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으로 소통하고 웃는 재미 느끼세요" - 김기웅 보드게임 작가
[IT동아 안수영 기자] 재미있는 영화 속에는 영화 감독과 스텝들의 노고가, 감동적인 소설책의 한편에는 작가의 노력이 깃들어 있다.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콘텐츠들은 그 기쁨과 감동을 고민한 창작자들의 고뇌가 있기에 세상에 탄생할 수 있었다.
보드게임도 마찬가지다. 흔히 보드게임은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놀이'라 불리는데, 누구나 재미있게 즐기는 게임을 만들기란 결코 쉽지 않다. 과연 실제로 보드게임을 만드는 과정은 어떠할지 김기웅 보드게임 작가와 이야기를 나눠봤다. 김기웅 보드게임 작가는 지난해 '잘그락 왕국'으로 2014년 독일 에센 박람회에서 화제를 불러모았으며, 올해는 추리 보드게임 '비밀요원 D'를 출시했다.
추리 보드게임 '비밀요원 D',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김기웅 작가는 2012년부터 보드게임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다. 그가 현재까지 출판한 보드게임은 총 3개다. 왕국을 건설하는 게임 '잘그락왕국', 쫓고 쫓기는 추적 게임 '체이싱앨리스', 주사위 추리 게임 '비밀요원 D'다. 세 작품 모두 재미와 작품성을 인정받아 보드게이머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잘그락 왕국은 2~4인이 즐길 수 있는 가벼운 전략 게임입니다. 플레이어들은 약 1시간 동안 한 왕국의 영지를 경영하게 되는데요, 최종적으로 누구의 영지가 크고 아름다운지 비교하고 누가 왕국에 더 공헌했는지 순위를 겨룹니다. 게임의 묘미는 마치 로또를 추첨하듯이, 주머니에서 목재 큐브를 뽑아 다양한 건물 카드에 배치하는 것인데요, 이러한 과정에서 건물의 기능이 발동되면서 연쇄 효과가 나타나 재미를 더합니다. 군사를 늘리고 영토를 넓히는 등 전략적인 요소도 버무려져 있습니다.
체이싱앨리스는 소규모로 출판된 2인 전용 게임입니다. 앨리스의 캐릭터들이 등장하지만, 게임은 쫓고 쫓기는 긴박한 분위기로 진행됩니다. 플레이어들은 게임 내내 서로의 흔적을 쫓아다니는데요, 상대방의 흔적을 먼저 찾아내는 사람이 승리합니다. 이 게임은 윈도우 PC의 '지뢰 찾기' 게임을 대결 구도로 비틀어낸 것인데요, 그래서 친숙하면서도 새로운 감각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게임은 어떻게 제작하는 것일까. 김 작가는 자신만의 아이디어와 주변 사람들의 조언을 조합해 게임을 완성한다고 답했다.
"특별한 장르를 의식하고 게임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우연히 떠오른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게임을 제작하되, 주변 사람들과 반복해서 테스트를 거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새로운 재미나 가능성을 발견하며 게임 규칙을 조금씩 손봅니다. 또한, 테스트를 함께하는 분들의 취향과 조언에 따라 다시 다듬고 수정하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이렇게 하다 보면 하나의 게임이 완성됩니다.
예를 들면 '잘그락 왕국'은 전략 게임을 선호하는 게임 모임 분들과 함께한 결과물이고, '체이싱 앨리스'는 아기자기한 소품 같은 게임을 좋아하는 아내의 취향을 반영한 작품입니다. 첫째 아이가 이제 곧 6살이 되니까, 조만간 아이가 좋아하는 게임을 하나 만들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게임 규칙을 구상할 때 너무 많은 가능성을 열어놓다 보면, 망망대해 한 가운데 떠 있는 것처럼 막막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일부 조건을 제약하는 것이 오히려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저에게는 '비밀요원 D'가 그런 게임이었습니다"
김 작가가 이번에 출시한 '비밀요원 D'라는 게임은 '주사위로 플레이하는 게임'이라는 조건을 바탕으로 탄생시킨 작품이었다. 그는 비밀요원 D의 제작 과정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약 2년 전, 주사위를 활용한 게임들을 여럿 접했는데요. 저 역시 주사위 게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가지고 있는 여벌의 주사위가 많지 않아서, 일단 책장에 꽂힌 게임들 중에 주사위가 가장 많이 들어있는 게임을 꺼내 들었습니다. 국내에 정식 발매된 '페루도'라는 게임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색상별로 5개의 주사위가 있었고, 주사위를 굴리는 컵이 여러 개 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 컵 안에 주사위를 숨기고 서로 추리하는 게임이라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떠올리고 테스트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2014년 여름, 어느 정도 틀이 잡힌 게임을 코리아보드게임즈의 공모전에 접수한 결과, 좋은 평가를 받고 출판의 기회를 얻게 됐습니다"
게임 제작과정에서 페루도의 주사위를 이용했지만, 김 작가는 페루도와는 완전히 다른 재미와 규칙으로 '비밀요원 D'를 탄생시켰다. 비밀요원 D는 그 이름처럼 플레이어들이 비밀요원으로 활동하는 추리 보드게임이다. 영화 '미션 임파서블'을 보면 톰 크루즈가 동료들과 함께 목적지의 깊숙한 곳에서 정보를 빼내는 장면이 나온다. 마찬가지로 비밀요원 D도 건물에 은밀하게 침투해 높은 가치의 정보를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비밀요원 D의 게임 개요는 이렇습니다. 게임이 시작되면 3~4개의 건물과 각각의 장소에 숨겨진 정보의 가치가 공개됩니다. 각 플레이어들은 이를 보고 자신의 목적 장소를 은밀하게 결정합니다. 그리고 게임 내에서 주사위들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도움이 될 주사위들을 모을수록 자신의 목적지에 대한 정보가 다른 플레이어에게 드러나게 됩니다.
목적지가 발각된 플레이어는 즉시 게임에서 탈락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차례에서 어떤 주사위를 가져올 것인지 신중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이와 동시에, 상대방이 가져간 주사위를 예의주시해 상대방의 목적지를 추리하면 상대를 먼저 탈락시킬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위장과 추리의 과정이 '비밀요원 D'의 핵심 재미입니다"
게임에 걸리는 시간은 약 30분이며, 초등학교 저학년 이상의 연령이라면 즐겁게 플레이할 수 있다. 김 작가는 "공식적으로는 3~5인이 즐길 수 있는 게임이지만, 2인용 규칙도 테스트 중이다"라고 덧붙였다.
"보드게임을 하다 보면, 마주보고 앉아있는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재미를 느끼고 소통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느낌이 좋아서 보드게임 제작까지 하게 된 것 같아요. 평소 게임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보드게임을 통해 사람들과 웃고 집중하고 이야기하는 데 큰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보드게임 제작의 첫 걸음, 작은 아이디어로 도전하세요
김기웅 작가는 전업 보드게임 작가는 아니지만 꾸준히 작품 활동을 펼쳐나가고 있다. 그가 보드게임 디자인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 게임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게임 제작에 대한 로망을 꿈꿔왔다고 회상했다.
"학창 시절에는 주로 온라인 게임에 관심을 가졌는데요, 중학생 당시에는 게임 제작 모임에 구경꾼 수준으로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가정을 꾸린 뒤, 아내와 집에서 같이 할 수 있는 취미를 찾다가 '아그리콜라'라는 보드게임을 접하게 됐습니다. 이후 아내와 함께 다양한 보드게임들을 즐기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어릴 적 꿈을 떠올리며 하나 둘 게임을 만들어보게 됐습니다"
그는 보드게임 디자인이 일과 함께 병행하기에 좋은 취미생활이자 부업이며,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현실화하며 기쁨을 느끼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게임 아이디어는 생각만으로 가능해서 만원 버스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간단한 프로토타입 제작은 종이, 펜, 가위만 있으면 가능합니다. 실제로 국내외 보드게임 디자이너들은 본업을 따로 갖고, 생활 속에서 틈틈이 작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가족, 친구들과 같이 즐기고 만들어 나가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입니다"
최근에는 보드게임 제작에 도전하는 이들도 점차 늘고 있고, 보드게임 제작을 위한 크라우드 펀딩 환경도 차차 조성되는 중이다. 아직 해외 선진국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국내 보드게임 제작 환경도 점차 개선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보드게임 시장이 부흥기에 접어들면서, 전세계에서 1년 동안 발매되는 신작 보드게임의 개수가 크게 늘었습니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아시아 지역에서 보드게임에 대한 관심이 커졌습니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근래에는 국내외 출판사에서 제작되는 한국 디자이너의 게임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최근에는 게임 전시회나 공모전, 혹은 관련 회사와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게임을 출판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보드게임은 비교적 소규모 자본으로 제작할 수 있는데요, 이에 텀블벅 등의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를 통해 제작되는 게임도 늘고 있습니다. 이제는 좋은 게임이라면 어떤 형태로든 출판이 가능한 시대가 됐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보드게임 제작을 꿈꾸는 독자들을 위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이, 보드게임 제작의 첫 걸음은 어렵지 않습니다. '모든 게이머에게는 각자의 게임이 있다' 는 말이 있는데요, 이 말처럼 게임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자신만의 아이디어가 떠오르게 마련입니다. 디지털 게임 제작은 프로그래밍의 소양이 있어야 가능하지만, 보드게임 제작은 글씨 쓰고 가위질만 할 줄 알면 가능합니다.
다만, 내가 만든 게임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재미있는 작품이 되려면, 반복적인 테스트와 수정을 거쳐야 합니다. 게임이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그 과정은 훨씬 더 길어집니다. 따라서, 보드게임 디자인에 처음 도전하신다면, 가급적 간단한 게임을 만들어 볼 것을 권합니다. 그리고 한국보드게임개발자모임(Korea Boardgame Designers Association, KBDA) 등 보드게임 디자이너 모임에 참여해,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처음 몇 개의 게임은 고치고 고치다가 그냥 버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자신이 생각하는 재미가 구현된 게임이 탄생할 것입니다. 나아가 국내외 많은 사람들에게 그 재미를 전파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 해당 기사에 대한 의견은 IT동아 페이스북(www.facebook.com/itdonga)으로도 받고 있습니다.
글 / IT동아 안수영(syahn@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