷모습에서 문득 미 프로농구의 황제 ‘마이클 조던’이 생각났다. NBA 최고의 스타로 군림하던 조던이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야구선수로 새출발했던 1993년을 기억하는가. 그 때 조던은 “나는 도전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농구에서 더 이룰 것이 없어서 야구에 도전하려고 한다”는 말을 남겼다. 비록 그는 농구에서 이뤘던 만큼 야구에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그 아름다운 도전은 많은 이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
임요환이 스타크래프트에 안주했다면 그는 영원히 ‘스타크래프트의 전설'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과거의 영광 대신 새로운 도전을 택했다. 사실 그가 이전만큼의 성공을 거둘 수 있을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과거의 전설로 남기보다는 ‘새롭게 신화를 쓰려는’ 그의 노력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글 / IT동아 서동민(cromdandy@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