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CEO 열전] IE 제국을 무너뜨리고 크롬 제국을 세우다, 순다르 피차이
[IT동아 강일용 기자] 실리콘밸리는 이민자들의 노력 위에 세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 세계 여러 국가에서 모인 우수한 인재들이 기술을 개발하고 경합을 벌여 오늘 날의 IT 강국 미국을 만들었다. 이러한 실리콘밸리에서도 유독 두각을 드러내는 집단이 있다. 바로 인도 출신의 개발자들이다. 일반 개발자, 중간 관리직부터 고위 관리직까지 실리콘밸리 기업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다.
이러한 이들의 노력이 인정받은 것일까. 실리콘밸리의 기업들은 이들을 중용하고, 마침내 CEO(최고경영자) 자리에 앉힌다는 결정을 내렸다. 사티아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 CEO, 산자이 쟈 글로벌 파운드리 CEO, 샨타누 나라옌 어도비 CEO 등이 인도인 개발자 출신 실리콘밸리 CEO의 대표적인 사례다.
유명한 인도인 개발자 출신 실리콘밸리 CEO에서 순다르 피차이(Sundar Pichai) 구글 CEO도 빼놓을 수 없다. 인도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유학길을 올랐고, 실리콘밸리에서 두각을 드러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거대한 기업인 구글의 최고경영자가 된 그의 삶을 살펴보자.
주변인의 전화번호를 모두 외우던 신동, 미국 유학길에 오르다
피차이는 1972년 인도 타밀 나두(Tamil Nadu) 주에서 태어나서, 첸나이 지방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전기기술자였다. 피차이의 가족은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IT 업계의 창업자나 CEO 대부분이 어린 시절 컴퓨터를 접하고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고 얘기하지만, 여기서 피차이는 예외다. 그는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컴퓨터를 구경도 해보지 못했다.
대신 피차이에게 주어진 것은 천재적인 암기력이었다. 그는 주변인들의 연락처와 최근 연락한 곳의 전화번호를 외울 수 있었다. 이러한 피차이의 암기력에 주목한 그의 부모는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불구하고 피차이를 대학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부모의 도움으로 피차이는 인도 공과 대학(Indian Institute of Technology) 카라그푸르(Kharagpur) 캠퍼스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가 선택한 전공은 컴퓨터와 무관한 야금공학이었다. 인도에서 손 꼽히는 공업도시 카라그푸르에서 가장 선호받는 전공이었다.
하지만 대학에 입학한 피차이는 그의 삶을 바꿀 기기를 만나게 된다. 바로 컴퓨터였다. 1990년대 초 급격히 성장하기 시작한 컴퓨터와 소프트웨어 산업을 접한 피차이는 자신의 전공못지 않게 컴퓨터 공학에도 큰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는 독학으로 체스 프로그램을 만들 정도로 컴퓨터 공학에 심취하게 되었다.
1993년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피차이는 스탠퍼드 대학의 장학생으로 선발 되었다. 아버지의 1년 연봉보다 더 많은 장학금을 받게된 피차이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스탠퍼드 대학에서 재료공학 석사를 이수한 후 미국 기업에 취업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의 첫 번째 직장은 반도체 제작 장비를 만드는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Applied Materials)였다. 엔지니어로서의 삶을 살던 그는 펜실바니아 대학 왓슨스쿨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이수한 후 기업 관리자로서의 삶을 살기로 결정했다. 2002년 왓슨스쿨을 졸업하고 맥킨지컨설팅그룹에서 반도체 관련 컨설팅을 진행하다가 2004년 구글에 합류했다.
IE 제국을 무너뜨리고 크롬 제국을 세우다
피차이가 구글에 입사히기 위해 면접을 본 날은 4월 1일 만우절이었다. 그날 구글은 지메일 서비스를 시작했다. 지메일은 1GB라는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대용량 저장공간을 제공하는 무료 이메일 서비스였다. 다른 무료 이메일 서비스의 용량은 10~20MB 수준이었고, 유료 이메일 서비스라도 200MB 이상의 용량을 제공하기 힘들던 시기였다. 피차이는 처음 지메일에 대한 얘기를 듣고 이것은 만우절을 기념하기 위한 거짓말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구글은 보란듯이 지메일 서비스를 개시했다. 이를 통해 피차이는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을 추구하는 구글의 기업 문화를 이해하게 되었고, 맥킨지를 떠나 구글에 합류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정장을 갖춰 입고 미래를 예견하던 컨설턴트가 반팔 차림으로 자유롭게 일하는 구글러(Googler, 구글 직원)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피차이가 처음 배속된 부서는 당시 웹 브라우저 업계를 독점하고 있던 인터넷 익스플로러(IE)용 '구글 검색 툴바'를 만드는 부서였다. 이 부서에서 일하던 도중 구글은 큰 위기에 처하게 된다. 2006년 마이크로소프트(MS)가 구글을 견제하기 위해 IE의 기본 검색 엔진을 자사의 검색 서비스 '빙(Bing)'으로 지정한 것이다. 구글 검색의 방문자가 급감할 수 밖에 없었다.
피차이는 이때 검색 툴바 매니저로서 PC 제조사에 방문해 구글 검색 툴바의 유용성을 알리고, 이를 제조사의 PC에 기본 탑재하도록 설득하고 다녔다. 이러한 피차이의 노력 덕분에 구글 검색의 점유율이 빙에게 크게 잠식당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래도 제법 점유율을 빼앗겼다)
피차이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웹 브라우저의 중요성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 구글이 인터넷 검색 시장과 광고 시장에서 그 지위를 유지하려면 웹 브라우저 시장에 진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피차이는 래리 페이지, 세르게이 브린, 에릭 슈미트 등 구글 경영진과 독대해 구글이 자체 웹 브라우저를 개발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사실 웹 브라우저를 개발한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당시 웹 브라우저 업계는 IE가 윈도우 운영체제 기본 탑재라는 이점을 앞세워 장악하고 있었다. 유일한 경쟁사였던 모질라 재단의 파이어폭스는 구글의 지원금으로 연명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른 웹 브라우저는 그 존재감마저 미미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글이 직접 웹 브라우저를 개발해 시장에 뛰어든다는 리스크를 짊어져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래리 페이지는 구글이 직접 웹 브라우저를 개발해야 한다는 이 인도인 관리자의 말을 경청했다. 그 자리에서 즉시 웹 브라우저 개발을 위한 팀을 꾸리기로 결정하고 이 인도인 관리자를 그 프로젝트의 책임자로 앉혔다.
피차이는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해야 시장 점유율이 90%가 넘어가는 IE를 상대로 경쟁해서 승리할 수 있을까. 피차이는 철저하게 IE를 분석했고, IE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용자가 시장에 분명 존재함을 확인했다. 이들을 새 웹 브라우저의 고객으로 여기고, 새 웹 브라우저는 모든 것을 IE의 반대로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IE는 웹 표준을 전혀 지키지 않았다. 새 웹 브라우저는 철저하게 웹 표준을 지키기로 결정했다. IE는 새 버전으로 업데이트가 느리고 기능 추가가 잘 이뤄지지 않았다. 새 웹 브라우저는 업데이트가 매우 빠르고 지속적으로 기능을 추가하기로 결정했다. IE는 사용자 환경에 복잡하고 쓸데 없는 메뉴가 많았다. 새 웹 브라우저는 사용자 환경이 간결하고, 쓸데 없는 메뉴는 모두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IE는 개발자 친화적이지 않았다. 새 웹 브라우저는 개발자를 위해 개발 메뉴를 추가하기로 결정했다.
피차이의 지휘 하에 구글 웹 브라우저팀은 새로운 웹 브라우저 개발에 총력을 다했다. 그리하여 2008년 9월 세상에 구글의 웹 브라우저 '크롬(Chrome)'이 등장했다. 크롬은 빠른 속도, 웹 표준 준수, 간결한 사용자 환경, 지속적인 업데이트 등을 내세우며 헤비 유저(Heavy Internet Users, 인터넷 사용시간이 길어서 트래픽을 많이 일으키는 사용자들)를 중심으로 점유율을 늘려나가기 시작했다.
크롬이 등장하자 한 동안 웹 브라우저 기능 업데이트에 소홀했던 MS도 2010년 이후 새로운 버전의 IE를 선보이며 크롬 견제에 나섰다. 하지만 새로운 운영체제를 판매하기 위해 운영체제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웹 브라우저에 차등을 뒀던 MS의 전략은 실패했다. 구형 운영체제를 이용 중이던 사용자들은 IE를 이탈해 어떤 운영체제에서든 최신 기능을 이용할 수 있는 크롬을 선택했다. 여기에 모바일 시대가 열리면서 웹 표준의 중요성이 강조되자 웹 표준을 제대로 준수하던 크롬의 점유율을 날개돋친 듯 상승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트래픽을 기준으로는 2012년 5월, 사용자수를 기준으로는 2016년 1월 크롬은 IE를 제치고 점유율 1위의 웹 브라우저로 올라서게 되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IE 제국이 무너지고, 그 자리에 크롬 제국이 들어선 것이다. 현재 크롬은 트래픽을 기준으로는 54%, 사용자수를 기준으로는 60% 정도의 점유율을 보유하고 있다. 이는 과거 헤비 유저를 중심으로 이용되었던 크롬이 라이트 유저(인터넷 사용시간이 짧아서 트래픽을 적게 일으키는 사용자들)로까지 저변을 확대했다는 증거다.
크롬은 구글에게 매우 의미가 큰 서비스다. 크롬은 구글의 모든 인터넷 서비스와 일체화되어 있다. 크롬을 실행하면 첫 화면에 구글 검색이 뜨고, 주소창에 단어를 입력하면 구글 검색에 연결되며, 크롬에 구글 아이디로 로그인하면 지메일, 지드라이브, 캘린더 등 구글의 모든 서비스를 바로 이용할 수 있다. 크롬의 사용자가 늘어나는 만큼 검색, 이메일 등 구글의 인터넷 서비스 사용자도 함께 늘어났다. 크롬이 웹 브라우저 시장을 장악함으로써 구글도 검색, 이메일 등 인터넷 서비스 시장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구글의 인터넷 광고 수익도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피차이는 구글의 부사장으로 임명되었다. 구글의 2인자가 된 것이다. 피차이는 크롬 팀(웹 브라우저 팀에서 이름 변경)을 이끌며, 꾸준히 안티 MS 전략을 선보였다. IE 제국을 크롬 웹 브라우저로 무너뜨린 것처럼 윈도우 제국을 크롬OS로 무너뜨리길 꿈꿨다. 하지만 구글이 인터넷 영역에 강점을 보유하고 있어 크롬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과 달리 운영체제 분야에는 노하우가 없어 크롬OS는 별다른 반향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결국 크롬OS는 일반 사용자보다 커머셜(기업, 교육) 시장 공략에 집중하게 되었다.
피차이 vs 루빈, 기로에 선 구글
2010년에 들어 구글은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를 출시하고 모바일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안드로이드 덕분에 구글은 웹에 이어 모바일까지 장악한 IT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안드로이드는 내홍에 시달리고 있었다. 원인은 안드로이드의 아버지 앤디 루빈이었다. 루빈은 구글에게 안드로이드를 판매한 후 피차이와 마찬가지로 부사장으로서 구글 내부에서 안드로이드 팀을 이끌었다. 하지만 루빈은 다른 부서와의 협력 없이 독단적으로 안드로이드 팀을 운영했다. 이러한 독단의 대표적인 사례가 '안드로이드 웹 브라우저'다. 루빈은 크롬이라는 구글의 웹 브라우저가 존재하고 이를 개발하는 웹 브라우저 팀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안드로이드 팀 내부에서 독자적인 모바일 웹 브라우저를 개발해서 안드로이드에 탑재시켰다. 이에 질세라 피차이가 이끄는 크롬 팀도 모바일 웹 브라우저 '크롬 모바일'를 출시했다. 하나의 회사에서 두 개의 모바일 웹 브라우저를 출시하는 진풍경이 벌어진 것이다.
<구글 본사에 전시된 안드로이드 마스코트>
물론 팀들의 독립성을 존중하는 구글의 기업 문화 때문에 구글 내부의 여러 팀이 중복되는 서비스를 출시해 서로의 서비스를 '팀킬(아군 오인 사격, 물론 팀킬은 콩글리시이고 경영학적으로는 '카니발라이제이션'이라고 표현해야 옳다)'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 실험적인 서비스에서나 한정되는 풍경이다. 구글의 주력 먹거리가 되어야 할 모바일 운영체제와 모바일 웹 브라우저 시장에서 이러한 혼선이 있어서는 곤란했다.
구글의 경영진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피차이의 크롬 팀과 루빈의 안드로이드 팀 가운데 어느 한곳의 손을 들어줘야만 했다. 구글 경영진은 결국 피차이의 손을 들어줬다. 2013년 3월 피차이를 크롬뿐만 아니라 안드로이드까지 관리하는 통합 최고 관리자로 앉혔다. 루빈은 자신이 만든 안드로이드 대신 로봇 사업부의 최고 관리자로 좌천되었다. 이러한 좌천을 견디지 못한 루빈은 결국 2014년 구글을 떠나게 되었다.
(똑같은 최고 관리자인데 왜 좌천이냐 하면, 구글의 로봇 사업부는 루빈처럼 구글 조직에 거의 융화되지 못한 '보스턴 다이내믹스'였기 때문이다. 보스턴 다이내믹스 역시 루빈처럼 구글을 떠나 일본 소프트뱅크의 품에 앉기게 되었다.)
크롬에 이어 안드로이드까지 관리하게 된 피차이는 별개의 기업인 것처럼 움직이던 안드로이드 팀을 구글의 사업부서의 일부로 전면 통합시켰다. 모바일 웹 브라우저 통합도 그러한 작업의 일환이다. 안드로이드 웹 브라우저는 사라지고 크롬 모바일만 남았다. 이어 크롬에서 그랬던 것처럼 안드로이드에도 구글의 각종 서비스를 연결하기 시작했다. 안드로이드도 크롬처럼 구글의 모바일 서비스를 경험할 수 있는 허브(Hub)로 다시 태어났다.
피차이는 안드로이드의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안드로이드 원' 프로젝트다. 안드로이드 원이란 인도 등 제 3세계 사용자에게 보급하기 위한 저렴한 스마트폰이다. 안드로이드 원을 통해 피차이는 인도 시장이 중국 스마트폰 제조사에게 잠식되어 구글 인터넷 서비스가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을 막고 인도에 구글의 인터넷 서비스를 보급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피차이는 여러 기업에게 CEO로 합류하라는 제안을 받게된다. 페이스북에 밀려 흔들리고 있던 트위터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심지어 MS가 스티브 발머의 뒤를 이을 CEO로 피차이를 고려하고 있다는 소문까지 돌기도 했다. (MS에 따르면 이는 낭설이다. MS의 이사회는 CEO를 철저하게 내부 직원에서 뽑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피차이는 이러한 제안을 모두 거절하고, 은둔형 경영자인 래리 페이지의 대변인이자 구글의 2인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구글의 모든 대외 활동에 래리 페이지 대신 피차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때문에 실리콘밸리에는 래리 페이지가 자신의 후계자로 피차이를 점찍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협업이 바로 혁신의 원동력, 피차이의 리더십
2015년 8월 구글은 지주회사 알파벳을 설립하고, 기업을 분야 별로 여러 개로 나눈다는 결정을 내렸다. 기존의 구글 경영진이었던 래리 페이지, 세르게이 브린, 에릭 슈미트는 알파벳의 경영진으로 자리를 옮겼다. 구글의 경영진 자리는 공석이 되었다. 이 자리에 피차이가 앉았다. 크롬과 안드로이드라는 구글의 주력 서비스를 성공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피차이는 2015년 10월 구글의 최고경영자로 임명되었다. 래리 페이지가 그룹 전체의 방향성을 결정하고 세르게이 브린이 인공지능 등 구글의 미래 먹거리를 찾고 이를 개발하는 작업을 진행하는 반면, 피차이는 구글의 핵심 사업(검색, 지메일, 안드로이드 등)과 캐시카우(인터넷 광고)를 관리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래리 페이지는 피차이에게 4억 3300만 달러의 구글 주식을 주기로 하는 등 피차이의 능력을 크게 신뢰하고 있다.
피차이가 이끄는 구글의 현재 목표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인터넷 검색과 모바일 기업에서 데이터와 인공지능 기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이다. 이를 위해 구글은 데이터 통합과 인공지능 기술 개발 등에 전사적인 역량을 쏟아붓고 있다. 두 번째는 구글의 서비스와 안드로이드 기기를 이용하지 않고 있는 전 세계 50억 명의 사용자에게 구글의 서비스와 안드로이드 기기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여러 기업과 파트너십을 맺고 이들에게 구글의 서비스와 안드로이드를 공급하고 있다.
피차이는 어떤 경영 철학을 가지고 구글을 운영하고 있을까. 다음은 구글 운영을 두고 한국 언론이 피차이와 나눈 1문 1답이다.
Q. 구글도 기업인 만큼 언젠가 위험에 맞닥뜨릴 수 있다. 위험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안드로이드, 유튜브. 솔직히 지금 전 세계에서 제일 잘나가는 서비스다. 하지만 10년 뒤에는 모두 퇴물이 될 것이다. 시장에서 하나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변해야 한다. 혁신해야 한다. 기업에게 혁신은 선택이 아니다.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문제다."
Q. 구글은 다른 기업과 무엇이 다른가?
"내가 처음 구글에 들어오고 구글이 전에 다니던 기업과 전혀 다른 원리를 가지고 움직인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전에 다니던 기업은 일을 추진하고자 하면 관리자가 '왜 그것이 안되는지', '현재 방식이 얼마나 좋은지'부터 설명했다. 구글의 관리자는 '무엇부터 바꿔볼까', '어떻게 바꿔볼까'부터 물어봤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바로 지메일과 크롬이다."
Q. 신사업을 추진하면서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없는가?
"언제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 크롬을 개발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서비스를 출시하기 앞서 사용자들이 이를 이용하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다. 하지만 기업은 실패를 두려워 해서는 안된다. 주변의 시선이 두려워서 신 사업 추진이 막혀서도 안된다. 구글이 처음 지메일, 안드로이드 등을 시작할 때 비관적인 전망이 우세했다. 유튜브를 인수하자 언론은 이를 '너무 비싸게 구매했다', '수익을 낼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등의 기사를 쏟아냈다. 하지만 이 서비스들은 모두 성공했다."
"물론 사람은 언제나 실패를 한다. 사람의 모임인 기업도 당연히 실패를 한다. 하지만 실패했다고 좌절하면 안된다. 실패에서 무엇인가를 배우면 된다."
Q. 당신이 구글 CEO에 오를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
"내가 어떤 재능이 있는지 파악하는 것보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파악해야 한다. 나는 재능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택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 자연스레 노력을 하게 된다. 하고 싶은 일을 열정을 가지고 할 수 있게 된다."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을 찾아서 그들과 함께 일해야 한다. 그래야 성장할 수 있다. 편한 사람과 일하면 안된다. 익숙한 일과 사람 속에선 배울 것이 없다."
"사람은 인생 대부분을 직장에서 보낸다. 삶의 질을 높이고 싶다면 직장에서의 삶을 중요시 여겨야 한다. 동료와 협력하고 그들을 존중해야 관계가 원만해진다. 그러면서도 그들에게 끊임 없이 동기를 부여해야 한다. 그러면 훌륭한 팀이 꾸려진다. 혼자서 성장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동료와 함께 성장해야 한다. 개인의 성공보다 팀의 성공이 진정한 발전의 원동력이다."
Q. 구글이 끊임 없이 혁신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
"혁신은 비즈니스와 기술 업계의 근본 화두다. 기업을 이끌려면 끊임없이 혁신해야 한다. 이를 위해 높은 목표를 세워야 한다. 당연히 언제나 좋은 결과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혁신을 지속하면 언젠가 유효한 결과물을 낼 수 있다. 설사 그 결과물이 원했던 결과물이 아니더라도 결과물 그 자체가 기업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
"혁신을 이루려면 직원들이 창의적으로 일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직원들에게 항상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직원들이 기존의 것에 언제나 의문을 가지게 해야 한다. 무엇이든 바로 받아들이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과거에는 그냥 사진만 보관해주는 클라우드 서비스만 존재했다. 구글은 여기에 의문을 던졌다. 바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 사진을 자동으로 정렬해주는 사진 보관 서비스는 없냐고 직원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리하여 머신러닝을 활용해 사진을 자동으로 정렬해주는 서비스 '구글 포토'가 세상에 등장할 수 있었다."
Q. 구글은 어떤 기준으로 신규 사업을 시작하는가?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우선적으로 고려한다. 대표적은 사례로 자율 주행 자동차를 들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매일 자동차를 운전한다. 많은 시간을 자동차 속에서 보낸다. 자동차 때문에 많은 문제가 생기고 있다. 그렇다면 자율 주행 자동차를 개발하면 사람들의 시간을 풍요롭게 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구글이 자율 주행 자동차를 개발하는 이유다. 구글의 비즈니스 목표는 과학과 기술을 이용해 사용자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글 / IT동아 강일용(zero@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