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CEO 열전] 영광과 몰락 사이, 소니 전 CEO 이데이 노부유키
[IT동아 김영우 기자] 성공적인 최고경영자(CEO)가 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무엇일까? 우수한 두뇌는 기본이며, 탁월한 화술과 넓은 인간관계, 그리고 결단력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에 '판'을 잘 읽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통찰력까지 갖춘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다만, 이러한 조건을 모두 갖춘 CEO라고하여 모두 성공하는 건 아니다. 특히 규모가 큰 글로벌 기업이라면 아주 작은 실수가 큰 손실로 이어질 수 있으며, 여기에 운까지 따라주지 않는다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인문계 출신의 평사원이 소니 CEO에 오르기까지
일본 소니(SONY)를 1995년부터 2005년까지 이끌었던 이데이 노부유키(Nobuyuki Idei)는 이런 의미에서 참으로 불운한 CEO였다. 타고난 두뇌는 물론, 국제적인 감각도 갖추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향후 기업이 나아가야 할 비전을 제시하는 능력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나 미래만을 바라본 나머지,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다소 소홀했으며 당시의 시대 상황 역시 그의 편이 아니었다.
< 이데이 노부유키 전 소니 CEO(1937~)>
1937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이데이 노부유키는 자타가 공인하는 엘리트였다. 그의 아버지는 명문 와세다 대학의 교수였으며, 이데이 노부유키 본인 역시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 경제학과를 졸업한 수재였다. 그는 1960년, 대학 졸업과 거의 동시에 소니에 입사했으며, 뛰어난 외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10여년간 유럽 지사에 근무했다. 회사일을 하면서 스위스 제네바의 국제연구대학원 석사 과정을 마치기도 했는데, 이를 통해 국제적인 감각을 익히게 된다.
이후, 그는 능력을 인정받으며 소니 본사의 핵심 부문인 음향사업본부 및 홈비디오사업본부 부장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1989년에는 이사가 되었다. 이공계 출신을 주로 우대하는 소니의 기업문화 속에서 인문계 출신이었던 이데이 노부유키의 고속 승진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사가 된 이후, 그는 홍보부를 이끌면서 소니 브랜드의 이미지를 높이는데 기여했다는 평을 들었으며, 이를 인정 받아 1995년에는 드디어 소니의 대표이사인 사장 자리까지 오른다. 당시 소니에는 15명에 달하는 사장 후보가 있었으며, 당연히 이공계 출신의 사장이 선정될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하지만 전임 오가 노리오 사장은 음대출신이면서 소니 CEO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그는 이데이 노부유키가 인문계 출신임에도 기술에 대한 이해도가 높으며, 향후 소니는 기술 지식 외에도 국제적인 영업능력까지 뛰어난 수장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 이데이 노부유키를 차기 소니 CEO로 추천하게 된다. 신입사원으로 소니에 입사해 CEO까지 오른 것도 이데이 노부유키가 처음이었다.
디지털과 유비쿼터스, 그리고 네트워크에 소니의 미래 걸다
이데이 노부유키가 CEO로 취임한 1995년 전후의 주변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일본 전체가 1990년대 초반부터 버블경제 붕괴의 후폭풍에 휘청거리고 있었고, 소니 역시 약 1,000억엔에 달할 정도의 적자를 보고 있었다.
소니의 수장이 된 이데이 노부유키는 워크맨 및 트리니트론TV로 대표되는 소니의 첨단 제품만으로 이런 위기를 극복하는데도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취임하자 마자 ‘디지털 드림 키즈(Digital Dream Kids)’ 전략을 발표했다. 이는 전형적인 일본식 제조업체라는 이미지가 강했던 소니를 인터넷 비즈니스 기업이자 글로벌 기업, 그리고 디지털 콘텐츠 기업으로 변모 시킨다는 비전이 담겨있었다.
특히 인터넷이나 콘텐츠, 보험 등의 비가전 부문의 역량을 강화함과 동시에, 가전 부문 역시 단순히 제품을 만들어 파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융합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각 제품 및 콘텐츠 간의 연결성을 극대화하여 거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이를 언제 어디서나 접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유비쿼터스(Ubiquitous)'를 전면에 내세우기도 했다.
이를 위해 소니는 1995년, 인터넷 서비스(ISP) 기업인 ‘소넷(So-net, 소니 네트워크 커뮤니케이션즈)’을 설립해 네트워크 역량 강화에 나섰다. 또한, 1994년 말에 첫 출시된 자사의 비디오게임기인 플레이스테이션(PlayStation) 관련 사업에 한층 힘을 실어, 1995년에는 게임기 본체 가격을 인하하고 소프트웨어 개발사 지원을 강화하는 등의 공격적인 마케팅을 했다.
< 1996년 첫 출시된 소니의 바이오 노트북>
소니가 PC 제조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도 이 즈음의 일이다. 1996년, 소니는 자사의 PC 브랜드인 '바이오(VAIO)'를 런칭했다. 오직 독자 기술만을 강조하던 과거의 소니 제품과 달리, 바이오는 인텔(프로세서) 및 마이크로소프트(운영체제)를 비롯한 외부 업체와의 전면적인 협력을 거쳐 개발한 제품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바이오 브랜드의 첫 제품은 일본이 아닌 미국에서 출시되었으며 이는 소니의 PC가 일본 시장에 특화되지 않은 글로벌 제품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마케팅 전략이기도 했다.
< 1999년에 첫 출시된 소니의 로봇 강아지 '아이보(aibo)'>
이와 더불어 저연령층 및 노년층에게 디지털 기술을 친숙하게 전파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애완용 로봇 사업도 전개했다. 1999년에 첫 제품이 출시된 로봇 강아지인 ‘아이보(Aibo)’가 바로 그것이었다. 아이보라는 이름은 Artificial Intelligence roBOt, 즉 인공지능 로봇의 약자이지만, 일본어로 친구를 뜻하는 '아이보(相棒)'라는 단어를 그대로 쓴 것이기도 하다.
무선 네트워크 시장의 지배자가 되기 위해 휴대전화 부문의 역량 강화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당시 유럽 휴대전화 시장의 강자였던 스웨덴 에릭슨(Ericsson)과 제휴를 시작했으며, 2001년에는 양사의 합작 법인인 '소니 에릭슨 커뮤니케이션스(Sony Ericsson Mobile Communications)'를 설립하기도 했다. 에릭슨의 무선 통신 기술과 각종 특허, 그리고 소니의 디자인 및 하드웨어 설계 능력이 결합한 휴대전화로 시장을 공략한다는 계획이었다.
그 외에 1990년대 접어들어 너나할 것 없이 뛰어들던 LCD, PDP 기반의 평면 디스플레이 산업에 대해, 경쟁사들과 자못 다르게 접근했다. 소니는 트리니트론으로 대표되는 CRT(브라운관) 기반 디스플레이 시장의 최대 강자였다. 화질이나 가격 경쟁력 면에서 소니 트리니트론은 당시의 초기형 LCD나 PDP 보다 우위에 있었다. 이 때문인지 소니는 CRT TV 사업을 유지하는 한편, LCD/PDP 제품의 개발과 출시에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LCD/PDP를 능가하는 OLED 디스플레이의 개발을 진행, 차세대 디스플레이 시장을 선도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최고의 실적에 쏟아지는 찬사, 전성기를 누리다
위와 같이, 이데이 노부유키가 이끄는 1990년대 중~후반의 소니는 과거와 자못 다른 행보를 보였다. 전자기기 제조로 대표되는 이른바 '굴뚝산업'의 대명사였던 소니가 과거의 틀을 벗고 미래의 패러다임인 인터넷, 콘텐츠, 모바일 및 인공지능 등을 선도하는 혁신 기업으로 거듭나고 있다고 언론에서는 집중 조명했다.
가시적인 성과도 나타났다. 플레이스테이션 게임기 및 바이오 노트북 등의 전략 제품이 큰 인기를 모으며 날개 돋친 듯 팔렸으며, 1998년에 소니는 역대 최대 수준인 5000억엔 이상의 영업이익을 달성했다. 이데이 노부유키가 이끄는 소니의 앞길에는 탄탄대로가 펼쳐진 듯 했다. 전세계가 이데이 노부유키를 경영의 귀재라고 칭송했으며 2000년, 일본정부는 그를 총리자문기구인 IT전략회의 의장으로 임명해 일본의 IT 분야 전략을 지휘하게 하기도 했다.
영광 뒤에 도사린 먹구름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소니는 이렇게 잘 나가던 시절을 기점으로 다수의 문제점이 대두되었다. 문어발식으로 급격하게 사업 확장을 시도하면서 기업의 정체성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 였으며, 국제적인 감각을 강조하는 이데이 노부유키의 경영스타일이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일본 대기업 문화에는 융합되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었다.
각 사업부별로 손익계산을 내는 독립채산제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면서 사내 부서 간의 갈등과 다툼도 심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각 부서가 최소한의 기간 동안 최대한의 수익을 낼 수 있는 사업에만 몰두하기 시작하면서, 긴 시간동안 많은 비용의 투자가 필요한 독자기술 개발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된 것이 치명적이었다. 이는 소니의 근간 중 하나였던 '장인정신'을 퇴색하게 했다.
그래도 이데이 노부유키 취임 초기의 소니 제품들은 그동안 쌓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타사보다 우위에 설 수 있었다. 여기에 우수한 디자인과 적극적인 마케팅이 더해져 소비자들의 호의를 샀다. 하지만 2000년대에 이르자 업계 전반의 기술력이 상향평준화되고, 성능면에서 더 이상 소니 제품은 우위에 설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서 오히려 경쟁사보다 뒤떨어지는 부문도 많아졌다. 대표적인 부문이 TV사업이었다. 디스플레이 시장이 CRT에서 LCD/PDP로 전환되는 속도는 생각 이상으로 빨랐으며, 화질이나 가격 경쟁력 역시 CRT를 추월하기 시작했다. 반면, 여전히 CRT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타사에서 생산한 핵심 부품(화면 패널 등)을 납품 받아 완제품을 생산하는 식으로 LCD/PDP 시장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던 소니 TV의 경쟁력은 추락하기 시작했다.
특히 일찍부터 LCD/PDP 부분에 큰 자본을 투자해 기술력을 높이고, 가격경쟁력까지 갖춘 삼성전자, LG전자로 대표되는 한국 가전업체들에게 TV 시장을 빼앗기기 시작한 것이 치명타였다. 소니가 LCD/PDP를 뛰어넘는 차세대 디스플레이로 기대하던 OLED도 개발이 지지부진하며 상용화도 하염없이 늦어졌다. 2007년에 들어서야 소니는 세계 최초의 OLED TV를 출시했지만 11인치 모델의 가격이 20만엔에 달하는 등, 가격경쟁력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소니의 모든 제품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거대한 네트워크를 형성한다는 계획도 삐걱거렸다. 소니의 제품들은 유독 독자규격에 집착했는데, 이를테면
타사의 디지털카메라가 범용성이 높은 SD카드를 저장매체로 이용하고 있을 때 소니 제품만은 메모리스틱이라는 자사 개발의 메모리카드를 이용했다.
또한 당시 소니의 노트북이나 캠코더는 외부 기기 접속용으로 i.Link(IEEE1394)라는 인터페이스를 주로 탑재하고 이용을 권장했다.
i.Link는 고속으로 데이터 통신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었으나, 소니 및 일부 애플 제품을 제외하고 타사 제품에는 그다지 탑재되지 않아
사실상 고립된 규격이 되었다.
예전처럼 소니의 경쟁력이 타사를 압도하는 상황이라면 소비자들이 소니 제품만을 구매, 소니의 의도대로 자사 중심의 거대한 네트워크가 형성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업계 전반의 기술력이 상향평준화 된 상황에서 소니의 이런 제품은 오히려 소비자들에게 불편을 주어 결국 외면 받게 만들었다. 이 당시 소니 제품들은 겉보기에는 그럴 듯하여 호감을 줄만 하지만 성능적으로는 타사 제품과 큰 차이가 없었으며, 타사 제품과의 호환성도 부족한데 가격도 싼 편이 아니었다.
실제로 1998년부터 소니 바이오 PC사업부에서 근무하다 2005년 퇴사한 미야자키 타쿠마씨는 2006년, '소니 침몰'이라는 책을 내고 이데이 노부유키가 이끌던 소니를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의 지적에 따르면, 전통적인 제조업을 그다지 달갑게 여기지 않던 이데이 노부유키의 성향, 그리고 부서 간의 실적경쟁을 부추기는 각종 시스템의 도입 때문에 당시 소니는 자체적으로 기술을 개발하기보다는 외부 업체의 기술을 도입, 적당히 포장해서 빨리 파는 것이 우선시 되었다고 한다. 이런 흐름 속에서 푸대접을 받게 된 많은 엔지니어들이 회사를 떠났으며, 그 결과로 제품의 경쟁력은 점차 하락했다고 지적했다.
'소니 쇼크'로 촉발된 위기, 그리고 종말
결국 2003년 4월 24일, 일이 터졌다. 해당 분기의 소니는 1,854억엔의 영업이익을 거두었는데, 이는 예상에 비해 1,000억엔 가까이 낮은 수치였다. 게다가 다음 분기 예상 영업이익은 전 분기보다 1,300억엔이나 낮아질 것이라는 예상까지 발표되자 소니의 주가는 25일부터 27일 사이에 30% 가까이 폭락했다. 이른바 '소니 쇼크'다.
소니 쇼크는 일본 경제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국내외 전문지들은 향후 소니의 브랜드 가치까지 하락이 예상된다고 연이어 지적하기 시작했다. 이데이 노부유키에게 최대의 위기가 닥친 것이다. 이에 소니는 제품의 고급화, 고부가가치화를 추진해 전자왕국 소니의 위상을 되찾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2003년 6월에는 이른바 '명품' 가전을 지향하는 '퀄리아(Qualia)' 브랜드를 론칭한다.
하지만 소니 퀄리아 시리즈는 호평은커녕 혹독한 비판을 들어야 했다. 퀄리아 브랜드로 출시된TV, 디지털 카메라, 오디오 등은 최고급의 소재와 화려한 외관, 그리고 소니 장인들의 튜닝을 거친 명품임을 강조했으나, 근본적인 콘셉트 자체가 당시 시장의 트랜드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당시 TV 시장에서 이미 LCD와 PDP 방식 제품이 본격적으로 팔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퀼리아 브랜드 TV는 트리니트론 CRT 방식이었다. 그리고 이미 500만 화소급의 고성능 디지털 카메라가 등장한 와중에 퀼리아 브랜드 디지털 카메라는 불과 200만 화소급에 그쳤다. 이미 애플 아이팟을 비롯한 MP3 플레이어가 본격적으로 팔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니는 퀼리아 브랜드로 MD(소니에서 개발한 소형 광디스크) 플레이어를 출시했다.
< 소니 퀄리아 브랜드의 카메라는 불과 200만 화소 제품이었지만 가격이 40만엔에 달했다>
제품의 콘셉트 이상으로 심각한 건 판매 가격이었다. 퀄리아 36인치 CRT TV의 가격은 약 80만엔, 퀄리아 200만화소 디지털 카메라의 가격은 40만엔에 달할 정도로 비쌌다. 이는 유사한 사양을 가진 일반 제품의 몇배에 달할 정도로 비싼 가격이었다. 대부분의 일반 소비자들은 당연히 이 제품들을 외면했다.
결국 2005년 6월, 이데이 노부유키는 실적부진의 책임을 지고 소니의 CEO 자리에서 물러난다. 후임 CEO로는 미국인인 하워드 스트링거(Howard Stringer)가 올랐으며, 이는 소니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 CEO였다. 다만, 하워드 스트링거가 취임한 이후에도 소니의 사정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소니의 위기는 2012년에 후임 CEO인 히라이 카즈오(Kazuo Hirai)가 부임해 강력한 구조조정 및 체질개선 작업을 시작한 이후부터 조금씩 호전되기 시작했다.
높았던 이상, 더 높았던 현실의 벽
글로벌 기업의 CEO 중에 이데이 노부유키만큼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도 드물 것이다. 한때 최고의 혁신가, 경영의 귀재로서 전세계의 추앙을 받기도 하다가 소니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원흉으로 호된 비판을 받기도 했다. 큰 꿈을 품었던 인물이었고, 이를 토대로 한 비전을 제시하는 데는 능했으나, 이를 구체화, 현실화 시키는 데는 미숙했다는 평도 있다.
다만, 평사원으로 입사해 CEO까지 올랐던 그의 노력과 열정은 분명 본받을 만 한 가치가 있으며, 인문계 출신이라는 한계와 편견에도 불구하고 일본 최대의 전자 기업인 소니를 잠시나마 최고의 위치까지 올려놓은 바 있다. 최근 소니의 재도약에 그의 실패가 밑거름이 됐는지도 모를 일이다.
글 / IT동아 김영우(pengo@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