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CEO 열전] 24살에 구글을 만들다, 래리 페이지
[IT동아 강일용 기자] 마이크로소프트와 빌 게이츠, 애플과 스티브 잡스, 페이스북과 마크 저커버그. IT 업계를 선도하는 기업과 그 기업의 창업자다.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이름이다. 감히 혁신의 아이콘이라고 부를 만하다.
하지만 셋 못지 않은, 어쩌면 셋보다 더 혁신적일지도 모를 한 사람에 대해선 잘 모른다. 래리 페이지(Larry Page), 구글의 공동창업자이며, 현 구글 지주회사 알파벳의 최고경영자. 세상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으로 손꼽히는 구글을 이끈 그의 삶과 철학을 이해하면 구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지 않을까.
<래리 페이지 구글 창업자 겸 알파벳 최고경영자>
*래리 페이지의 본명은 '로렌스 에드워드 페이지(Lawrence Edward Page)'다.
니콜라 테슬라를 존경한 컴퓨터 신동
래리 페이지는 1973년 미국 미시건주 이스트랜싱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칼 페이지는 미시건주립대학교 컴퓨터공학과 교수였고, 마찬가지로 모친 글로리아도 컴퓨터 교수였다. 컴퓨터를 전공한 부모 슬하에서 페이지 역시 컴퓨터 신동으로 자라났다. 6살부터 컴퓨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초등학교 숙제를 워드 프로세서로 작성해 제출하기도 했다. 그 학교에서 워드 프로세서를 사용한 첫 번째 학생이었다. 12살 페이지는 '니콜라 테슬라'에 대한 전기를 읽고, 그처럼 세상을 바꿀 혁신적인 발명가가 되길 꿈꾸게 된다.
페이지는 고등학교 졸업 후 미시건 대학교에 진학해 컴퓨터 엔지니어링을 공부했다. 부모와 마찬가지로 교수가 되고 싶었던 그는 스탠퍼드 대학원에 진학해 컴퓨터 사이언스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스탠퍼드 대학원에 진학한 페이지는 평생을 함께할 친구 세르게이 브린을 만나게 된다. 동갑내기인 브린과 페이지는 처음엔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웹 페이지에 관한 연구를 함께 진행하며 친분을 쌓게 된다.
<구글의 공동 창업자 래리 페이지(좌)와 세르게이 브린(우)>
웹 페이지에 가치를 매기다
페이지와 브린은 막 태동한 월드 와이드 웹(WWW)의 가치에 주목했고, 어떻게 하면 방대한 월드 와이드 웹 속에서 사용자에게 의미있는 웹 페이지를 찾아낼 수 있을지 연구했다.
사실 페이지가 처음부터 웹 페이지에 가치를 매기는 작업에 매진한 것은 아니다. 페이지는 모든 월드 와이드 웹을 백업하고 정돈(인덱싱)하는 방법에 대해 연구했다. 하지만 월드 와이드 웹은 연구원 혼자 백업하기에는 너무 방대했다. 페이지는 결국 자신의 아이디어보다 친구 브린의 아이디어인 웹 페이지에 가치를 매기는 방법에 대한 공동 연구를 시작하게 된다.
가치있는 논문은 많이 인용된다. 웹 페이지도 마찬가지다. 가치있는 웹 페이지는 다른 웹 페이지와 많이 연결(링크)되기 마련이다. 둘은 특정 웹 페이지가 어떤 웹 페이지와 링크되어 있고, 얼마나 링크되어 있는지 횟수를 분석함으로써 웹 페이지의 가치를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페이지와 브린은 이 연구 프로젝트에 '백럽(BackRub)'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어 웹 페이지의 가치를 파악하기 위해 웹 페이지를 뒤지는 검색 로봇(웹 크롤러)을 개발했고, 검색 로봇으로 수집한 링크 데이터를 분석할 페이지 랭크 알고리즘을 완성했다. 둘은 이 검색로봇과 페이지 랭크 알고리즘이 웹 검색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음을 파악했다.
구글의 탄생
개발 도중 백럽이라는 이름이 너무 촌스럽다는 지적을 받았다. 세상의 모든 웹 페이지를 품겠다는 의미에서 10의 100제곱, 사실상 무한함을 의미하는 구골(Googol)이라는 이름으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구골이라는 상표와 도메인은 이미 다른 곳에서 등록한 상태였다. 때문에 유사한 발음을 가진 '구글'이라는 이름으로 최종 결정됐다. 1996년 8월, 마침내 세계 최대의 검색 엔진 '구글'이 세상에 태어났다. 둘은 구글의 초기 버전을 스탠퍼드 대학교의 URL을 이용해 구축했다.
<스탠포드 대학교의 URL을 이용하던 초창기 구글의 모습 (사진: 위키피디아)>
구글은 큰 인기를 끌었다. 결국 둘이 남는 PC 부품과 리눅스를 조합해 얼기설기 만든 서버와 스탠퍼드 대학교의 URL이 구글을 감당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게 된다.
페이지와 브린은 구글을 판매하기로 정하고 야후, 알타비스타 등과 접촉해 매각에 대해 논했다. 매각 대금은 100만 달러 정도만 받아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기업가치가 약 6400억 달러(약 732조 원, 지주회사 알파벳 기준)로, 시가총액 전 세계 2위에 이르는 현재 상황을 생각해보면 헛 웃음이 나올정도로 초라한 가격이다.
당시 검색 엔진은 조악하기 이를데 없었다. 검색 로봇이 웹 페이지를 뒤져 사용자가 필요로 하는 정보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웹 페이지의 소유주가 검색 엔진에 자신의 사이트를 등록하는 식이었다. 검색 엔진보다 관문(포탈)이라는 이름이 더 적합한 시절이었다. 구글의 등장은 충격 그 자체였다.
<구글 본사에 전시 중인 최초의 구글 서버. 펜티엄2와 리눅스를 활용해 구축됐다>
하지만 정작 구글 판매는 난항을 겪게 된다. 구글의 검색 성능이 너무 뛰어나 사용자가 너무 빨리 포탈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웹 페이지 광고에 목매던 포탈의 입장에선 도입하기 어려운 기술이었다.
결국 페이지와 브린은 투자를 받아 구글을 하나의 회사로써 운영한다는 결정을 내린다. 구글에 최초로 투자한 사람은 썬마이크로시스템즈의 창업자 앤디 벡톨샤임이었다. 두 창업자의 열의와 구글의 가능성을 알아본 벡톨샤임은 별다른 설명도 듣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바로 10만 달러짜리 수표를 끊어줬다.
투자를 받은 둘은 스탠퍼드 대학교 연구실에서 독립한 후 수잔 보이치키(현 유튜브 최고경영자)의 집 창고를 빌려 구글을 창업한다. 이후 람 슈리람(벤처 캐피탈리스트, 현 구글 이사), 데이비드 체리턴(스탠퍼드 대학교수, 둘의 은사) , 제프 베조스(아마존의 창업자) 등의 투자를 받아 구글을 지속적으로 성장시켰다.
구글의 '삼두정치' 시스템
강력한 검색 기능과 검색어 광고 및 맞춤형 광고(구글 애드워즈, 구글 애드센스 등)를 통한 수익원 확보 덕분에 구글은 매섭게 성장했다.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를 강타한 '닷컴버블' 속에서도 구글은 건재할 수 있었고, 거품으로 가득찬 회사가 아님을 스스로 증명했다. 최고경영자로서 페이지는 이러한 구글의 성장을 지휘했다. 페이지와 브린은 구글이 기업공개(IPO)를 통해 더욱 성장할 수 있음을 확신하고 기업공개를 준비하게 된다.
하지만 투자자들이 보기에 페이지는 한 기업을 이끌기에는 너무 어렸고, 경험이 부족했다. 20대 초반 창업자가 넘치는 지금과는 상당히 다른 생각이다. 하지만 불과 10년 전만해도 통할법한 걱정이었다.
페이지와 브린도 이에 동의했다. 구글의 외적 성장을 내부 시스템이 따라가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내적 기틀을 잡고 대외 활동을 지휘할 경험많은 최고경영자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둘은 애플의 최고 경영자 스티브 잡스만이 구글을 이끌 사람이라고 주장했지만, 잡스가 애플을 떠날리 없지 않은가. 이내 고집을 꺽고 다른 적당한 사람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마침 에릭 슈미트가 물망에 올랐다. 슈미트는 썬마이크로시스템즈를 거쳐 노벨의 최고경영자를 역임한 인물이었다. 수십 년간 IT 업계에 종사하며 경영자로서 연륜도 충분했다. 처음 슈미트는 구글을 탐탁잖게 생각했지만, 페이지와 브린을 만난 후 생각을 바꾸게 된다. 둘의 비전과 통찰력에 감탄한 슈미트는 구글의 최고경영자 자리를 승낙했다. 2001년, 페이지는 구글의 최고경영자 자리를 슈미트에게 승계하고 자신은 창업자로서 슈미트에게 경영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10년 동안 구글의 얼굴은 슈미트였다. 페이지는 두문불출했다. 많은 사용자가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마크 저커버그에 대해서는 잘 알면서 페이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이유가 이것이다. 10년 간 대중 앞에 나서질 않았으니, 그 존재에 대해 잘 모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10년 동안 페이지가 구글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다. 슈미트를 도와 구글의 기업 공개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무엇보다 앤디 루빈과 만나 그의 아이디어인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를 5000만 달러에 인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현재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의 위상을 생각해보면 페이지의 선택이 우리 삶을 어떻게 바꿨는지 알 수 있다.
10년이 흐른 2011년, 연륜을 쌓은 페이지는 구글의 최고경영자로 복귀했다. 슈미트는 회장이라는 직함을 달았다. 최고경영자가 모든 것을 총괄하는 미국 기업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대단히 이례적인 결정이다. 이후 페이지가 경영을 총괄하고, 브린이 자율주행차, 헬스케어 등 차세대 기술 연구를 담당하고, 슈미트가 회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구글의 얼굴로서 활동하며 둘에게 경영에 관한 조언을 제공하는 '삼두정치' 체제를 확립했다.
경영에 복귀하고 래리 페이지는 직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회사가 실패하는 이유는 야망이 없기 때문이다. 벤처기업의 열정과 도전정신으로 회사를 운영해나갈 것이다.” 구글의 정체성과 미래 경영방향을 암시하는 발언이다.
<구글 자율 주행 자동차를 시연 중인 페이지, 브린, 슈미트. 흥미롭게도 셋의 관계를 암시한다. 페이지가 운전하고, 브린이 이를 돕고,
슈미트가 조언한다. (제공: 구글)>
지속적인 인수, 합병으로 회사의 체질을 바꾸다
페이지는 구글 설립 이후 지속적인 인수, 합병으로 회사의 새로운 먹거리를 모색했다. 구글이 설립된 이후 인수, 합병한 기업은 200여개에 이른다. 2003년에는 어플라이드 시멘틱(Applied Semantics)을 인수해 개방형 광고 프로그램인 구글 애드센스를 출시했고, 2006년에는 동영상 공유 서비스 유튜브를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16억 5000만 달러라는 거금으로 인수했다. 애드센스와 유튜브는 현재 구글을 먹여 살리는 주력 광고 수입원으로 자리매김했다.
2005년, 페이지는 앤디 루빈과 만나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를 구글의 것으로 매입했다. 이후 모바일 시대가 도래하자 이 결정은 손에 꼽힐 정도로 뛰어난 인수, 합병 사례가 되었다.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는 모바일 운영체제 시장에서 86%(2017년 1분기, 시장조사기관 가트너 기준), 전체 운영체제 시장에서 38%(2017년 1분기, 스탯카운터 기준)를 점유하며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이용되는 운영체제로 등극했다. 현재 안드로이드 운영체제가 탑재된 기기는 20억 대가 넘게 출하된 상태다.
페이지는 이후 모바일 광고 플랫폼 애드몹 등을 인수하며 웹에 이어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모바일 광고 시장도 차근차근 장악해나가기 시작했다.
2011년 경영 일선에 복귀한 페이지는 4년 동안 100여개가 넘는 기업을 공격적으로 인수, 합병하며 회사 체질 개선에 나섰다. 이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인공지능 기술 확보를 위해 관련 스타트업을 지속적으로 인수한 것이다. 인공지능 기술의 대부 제프리 힌튼 교수가 이끄는 인공지능 스타트업 DNN리서치, 데미스 하사비스가 설립한 인공지능 스타트업 딥마인드 등 수 많은 인공지능 관련 스타트업을 인수해 기술을 확보하고, 업계의 리더로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지속적인 인수, 합병과 함께 구글의 체질도 지속적으로 변했다. 검색 엔진에서 인터넷 광고 기업으로, 인터넷 광고 기업에서 모바일과 동영상 광고 기업으로, 모바일과 동영상 광고 기업에서 인공지능 기업으로. 페이지는 2000년대 초반부터 구글이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기업이 되길 꿈꿨고, 인수와 합병을 통해 이를 실현해나가고 있다.
물론 페이지와 구글의 인수, 합병이 언제나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성공 사례만큼 실패 사례도 많다. 스마트폰 제조사 모토로라, 로봇 스타트업 보스턴 다이내믹스, 인공위성 스타트업 테라벨라 등이 대표적인 구글의 인수, 합병 실패 사례다. 인수한 기업이 기존의 구글 조직과 융화되지 못했고, 결국 인수했던 당시 가격보다 싸게 시장에 되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페이지의 '기업 쇼핑'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인수, 합병이야 말로 기업의 체질을 효율적으로 바꾸고, 미래 성장동력을 확보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페이지는 특정 기업을 인수하기 앞서 '칫솔 테스트(Toothbrush Test Framework)'를 진행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해당 기업이 보유한 기술이 칫솔처럼 우리 삶에서 자주 이용되는지, 없으면 안될 정도로 유용한 기술인지 등을 파악한 후 여기에 부합하는 기업만 인수하는 것이다.
지주회사를 만들고 구글을 물려주다
2015년 8월, 페이지는 지속적인 사업 확장을 위해 구글을 지주회사 체제로 재편하기로 결정했다. 지주회사인 알파벳을 설립하고 구글의 특정 사업부서를 독립 회사로 분사해 사업의 효율성을 강화했다.
이를 통해 구글은 검색, 모바일, 광고, 사용자용 인공지능 등을 담당하는 구글(Google), 헬스케어와 바이오 산업을 담당하는 칼리코(Calico), 사물인터넷과 스마트홈을 담당하는 네스트(Nest Labs), 자율주행차를 담당하는 웨이모(Waymo), 이동통신사업을 담당하는 파이버(Fiber), 기업용 인공지능을 담당하는 딥마인드(Deepmind), 벤처 투자를 담당하는 캐피탈지(Capital G), 미래 사업을 연구하는 엑스(X) 등으로 분리되었다.
이 모든 회사를 총괄하는 지주회사가 알파벳이며, 현재 페이지는 알파벳의 최고 경영자다. 세르게이 브린은 알파벳의 공동 사장이며, 에릭 슈미트는 알파벳의 회장(이사회 의장)을 담당하게 되었다. 페이지는 원래 자신이 담당하던 구글 최고경영자 자리를 크롬 웹 브라우저 개발을 지휘해 인터넷 시장에서 구글의 영향력을 확대한 인도인 개발자 순다 피차이에게 물려줬다.
소통이 바로 혁신의 비결
페이지는 컴퓨터 공학자로서의 능력뿐만 아니라 경영자로서의 능력 역시 탁월하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거대한 기업을 일궈낸 그의 경영철학은 본받을 점이 많다.
먼저 구글의 소통 시스템 'TGIF(Thank’s God It's Friday)'를 들 수 있다. 구글은 매주 금요일 점심에 모든 직원이 한 군데 모여 자신의 생각을 전직원에게 알릴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자신의 새로운 아이디어, 회사 경영 방식에 대한 불만 등 무엇을 말해도 된다. 페이지를 포함한 모든 임원은 이 자리에 참석해 직원들의 의견을 듣고, 자신들의 생각을 직접 설명해준다. 한국 기업은 물론 미국 기업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혁신적인 정책이다.
TGIF를 통해 직원들의 불만은 줄어들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발굴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페이지의 생각은 주효했다. 이메일 용량이 너무 적다는 직원의 아이디어를 듣고, 10GB 이상의 이메일 용량을 제공하는 지메일을 출시한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후 지메일은 10억 명이 넘는 사용자가 이용하는 구글의 대표 서비스로 거듭났다.
현재 TGIF는 이름과 달리 목요일 점심에 진행한다. 이유가 놀랍다. 금요일에 TGIF를 진행하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전세계 구글 직원들이 아이디어를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토요일에는 쉬어야 하지 않겠는가. 때문에 진행하는 요일을 앞당겼다.
직원의 업무 스케줄인 '8:2 시스템'도 주목할 만하다. 구글의 모든 직원은 일주일의 4일은 자신의 본업(Job)에, 하루는 자신이 하고 싶은 업무에 종사할 수 있다. 구글 내부에서 할 수 있는 업무면 무엇이든 허용된다. 강제도 아니다. 일주일 내내 본업에 종사해도 된다. 하지만 8은 본업을, 2는 하고 싶은 업무를 처리하는 것을 정책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업무를 처리할 수 있게 된 직원들은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카드보드가 대표적인 사례다. 직원 두 명이 장난삼아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이제 가상현실 업계를 선도하는 혁신적인 기술로 거듭났다. 구글에 근무하는 한국인 개발자의 경우 자신의 본업 외에도 국내 웹 환경을 보다 검색 친화적으로 바꾸는 작업에 매진하기도 했다.
은둔형 최고경영자지만 영향력은 최고
페이지는 전형적인 은둔형 최고경영자다. 대중과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드물다. 대부분 슈미트나 순다 피차이 구글 최고경영자에게 위임하고 있다. 틈만 나면 최고경영자가 대중과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는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페이스북과 대조적인 모습이다.
노출을 꺼리는 페이지의 성격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페이지 본인의 건강이 그리 좋지 않아서라는 설에 무게가 실린다. 신경 손상으로 인한 성대 마비 때문에 페이지는 말을 오래하는 것 자체를 버거워하는 상황이다. 목소리도 많이 쉬었다.
그가 대중과 언론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서 그의 영향력이 작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IT 기업 창업가 가운데 가장 크다고 평가할 수 있다. 게이츠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손을 떼고 기부 활동에 전념하고 있고, 잡스는 슬프게도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저커버그가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지만, 아직까진 페이스북보다는 구글의 영향력이 더 크다.
페이지는 아직 젊다. 이제 겨우 44살이다. 그의 혁신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 겨우 시작일지도 모른다. 페이지의 생각이 우리 삶을 어떻게 바꿀지 지켜볼 일이다.
쓸데 없는 얘기를 하나만 더 하자. 페이지는 젊은 시절 연구한 월드 와이드 웹을 백업한다는 계획을 결국 실천에 옮겼다. 구글을 설립하고 전세계 19위(포브스 2015년 기준)의 부자가 된 그는 구글의 막대한 서버를 이용해 전세계 웹 페이지를 백업하고, 사라진 웹 페이지를 사용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캐시 페이지 보기 서비스). 검색과 함께 어엿한 구글의 주력 서비스다. 혹시 특정 웹 페이지가 사라져 곤란함을 겪은 사용자라면, 전세계 웹 페이지를 백업하겠다는 페이지의 발칙한(?) 생각에 감탄하며 캐시 페이지 보기 서비스를 이용해보는 것은 어떨까.
글 / IT동아 강일용(zero@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