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열전: 윌리스 캐리어] 더위에서 사람 구한 발명가... 에어컨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IT동아 강일용 기자] 기록적인 폭염이 한반도를 강타했다. 하지만 폭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출근을 해서 일을 하고 집에서 푹 쉬는 등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에어컨디셔너, 줄여서 ‘에어컨’이라고 불리는 문명의 이기 덕분이다.
1902년 7월 13일 세상에 처음 등장한 에어컨은 10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는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 되었다. 얼마나 대단한 발명인지 발명 연도뿐만 아니라 날짜까지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 에어컨 덕분에 무더운 여름에도 일을 하고, 공장을 가동하고, 데이터센터를 유지할 수 있다. 조금 과장을 보태 에어컨이 없었다면 현대 문명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여름에 일을 하지 못했을 것이고, 공장에선 더위 때문에 제품 불량이 속출했을 것이며, 수많은 앱과 게임을 지탱하는 데이터센터는 열 때문에 모든 장비가 고장 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윌리스 캐리어/ 출처 픽사베이>
에어컨은 문명의 발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에어컨이 보급되기 전에는 사시사철 더운 열대 지방에 대도시가 들어서질 못했다. 한철만 더운 온대 지방이나 난방으로 추위를 극복할 수 있는 한대 지방에만 대도시가 세워졌다. 하지만 1950년대 이후 에어컨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열대 시장에도 대도시가 들어설 수 있게 되었다. 미국 중남부 지방의 대도시도 이때를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열대 지방인 싱가포르가 대도시로 클 수 있었던 것도 에어컨의 공로가 컸다. 리콴유 싱가포르 초대 총리는 “에어컨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싱가포르도 없었을 것이다. 에어컨이야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다”고 평가했을 정도다.
더위를 극복하려는 인류의 노력은 문명이 시작된 이래 꾸준히 계속되었다. 로마 제국에선 높은 산(알프스)의 눈을 궁정으로 가져와 여름을 시원하게 지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얼음을 보관하는 서빙고와 동빙고를 설치해 여름에도 얼음을 맛볼 수 있게 했다. 19세기에는 말라리아 환자들의 병실 천장에 얼음을 담은 그릇을 매달아 놓고 부채로 바람을 일으켜 방을 시원하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모두 고육지책에 불과했고 진정한 의미에서 시원한 환경을 만들 수는 없었다.
에어컨의 아버지... 처음엔 인쇄소에 적용
오늘날 우리가 이용하는 에어컨 시스템은 한 위대한 엔지니어이자 경영자였던 인물이 발명한 것이다. 그의 이름은 윌리스 캐리어(Willis Haviland Carrier), ‘에어컨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캐리어는 1876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코넬 대학교에서 기계 공학을 전공한 후 ‘버팔로 포지 컴패니’라는 제철소에서 주급 10달러를 받고 엔지니어로 일하기 시작했다.
캐리어가 회사에 입사해 처음 한 일은 낡은 난방시스템을 현대식으로 교체하는 것이었다. 증기로 가열된 관을 지날 때 공기가 얼마나 많은 양의 열을 보유할 수 있는지 측정한 후,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난방시스템을 개선했다. 새롭게 개선된 난방설비 덕분에 회사는 4만 달러에 이르는 비용이 낭비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이러한 성과 덕분에 캐리어는 회사에 입사한지 불과 1년 만에 개발팀장이 되는 등 두각을 드러냈다.
<윌리스 캐리어, 출처 캐리어 홈페이지>
이러한 캐리어의 성과를 보고 버팔로 포지 컴패니의 고객인 뉴욕의 한 인쇄소가 캐리어에게 고민을 토로했다. 여름만 되면 고온과 습기 때문에 인쇄용지가 변질돼 책을 제대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이었다. 캐리어는 뜨거운 증기를 파이프로 보내 난방을 하는 기존 난방시스템을 뒤집어 찬물(냉매)을 파이프로 보내 건물의 온도를 낮추는 냉방시스템을 고안해냈다. 문제는 더운 여름에 찬물을 어디서 조달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안개 낀 피츠버그 기차역에서 그 답을 찾아냈다. 물이 안개로 변하면서 열을 흡수해 온도가 낮아진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이를 자신이 만든 냉방시스템에 적용했다. 마침내 인쇄소는 여름에도 책을 인쇄할 수 있게 되었다.
1902년 캐리어가 발명한 에어컨은 온도와 습도를 제어하고, 공기를 정화하고 순환시킨다는 현대 에어컨의 네 가지 구성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지속적인 연구와 개량으로 1906년 캐리어는 에어컨의 핵심 원리와 공기 조절 설비에 대한 특허를 받을 수 있었다. 끊임없는 연구로 1911년 캐리어는 건축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세우게 된다. 습공기 선도(psychrometric chart)에 대한 연구를 통해 상대 습도, 절대 습도, 이슬점의 상관관계를 밝힌 후 기계가 정상 작동할 수 있는 온도(당시 에어컨은 가정용이 아닌 산업용이었다)에 맞게 에어컨을 설계하는 논문을 발표한 것이다. 캐리어가 발표한 논문은 공조시스템을 설계하는데 가장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되었다.
캐리어 코퍼레이션을 세우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캐리어가 근무하던 제철소는 에어컨과 같은 공조시스템 대신 군사물자를 생산하는데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실망한 캐리어는 에어컨을 대중화시키기 위해 자신만의 회사를 설립하기로 마음먹었다. 1915년 7명의 동료 엔지니어와 함께 3만 2600달러의 자본금을 모아 자신의 이름을 딴 ‘캐리어 엔지니어링 코퍼레이션’이라는 회사를 세웠다. 그의 나이 39살 때의 일이다.
<1928년 설치된 캐리어 에어컨 초기 모델. 출처 캐리어>
처음 에어컨은 공장의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는데 쓰였다. 하지만 1920년대에 들어 민간으로도 확산되기 시작했다. 1924년 디트로이트의 허드슨 백화점, 1925년 뉴욕 리볼리 극장에 이어 1928년 미 의회에 캐리어의 에어컨이 설치되었다. 에어컨은 더위에 지쳐 의원들이 자주 자리를 비우는 것을 막아주었다. 백악관에는 1929년 설치되었지만,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찬 바람을 싫어해 퇴임 때까지 에어컨을 한 번도 틀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캐리어의 사업은 부침이 많았다. 생각보다 에어컨의 수요는 적었고, 때문에 1929년 세계 대공황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1930년 캐리어 엔지니어링 코퍼레이션은 다른 난방 및 공조 관련 기업들과 합병해 캐리어 코퍼레이션(지금도 이 이름을 쓰고 있다)으로 거듭났다. 이와 함께 캐리어는 최고경영자에서 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에어컨을 발명한 공로로 캐리어는 미국 르하이 대학과 알프레드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캐리어는 1950년 73살을 일기로 영면에 들었다. 정작 에어컨 산업은 그가 죽고 난 뒤 급격히 성장하기 시작했다. 1950년대 전후 경제호황기 동안 에어컨은 엄청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빠르게 보급되었다. 1955년 건설업자 윌리엄 레빗이 주택에 에어컨을 기본 사양으로 채택하면서 급속히 확산됐다. 1955년 캐리어 코퍼레이션은 51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등 대표적인 공조장치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출처 캐리어몰>
에어컨은 냉매로 쓰이는 프레온 가스가 오존층을 파괴하고 실내가 시원해지는 만큼 도시 전체의 온도를 올린다는 지적을 받는 등 반환경적인 기기라는 인식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민간에 보급되었다. 에어컨 없이 더위와 폭염을 견디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한반도처럼 여름 기후가 덥고 습한 지역에선 에어컨이 필수품이나 다름없다. 현재 한국 가정의 에어컨 보급률은 약 80%가 넘는다. 이후 에어컨 업체들은 프레온 가스 대신 오존층을 파괴하지 않는 친환경 냉매를 채택하는 등 에어컨 개량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캐리어의 사후 캐리어 코퍼레이션은 여러 번 주인이 바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전 세계 180여 개국에서 에어컨, 공조 설비 관련 비즈니스를 진행 중이다. 에어컨을 발명해 현대 문명을 발전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캐리어는 1985년 미국 국립 발명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1998년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 100인 가운데 1인으로 선정되었다. 무더운 여름에도 시원하게 지낼 수 있게 해준 그의 공로를 기리며 오늘도 에어컨을 켜고자 한다.
글 / IT동아 강일용(zero@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