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일선에 복귀한 벤처 1세대 상징 이재웅... 다음 신화에서 쏘카까지
[IT동아 강일용 기자] 대한민국 벤처 1세대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인 이재웅 다음커뮤니케이션 창업자의 행보가 예사롭지 않다. 지난 4월 차량공유(카섀어링) 서비스 '쏘카'의 신임 대표이사를 맡으며 10년만에 경영 일선에 복귀한데 이어, 7월 유망 스타트업인 VCNC를 인수해 인력확보에 나서고 있다. 쏘카를 단순 차량공유 서비스에서 데이터 분석을 활용한 모빌리티(이동방식) 혁신을 주도하는 회사로 탈바꿈시키기 위함이다. 이 대표의 다음 목표는 무엇일까. 그의 삶과 비전을 통해 쏘카의 미래 발전방향을 알아보자.
<이재웅 쏘카 대표 (전 다음커뮤니케이션 창업자) 기자간담회. 출처 동아일보DB>
대한민국 최초의 인터넷 포털 ‘다음’을 만들다
이재웅 대표는 1968년 서울에서 태어나 영동고를 거쳐 연세대 컴퓨터과학과를 졸업했다. 1989년 비트넷(미국 대학간의 상호 네트워크, 인터넷의 전신 가운데 하나다)을 접하며 인터넷의 가능성을 깨달았다. 대학원을 졸업한 후 프랑스 ENS(Ecole Normale Superieure, 이공계 그랑제콜)에서 인지과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프랑스에서 사진을 전공하던 고등학교 동창 고 박건희 씨를 만나 귀국 후 함께 인터넷 관련 사업을 진행하자고 의기투합하게 되었다. 한국에 돌아온 이 대표는 박건희, 대학교 후배였던 이택경 씨와 함께 1995년 다음커뮤니케이션을 공동 창업했다. 다음(DAUM)은 두 가지 의미에서 지은 이름이다. 첫 번째는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는 의미이고, 두 번째는 한자로 다양한 소리라는 뜻이다.
처음 이 대표가 진행한 사업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포털 서비스가 아니었다. 새롭게 대두되고 있는 인터넷 상에서 문화예술에 관한 정보망을 구축하고, 마케팅과 프로모션 등을 진행하는 광고회사였다. 1995년 말 이 대표는 회사를 설립하고 첫 번째 시련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동업자였던 박건희 씨가 심장마비로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된 것이다. (2001년 이재웅 대표와 이택경 다음커뮤니케이션 이사는 공동창업자였던 박건희 씨를 추모하기 위해 박건희문화재단을 설립하고 대한민국의 사진가들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남은 둘은 인터넷 사업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았다. 1997년 5월 국내 최초로 이메일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는 '한메일넷(hanmail.net)'을 시작했다. 당시만해도 유료로 이용해야했던 이메일을 개인 사용자들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해주는 서비스였다. 초기 인터넷에서 한메일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서비스를 시작한지 1년 6개월이 지난 1998년 12월 한메일의 가입자수는 100만 명을 돌파했다. 대한민국의 모든 인터넷 사용자들이 한메일의 회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메일의 가입자수가 100만 명을 돌파한 그때 이 대표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메일을 미국의 야후, 라이코스처럼 웹 검색, 쇼핑몰, 각종 생활정보 등을 함께 제공하는 포털 서비스로 발전시킬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이재웅 전 다음커뮤니케이션 대표가 1999년 자신의 사업을 설명하는 모습. 출처 동아일보DB>
1999년은 이 대표에게 매우 뜻깊은 한 해였다. 처음 꿈꿔온대로 한메일을 다음이라는 이름으로 변경한 후 포털 서비스를 시작했다. 포털 서비스와 함께 다음은 '다음 카페'라는 새로운 형태의 인터넷 커뮤니티를 선보였다. 다음 카페는 당시 몰락하고 있던 PC통신으로부터 사용자를 흡수해 급격히 성장했다. 덕분에 다음은 지금은 사라진 '프리챌'과 함께 한국 인터넷 커뮤니티의 양대산맥으로 떠오를 수 있었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이 대표가 이끄는 다음은 코스닥에 성공적으로 입성할 수 있었다. 2000년에는 야후, 라이코스 등의 경쟁사와 마찬가지로 웹 검색 서비스와 온라인 쇼핑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 대표의 성공가도를 높게 평가한 미국의 IT 전문매체 지디넷은 이 대표를 이건희 삼성회장과 함께 아시아의 변화를 이끄는 25인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했다.
2003년에 들어 이 대표는 훗날 국내 언론 환경을 통째로 바꾼 서비스를 개시한다. 바로 '미디어 다음'이다. 언론사가 보낸 뉴스를 단순히 차례대로 나열하는 것에 불과했던 '다음 뉴스'와 달리 미디어 다음은 다음의 직원들이 언론이 보낸 뉴스를 정제해 사용자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콘텐츠만 골라주는 뉴스 큐레이션 서비스였다. 언론사 홈페이지 대신 네이버, 다음과 같은 포털 사이트에서 뉴스를 모아 보는 문화를 만든 것이다. 처음 미디어 다음에 참여하는 언론사의 숫자는 20여군데로 매우 적었으나, 다음의 사용자수를 바탕으로 참여 언론사를 꾸준히 늘려나갔다. 2018년 현재는 약 160군데에 달하는 국내 매체들이 미디어 다음에 콘텐츠를 공급하고 있다.
이 대표는 서구식 평등한 사내문화를 다음에 심기위해 노력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다음내에서 이 대표는 '재웅님'이라는 호칭으로 통했다. 모든 직원들에게 직위 대신 ‘이름+님’이라는 상호존중 표현을 쓰게했다. 이 대표가 꿈꾼 상호존중을 통한 평등한 사내문화는 다음을 넘어 한국 스타트업 업계의 표준이 되었다.
모든 비즈니스가 서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관례를 거부하고 제주도에 사옥을 설립하는 등 지방 발전을 위해서도 힘썼다. 2003년 이 대표는 제주도에 다음 사옥을 세운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2006년 미디어본부를 이전시킨 것을 시작으로 많은 사원들을 제주도로 내려보냈다. 2012년에는 본사를 한남동 사옥에서 제주도로 완전히 이전했다. 카카오에 인수된 지금도 다음(카카오)의 본사는 제주도에 그대로 위치해 있다. 당시 이 대표는 “창의적인 일을 하려면 좋은 근무환경이 필요하다”며, “지방 이전으로 받는 혜택을 복지에 투자하면 근무환경이 개선된다”고 제주도 사옥 설립의 의의를 설명했다.
몇 번의 잘못된 판단... 다음이 2위로 내려앉은 이유
이 대표가 언제나 성공적인 결정을 내린 것만은 아니다. 몇 가지 치명적인 실책을 통해 국내 인터넷 업계 1위 자리를 네이버에게 내주고 만다. 2007년 9월 다음 대표직을 석종훈 공동 대표에게 물려주고 경영에서 은퇴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 대표의 가장 큰 실책은 '온라인 우표제'다. 2002년, 다음은 스팸 메일을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온라인 우표제라는 인터넷 역사에서도 손 꼽힐만한 최악의 정책을 실시했다. 온라인 우표제란 한메일 가입자들에게 이메일을 대량으로 발송하는 기업에게 이메일 1건당 10원씩 비용을 받은 정책이다. 100건까지는 무료로 발송할 수 있지만 100건이 넘을 경우 다음에 돈을 지불해야 이메일을 발송할 수 있었다.
<다음은 2002년 온라인 우표제를 실시했다가, 업계의 반발을 샀다. 사진은 온라인 우표제 시범 서비스 당시 홈페이지에 게재한 안내문. 출처
다음>
많은 기업들이 다음의 이러한 정책에 즉각 반발했다. 자사 서비스에 회원으로 가입할 때 한메일을 입력하지 말라는 공지를 띄우는 등 한메일 보이콧에 나섰다. 때문에 많은 사용자들이 한메일을 대신할 무료 이메일 서비스를 찾기 시작했다. 기업들의 반발이 심화되고 사용자 이탈이 가속화되자 정책을 시작한지 3년이 지난 2005년 6월 다음은 온라인 우표제라는 정책을 폐지하고 만다.
온라인 우표제는 무료 이메일 업계의 후발주자들이 성장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 결정적인 실책이었다. 2002년까지만 해도 한메일의 지위는 다른 업체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독보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2005년에 이르러 네이버, 네이트 메일 등 경쟁 서비스들이 한메일 바로 밑까지 치고올라오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특히 네이버 메일은 한메일보다 5배나 더 많은 저장공간을 제공한다는 정책을 바탕으로 한메일을 바싹 뒤쫓기 시작했고, 결국 2009년 한메일을 제치고 국내 최대의 이메일 서비스라는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 대표의 또 다른 실책은 경쟁 서비스를 초기에 견제하지 않고, 오히려 키워주었다는 점이다. 호랑이 새끼를 키웠다는 표현으로 요약할 수 있다. 다음이 검색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이었으나, 실제로 자체 검색엔진을 개발해서 적용한 것은 2007년부터였다. 그전에는 타사의 검색엔진을 이용해 검색 서비스를 제공했다. 다음이 처음 이용한 검색 엔진은 삼성SDS의 사내 벤처였던 네이버가 개발한 검색 엔진이었다. 다음에 검색 엔진을 제공하며 얻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훗날 네이버는 자체 검색 서비스를 출시할 수 있었다. 파트너가 경쟁사로 돌변하자 부랴부랴 검색 엔진을 구글의 것으로 교체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태였다.
무리한 인수합병도 이 대표의 실책으로 꼽힌다. 2004년 이 대표는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던 미국의 포털 서비스 라이코스를 9500만달러에 인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한국의 자그마한 서비스였던 다음이 한때 미국의 대표 포털 가운데 하나였던 라이코스를 사들인 것은 한국 인터넷 서비스의 질과 규모가 미국 못지 않게 급성장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 대표의 원래 목표는 라이코스 브랜드를 활용해 다음 서비스를 글로벌로 확대하는 것이었다. 라이코스에 다음의 커뮤니티성을 더해 미국 등 글로벌 시장에서 자리를 차지한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글로벌 시장은 이미 구글이 장악한 상태였다. 포털 서비스 업계의 1위였던 야후만이 간신히 미국과 일본 시장에서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곳에 다음이 인수한 라이코스의 자리는 없었다. 얼마되지 않았던 라이코스의 점유율은 빠르게 사라졌고, 결국 2010년 다음은 라이코스를 재매각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만다. 2010년 인도계 광고사업자인 와이브랜트에 3600만 달러에 매각했지만, 2011년 이후 매각대금이 제대로 입금되지 않아 모두 다음의 손해로 돌아왔다.
<라이코스 로고>
이 대표가 떠난 후 다음은 전문경영인 체제로 돌입했다. 하지만 카리스마있는 창업자가 후계자 없이 떠난 조직의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내고 만다. 업계에서 다음은 평등한 조직문화로 유명했지만, 이것이 다음의 성장을 방해하는 독으로 작용했다. 네이버, 카카오 등 경쟁사들은 카리스마있는 창업자나 경영인이 회사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고 그 길을 향해 회사의 모든 역량을 투입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반면 다음은 민주적인 조직이라는 미명하에 갈팡질팡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마이피플’이다. 2010년 5월 출시된 마이피플은 인터넷 업계가 PC에서 모바일로 변하는 것에 대응하기 위한 다음의 야심작이었다. 경쟁사보다 뛰어난 음성, 영상 통화 기능을 바탕으로 나름 사용자층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회사의 미래 먹거리가 되어야할 마이피플에 대한 지원은 다른 조직들과 다를바 없었다. 회사의 역량을 미래 먹거리에 집중 투입하지 못하고, 발전 가능성이 없는 조직과 서비스에도 골고루 분배하고 만 것이다. 이른바 ‘평등한 조직의 함정’이다.
리더의 부재에 시달리던 다음은 결국 2014년 5월 김범수 대표가 이끄는 카카오에게 인수되고 만다. 카카오와 합병한 다음은 처음에는 내홍에 시달렸지만, 결국 핀테크, 모빌리티 등 O2O 업계에선 오랜 라이벌이었던 네이버를 꺾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카섀어링으로 경영 일선 복귀... 기술 혁신으로 글로벌 시장 공략이 목표
다음 대표를 사직한 이 대표는 얼마지나지 않아 다음 이사회에서도 떠났다. 카카오가 다음을 인수함에 따라 다음 최대 주주라는 타이틀도 김범수 대표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다음을 떠난 후 이 대표는 벤처캐피탈을 설립하고, 애완동물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는 자그마한 스타트업을 설립하는 등 후진 양성에 힘썼다. 이와 함께 다음카카오 세무조사에 의혹을 제기하는 등 꾸준히 친 다음적인 행보를 보였다.
하지만 그는 천성 기업인이었다. 지난 4월 자신이 대주주로 있는 차량공유서비스 쏘카의 신임대표로 취임하며 10년의 은둔생활을 깨고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 쏘카는 이날 이 대표의 경영복귀와 함께 국내 사모펀드 운용사인 IMM 프라이빗에쿼티로부터 600억 원의 투자를 유치했다고 발표했다.
쏘카는 국내 최대의 차량공유서비스로 단기간 사용시 렌트카보다 이용비용이 저렴하고(하루 이상 사용할 경우에는 렌트카보다 이용비용이 비싸진다), 접근성이 뛰어난 것이 특징이다. 테슬라 모델S 등 국내에서 보기 힘든 차량도 이용할 수 있다.
이 대표는 자신이 운영하는 벤처캐피털 ‘소풍’을 통해 쏘카의 초기 자금을 대면서 차량공유 산업과 인연을 맺었다. 이 대표는 투자받은 자금을 공유용 차량 구매, 주차장 확보 등 인프라 확대뿐만 아니라 빅데이터 분석, 자율주행 및 사고 방지 기술 연구 등 연구개발 비용으로도 활용할 계획이다.
<이재웅 쏘카 대표(전 다음커뮤니케이션 창업자)가 17일 열린 쏘카 기자간담회에서 기자 질의에 대답하고 있다. 출처 동아일보DB>
이 대표가 커플용 SNS ‘비트윈’을 운영하는 VCNC를 인수한 것도 연구개발을 위한 우수 인력확보에 그 목적이 있다. 이 대표는 네이버가 검색엔진 회사인 첫눈을 350억 원에 인수한 것을 사례로 들면서, 네이버의 모바일 메신저 라인을 개발한 팀이 바로 그때 인수한 첫눈 연구인력들이었다고 강조했다. 우수한 인력이 우수한 서비스를 만들어 낸다며, 이번 인수의 핵심이 서비스가 아닌 우수 인력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 셈.
이 대표는 VCNC가 SNS 서비스를 운영하면서 쌓은 방대한 데이터 처리 능력과 기술 개발 능력을 쏘카에 접목시킬 계획이다. 비트윈 서비스를 중단한다는 것은 아니다 VCNC 조직을 반으로 나눠 절반은 비트윈 서비스 운영에 투입하고 나머지 절반은 쏘카 신규 서비스 개발에 투입할 계획이다.
이 대표는 “카섀어링 시장은 이제부터 시작이다”며, “이익을 내는 것보다 과감한 투자로 기술을 확보하고 서비스 품질을 높여, 궁극적으로 규모의 경제를 만들어나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 대표의 다음 목표는 다음 대표 시절 이루지 못한 꿈인 글로벌 시장 진출이다. 국내 시장에서 자리를 잡은 후 동남아 등에 진출해 모빌리티 혁신을 이뤄낼 계획이다. “동남아 시장은 미국, 유럽처럼 개인이 보유한 차가 많지 않기 때문에 쏘카의 비즈니스 모델이 경쟁력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혁신을 이뤄내 자리를 잡은 후 동남아 진출을 꾀할 것”이라고 말했다.
글 / IT동아 강일용(zero@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