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흥망사] 소니 트리니트론 TV의 영광과 몰락
[IT동아 김영우 기자] 한 시대를 풍미할 정도로 높은 인기와 화제를 부른 제품들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제품 자체의 경쟁력(성능, 기능, 디자인 등)은 물론이고 적절한 가격과 내구성도 갖춰야 하며, 무엇보다도 당시의 소비자들이 원하는 타이밍에 등장해야 한다. 포드의 ‘모델 T’ 자동차나 애플의 ‘아이폰’ 그리고 소니의 ‘트리니트론(Trinitron) TV’ 등이 이에 부합하는 제품이라고 할 수 있다.
‘도쿄통신공업’이 ‘소니’가 되기까지
소니(Sony)는 일본의 주요 경쟁사들(파나소닉, 히타치, 샤프 등)에 비해 다소 늦은 1946년, 이부카 마사루(井深大, 1908~1997)와 모리타 아키오(盛田昭夫, 1921~1999)에 의해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 회사명은 ‘도쿄통신공업’이었다. 당시 일본은 2차 세계대전 패전에 의한 복구 산업이 한창이었는데, 도쿄통신공업은 라디오 등의 전자제품 수리를 하며 점차 사세를 키워 나갔다. 이후 1950년에 일본 최초의 테이프 레코더를 선보이는 것으로 제품의 개발 및 제조도 본격화했다.
1955년에는 일본 최초로 트렌지스터 라디오를 선보이며 해외 시장 공략도 시작했는데, 이 즈음부터 도쿄통신공업은 소니(Sony)라는 브랜드를 쓰기 시작했다. 이는 ‘Sound’의 ‘So’에 세계 어디에서나 동일한 발음으로 읽을 수 있도록 ‘~ny’를 붙인 것이었는데, 소니 트렌지스터 라디오가 세계적으로 큰 히트를 기록하면서 1958년에는 회사이름 자체를 ‘소니 주식회사’로 바꾸게 되었다.
시행착오 끝에 태어난 걸작, ‘트리니트론’
1960년대 들어 소니는 국제적으로 인지도가 높아졌고 미국 자본 유치도 하는 등, 글로벌 가전 업체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상가전 분야까지 영역을 확대하는 건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당시의 TV는 미국 RCA사에서 개발을 주도한 섀도마스크(shadow mask) 방식 브라운관 제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소니는 당시 획기적인 브라운관으로 알려진 ‘크로마트론(Chromatron)’ 기술의 개발에 1961년부터 몰두했고 1964년에 크로마트론 TV의 시제품도 발표했다.
하지만 크로마트론 TV의 양산은 좀처럼 본 궤도에 오르지 못했다. 워낙 섬세한 기술이라 불량률이 높은데다 생산 속도를 높이는데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높은 동작 전압을 요구하는 데다 고가의 얇은 알루미늄 형광막이 필수라는 점 때문에 생산단가와 개발비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결국 소니는 크로마트론 TV의 개발을 무리하게 강행할 것인지, 아니면 기술적 우위를 포기하고 일반 섀도마스크 TV 진영에 합류할 것인지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결국 1966년, 소니는 계획을 변경해 섀도마스크와 크로마트론의 특성을 결합한 새로운 브라운관의 개발에 나서기로 했다. 어퍼처그릴(Aperture Grille)이라는 색 선별기구를 통해 밝은 화면을 얻을 수 있는 점은 크로마트론 TV와 유사하지만 나머지 부품들의 생산 단가는 섀도마스크 TV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기에 3개의 전자총으로 빛을 쏘는 섀도마스크와 달리, 1개의 전자총으로 3가지의 컬러를 구현해 영상의 명료도를 높임과 동시에 생산성도 향상시키는 아이디어도 적용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1968년 4월 15일, 소니는 일본 본사에서 자사의 새로운 TV인 ‘트리니트론(Trinitron)’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트리니트론이란 삼위일체(Trinity)와 전자관(Electron Tube)를 합성한 용어였다. 대중들 앞에 첫 선을 보인 소니 트리니트론 TV는 기존의 섀도마스크 TV에 비해 확연하게 뛰어난 컬러 표현능력과 선명도, 그리고 높은 밝기를 증명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이런 혁신적인 성능을 갖추고도 매년 1만 대 이상의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는 이부카 회장의 설명이었다.
소니 트리니트론 TV는 출시되자 마자 엄청난 인기를 끌며 세계 TV 시장의 주역이 되었고 소니를 TV 시장의 선두주자로 올려놓았다. 심지어 1973년, 소니 트리니트론 TV는 방송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에미상(Emmy Award)을 수상하기도 했다. 사람이 아닌 TV에 이 상이 수여되는 건 처음이었는데, 그만큼 소니 트리니트론 TV가 방송 문화 발달에 큰 기여를 했다는 점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소니는 검정색 표현을 향상시킨 ‘블랙 트리니트론’, 평면 화면을 구현한 ‘FD 트리니트론’, 그리고 전문가용 고화질 제품인 ‘HR 트리니트론’등 성능과 기능이 향상된 신형 트리니트론 제품을 연이어 선보이며 TV 시장의 주도권을 이어갔다. 특히 2000년, 소니 트리니트론 TV는 한 해에만 판매량 2,000만대를 돌파할 정도로 전성기를 구가했다.
너무나 큰 성공이 부른 자만심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며 소니의 TV 사업은 강력한 도전에 마주치게 되었다. 그동안 시장의 주류를 이루던 브라운관(CRT) 방식의 TV 대신 LCD, PDP 등의 평판 디스플레이 방식 TV가 본격적으로 시장에 공급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평판 디스플레이 TV는 브라운관 TV에 비해 훨씬 얇아 공간을 덜 차지하는 데다 큰 대화면을 구현하기에도 용이한 것이 특징이었다.
하지만 소니는 한동안 브라운관 TV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트리니트론 브랜드의 파워가 여전히 막강한데다 초기형 LCD나 PDP 방식 TV는 트리니트론 TV에 비해 화면 크기 대비 가격이 비싼데다 화질이나 기능도 아직 미흡하다는 평을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니는 브라운관 TV의 시대가 한동안 더 지속될 것으로 예상하고 LCD나 PDP 관련 기술에 그다지 투자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와중에 삼성이나 LG등의 한국 업체들이 LCD/PDP 분야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해 제품의 품질을 개선하는 한편, 대량생산 체제까지 완비했다. 이에따라 평판 TV의 가격은 점점 떨어지면서 성능은 반대로 급속히 향상되었다. 여기에 중국 업체들도 이 시장에 속속 뛰어들면서 TV 시장은 21세기 초반에 이르러 LCD/PDP 중심으로 급속히 개편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니 트리니트론 TV는 2008년에 생산을 중단했다.
LCD 건너뛰고 OLED로 간다는 무리수
물론 그렇다고 하여 소니가 평판 디스플레이 시장에서 완전히 손을 놓은 건 아니었다. 일단은 삼성이나 샤프 등의 외부 업체로부터 LCD/PDP 패널을 공급받아 소니 브랜드의 평판 TV를 생산, 시장에 대응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LCD를 능가하는 차세대 평판 디스플레이 기술인 OLED(유기발광다이오드)에 우선 투자하여 경쟁사들을 압도하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소니라는 브랜드가 가진 프리미엄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로 충분하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OLED TV의 본격 양산에 이르기까지는 난관이 많았다. 2000년대 초반의 기술 수준으로는 충분한 화면 크기와 높은 내구성을 양립한 OLED 패널을 낮은 가격으로 만드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2007년 11월, 소니는 세계 최초의 OLED TV를 출시하는데 성공했지만 화면 크기가 고작 11인치에 불과한데 가격은 무려 2500달러에 달했다. 차세대 기술을 적용했다고는 하지만 도저히 팔릴 만한 제품이 아니었다. LCD/PDP를 건너뛰고 OLED로 차세대 TV 시장을 선점하겠다는 소니의 계획은 결국 실패했다.
시장의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대가는 혹독했다. 수십년간 전세계 TV 시장 1위를 지키던 소니는 2006년에 삼성전자에 1위를 내줬고 2009년에는 LG전자에게도 밀리기 시작했으며, 2013년에는 전세계 TV 점유율이 7%까지 쪼그라드는 등 몰락을 거듭했다. 2016년 즈음부터 OLED TV를 앞세워 10% 점유율을 회복했지만 여전히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점유율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현재 팔리고 있는 소니 OLED TV는 핵심 부품인 OLED 패널을 대부분 LG에게 의존하고 있어 기술적인 우위를 말하기도 힘든 상황이다.
과거의 실패를 거울로 삼는 겸허함
TV시장 여명기의 소니는 매우 현명한 플레이어였다. 초기에는 기술적 우위만 믿고 크로마트론 TV의 개발을 무리하게 추진하기도 했지만, 곧 현실에 눈을 돌려 상품성과 기술력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트리니트론 TV의 개발에 성공, 전세계 TV 시장을 지배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너무나 큰 성공에 취한 탓에 시대의 변화상마저 자신들이 주도할 수 있다고 착각했으며, 평판 TV로의 변환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시장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특히 OLED TV의 조기 개발 및 양산을 무리하게 추진하다가 실패한 사례는 과거 그들이 크로마트론 TV의 개발을 접고 대신 트리니트론 TV를 내놓아 성공시킨 사례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일이라 더욱 아이러니컬하다. 브랜드의 프리미엄을 지키기 위해선 끊임없는 자기혁신과 더불어, 과거의 실패를 잊지 않는 겸허함이 필수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글 / IT동아 김영우(pengo@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