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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게임의 세계] 촉감으로 느끼는 전략성, '잘그락 왕국'

안수영

잘그락 왕국

잘그락 왕국 (2014) <출처: divedice.com>

보드게임 업계에서 새로운 '게임 구조'가 개발되면 많은 이목이 쏠린다. 예를 들면 케일러스(Caylus, 2005)나 도미니언(2008) 등의 보드게임은 새로운 게임 구조를 선보이며 많은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이처럼 새로운 게임 구조는 색다른 장르를 개척했다 할 만큼, 이후 다양한 게임들이 개발되는 데 큰 영감을 주기도 한다.

2014년 전세계 보드게이머들을 흥분하게 한 새로운 게임 구조가 있었는데, 바로 '풀 빌딩(Pool building)'이다. 풀 빌딩은 플레이어들이 게임을 시작할 때 자원 세트를 받고, 게임을 플레이하며 다른 자원을 가져와 자원 세트를 늘려가는 게임 방식이다. 보통 새롭게 가져오는 자원은 플레이어의 능력을 확장하며, 이후 게임을 이끄는 데 다시 투입된다. 이 과정에서 재투자되는 자원의 효율성이 플레이어들 간의 승패를 좌우하게 된다.

재미있게도 같은 해에 이 게임 구조를 제시한 게임이 동시에 3개나 발매됐다. 그 중 하나가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잘그락 왕국'이다.

게임 방법

잘그락 왕국은 혼란에 빠진 왕국을 배경으로 한 전략 보드게임이다. 각 플레이어들은 왕국의 영주가 되어 시민들을 운용하고, 건물을 짓고 영토를 확장해야 한다.

잘그락 왕국의 공용 게임판

잘그락 왕국의 공용 게임판 <출처: divedice.com>

잘그락 왕국은 3시대(9라운드)를 지나 가장 높은 명성을 쌓은 플레이어가 게임에서 승리한다.

잘그락 왕국은 1~3라운드가 1시대, 4~6라운드가 2시대, 7~9라운드가 3시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시대가 끝나면 추가 점수를 계산한다. 따라서 시대 시작 전에 계획을 잘 세워, 각 시대가 끝났을 때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먼저 공용 게임판을 펼쳐 테이블 중앙에 놓고, 라운드 표시 마커를 1시대에 놓는다. 건물 카드를 색깔, 시대별로 구분해 쌓아두고, 각각 2장씩 펼친다. 인물 카드를 섞어 인원 수에 맞게 펼치고, 남은 인물 카드는 게임에서 제거한다.

플레이어들은 순서를 정해 '플레이 순서 카드'를 가져가고, 선택한 색상의 모든 '표시 마커'와 '개인판'을 가져간다. 플레이 순서에 따라 명성 트랙에 점수 표시말을 놓고, 플레이어의 본거지가 되는 성 마커를 공용 게임판에 배치한다. 이 게임에서는 명성 트랙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가진 사람이 시작 플레이어가 된다. 같은 칸에 있을 경우, 다른 말 위에 있는 플레이어가 시작 플레이어가 된다.

이 게임에서 시민 게임말은 5종류다. 평민(파란색 육각기둥), 부패한 관료(보라색 육각기둥), 병사(빨간색 육면체), 상인(노란색 육면체), 사제(녹색 육면체) 등이다. 이 5가지 시민 게임말을 한 곳에 모아두고, 모든 플레이어가 평민 4개와 주머니를 받아 게임을 시작한다.

각 라운드는 배치, 운영, 휴식 3개의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배치 단계

첫 번째 단계는 배치 단계다. 이 단계에서 플레이어는 대기 장소에 있는 시민을 개인판에 배치해, 이번 라운드에서 얻을 자원 및 건물 효과를 선택한다. 자원이나 건물 효과는 시민을 배치하면 즉시 얻을 수 있다. 개인판에 있는 건물은 2개의 칸을 가지고 있는데, 위에 있는 칸부터 채워야 아래 칸을 채울 수 있다. 시민은 건물에 표시된 색깔에 따라 놓을 수 있다.

배치 단계

배치 단계 <출처: divedice.com>

자원에는 병력, 골드, 명성 점수가 있는데 각각 영토 점령, 건설 및 후원, 점수 획득 및 시작 순서 결정에 사용된다.

건물의 칸에 따라 놓을 수 있는 말이 다르다.

건물의 칸에 따라 놓을 수 있는 말이 다르다. <출처: divedice.com>

운영 단계

배치 단계에 모든 게임 말을 배치했다면, 두 번째 단계인 운영 단계로 들어간다. 이 단계에서 플레이어는 영토 점령 및 건설, 후원을 할 수 있다.

먼저, 영토 점령은 병력을 사용해서 이루어진다. 플레이어의 성을 중심으로 병력 1개당 1칸씩 떨어져 있는 빈 영토를 정복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성에서 2칸 떨어진 영토를 점령하려면 병력 2개가 필요하다. 점령한 영토에는 플레이어의 마커를 올려둔다. 이렇게 빈 영토를 정복하면 명성 점수 2점을 즉시 획득한다.

중앙에 있는 왕궁을 점령하기 위해 빨간색 플레이어는 병력을 2개 소모해야 한다. 왕궁을 점령하면 라운드에 사용할 수 있는 시민이 1개 더 늘어난다.

중앙에 있는 왕궁을 점령하기 위해 빨간색 플레이어는 병력을 2개 소모해야 한다. 왕궁을 점령하면 라운드에 사용할 수 있는 시민이 1개 더 늘어난다. <출처: divedice.com>

상대방의 영토도 정복할 수 있다. 이 때는 내 성에서 상대방 점령지까지 떨어진 거리뿐만 아니라, 그 영토에 올려진 상대방의 마커를 더한 만큼 병력을 지불해야 한다. 이렇게 병력을 지불했다면 상대방의 마커를 돌려주고, 내 마커를 영토 위에 올려둔다. 상대방의 영토를 점령하면 5점의 명성 점수를 획득한다.

게임을 진행하다 보면 더 멀리 떨어진 영토를 정복하기 위해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한데, 이런 점수는 건물에서 얻을 수 있다. 플레이어들은 운영 단계에서 건물을 건설할 수 있다. 매 라운드마다 새 건물이 펼쳐지므로, 원하는 건물을 눈여겨 보는 것이 좋다. 단, 플레이어가 라운드마다 구매할 수 있는 건물은 1개이기 때문에, 다른 건물과의 조화를 고려해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건물은 색깔에 따라 상업, 종교, 군사 건물로 나뉜다.

건물은 색깔에 따라 상업, 종교, 군사 건물로 나뉜다. <출처: divedice.com>

건물의 구입 비용은 1시대에 2원, 2시대에 3원, 3시대에 4원이다. 건물은 게임이 끝났을 때 건물에 표시된 명성 점수를 추가로 주기 때문에, 가급적 매 라운드마다 구입하는 것이 좋다. 새로 건설하는 건물은 개인판에 표시된 기본 건물과 달리, 평민이 들어갈 자리가 없으니 참고하자.

운영 단계에서 할 수 있는 또 다른 행동은 후원이다. 각 시대가 종료되면 플레이어들은 후원에 따라 추가 점수를 받기 때문에, 후원은 매우 중요한 행동이다. 특히 후원에는 다양한 조건이 있어, 조건을 만족시킬수록 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자신에게 유리한 후원 조건을 찾고, 그에 맞는 인물 카드에 후원하면 된다. 단, 각 인물 카드에 대한 후원은 한 플레이어만 선점할 수 있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하다.

후원은 시대마다 다르다. 첫 번째 후원은 2원이지만, 2번째 후원부터는 1원씩 늘어 3원, 3번째 후원은 4원... 등으로 점차 비싸진다. 하지만 후원을 하면 점수를 많이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시대가 끝나갈 때 즈음이면 거의 대부분 후원이 이루어진다.

게임 중 골드가 없어 후원이나 건설을 못할 수도 있는데, 이럴 때는 세금 징수를 하면 된다. 플레이 순서 카드의 한 면에는 3점의 명성 점수가, 다른 한 면에는 1골드가 그려져 있다. 평소에는 명성 점수가 보이는 면으로 두었다가, 세금 징수 시 1골드 면으로 뒤집는다. 플레이어는 이 1골드를 사용할 수 있다. 단, 세금 징수를 하면 라운드가 끝났을 때 반대쪽에 있는 명성 점수 3점을 못 얻게 되니, 어느 쪽이 이득인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후원하기

후원하기 <출처: divedice.com>

휴식 단계

운영 단계가 종료되면 휴식 단계가 시작된다. 휴식 단계에는 개인판의 모든 게임 말을 휴식 장소로 옮기고, 새로운 시민 5개를 주머니에서 뽑아 대기 장소에 놓는다. 주머니에서 시민이 없어 더 이상 뽑을 수 없다면, 휴식 장소의 시민을 주머니에 넣고 흔들어 새로 뽑아야 한다.

단, 휴식 장소의 모든 시민이 주머니에 들어갈 때마다 '부패한 관료' 말도 함께 주머니에 들어가게 된다. '부패한 관료'는 게임 중에 거의 쓸모가 없다. 이 부패한 관료가 늘어날수록 주머니에서 게임 말을 뽑는 행위가 비능률적으로 변하고, 게임이 끝나면 부패한 관료 하나당 -2점을 얻기 때문이다. 따라서 게임 중 부패한 관료를 어떻게 관리하는지가 중요하다. 다행히 잘그락 왕국은 부패한 관료를 처리할 수 있는 다양한 건물들이 있으니 이를 활용하자.

플레이 순서 카드를 골드로 사용하지 않았다면 이 단계에서 3점을 받는다. 혹시 남는 병력, 골드가 있었다면 1개당 1점의 명성 점수로 바꿔 얻을 수 있다.

이렇게 모든 플레이어가 한 번씩 차례를 가졌다면 라운드가 종료된다. 획득한 점수에 따라 플레이 순서가 바뀌고, 다음 라운드를 시작하면 된다.

3개의 라운드가 끝날 때마다 시대가 저물고 점수 계산을 한다. 점령한 영토의 개수, 인물 후원에 따라 추가 점수를 얻는다. 9라운드가 끝나면 최종 점수를 계산한다. 최종 점수에는 개인판의 건물 점수를 더하고, 부패한 관료마다 2점씩 차감한다. 이렇게 최종적으로 가장 높은 점수를 획득한 플레이어가 게임에서 승리한다.

새로운 스타일의 게임 개발

잘그락 왕국의 프로모션 카드

잘그락 왕국의 디자이너 김기웅 작가와 아티스트 나준호 작가의 모습을 따라서 만들어진 잘그락 왕국의 프로모션 카드 <출처: divedice.com>

국내 보드게임 제작사인 피스크래프트(Piece Craft)의 김형렬 대표는 2012년 DIY(Do it yourself) Kit 보드게임을 처음 구상했다. 게임의 그래픽 이미지와 구성물과 규칙을 판매하고, 구매자가 직접 구성물을 조립해 보드게임을 즐기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김 대표는 가능하면 국내에서 쉽게 접하기 힘든 게임을 DIY kit으로 선보이고 싶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볼륨이 있고, 새로운 시스템을 사용한 전략 게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당시 유명 보드게임 블로거였던 김기웅 작가가 '내 주머니 속의 왕국'이라는 제목의 프로토 타입을 가져왔다. 이 게임은 여러 건물이 그려진 A4 용지 한 장에 큐브를 배치하는 게임이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큰 감명을 받고 즉시 제작에 착수했다.

내 주머니 속의 왕국

내 주머니 속의 왕국 <출처: divedice.com>

2012년에는 대세로 떠오른 덱 빌딩(Deck Building, 게임 시작 전에 받은 카드를 사용해, 다른 카드를 획득하면서 자신의 카드 더미를 늘려가는 방식) 게임 구조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당시 주사위로 하는 덱 빌딩 게임이 나오는 등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잘그락 왕국은 또 다른 독특한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게임이었다.

'내 주머니 속의 왕국'은 국내 아마추어 보드게임 디자이너들이 창작 게임을 선보이는 행사인 '비콘(BEACON 2012)'에 출품됐고, 해외 시장을 노리는 국내 퍼블리셔의 눈에 띄어 라이선스 계약이 진행됐다. 이 기간 동안 '내 주머니 속의 왕국'은 '잘그락 왕국'으로 제목을 변경해,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소량 제작돼 판매됐다.

잘그락 왕국 피스크래프트 판과 개인판

잘그락 왕국 피스크래프트 판과 개인판(2012) <출처: piececraft.com>

잘그락 왕국 피스크래프트판은 현재 게임보다 조금 더 어려웠다. 배치 단계 이전에 큐브를 통해 순서 경매를 하거나, 필요 없는 큐브를 영토에 놓아 점수나 골드를 획득하는 등 보다 복잡하지만 전략적인 규칙들이 꽤 많았다.

퍼블리셔와 라이선싱 계약이 체결된 이후, 잘그락 왕국 피스크래프트판은 판매가 중지됐다. 그리고 2014년 에센 박람회에 출품될 때까지 약 2년에 걸쳐 규칙 개정 작업이 진행됐다. 기존 게임의 밸런스 조절에 초점을 맞췄고, 3명의 담당자를 거치며 보다 전략성을 부여하기 위한 작업이 계속됐다.

사실 잘그락 왕국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인 '모양이 다른 시민 말'은 퍼블리셔의 열악한 개발 환경에 기인한다. 테스트 플레이를 위해 게임 샘플을 여러 종 준비하다 보니, 구성물이 부족해 샘플별로 토큰의 크기나 형태가 제각각이었다. 이를 본 잘그락 왕국의 출판 담당자가 '주머니 속에 서로 다른 모양의 시민을 넣으면 구별이 될 테니 재미있겠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이 아이디어에 따라 작은 크기의 육면체와 큰 크기의 육면체 등 다양한 토큰들이 테스트됐다. 그리고 다양한 변화를 거쳐 현재의 육각기둥과 육면체를 사용하게 됐다.

2가지 모양의 시민.

2가지 모양의 시민. 주머니를 채울 때마다 부패한 관료가 하나 추가하면서, 인재가 많이 모여 국가가 발전하면 부패한 관료가 조금씩 발생하는 것을 보여준다. <출처: divedice.com>

이렇게 변화한 아이디어는 카드를 섞는 수고를 덜고 손맛을 높인다는 수준에서 더 나아가, 풀 빌딩 게임 방식에 좀 더 차별성을 줄 수 있었다. 운에 따라 시민들을 뽑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만져보고 원하는 말을 뽑게 되면서 게임의 전략성을 한층 높인 것이다. 게다가 시민을 고르는 과정에서 주머니 속의 평민을 만지작거리게 되어, '잘그락' 왕국이라는 이름을 게임 과정에서 더 실감할 수 있게 됐다.

잘그락 왕국 피스크래프트판의 건물들.

잘그락 왕국 피스크래프트판의 건물들. 건물을 여러 번 이용할 수도 있었다. <출처: divedice.com>

잘그락 왕국에서 게임의 핵심이 되는 부분 중 하나는 시민과 건물들의 조합이다. 때문에 게임을 개발할 때 건물들의 밸런스를 맞추는 일이 매우 중요했다. 개발 초기에는 건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1 병력과 1 골드, 그리고 1 명성 점수의 가치가 엇비슷하게 되도록 조절을 했다. 평민을 통해서는 1의 가치를 얻을 수 있고, 병사나 상인, 사제와 같은 육면체를 이용하면 평민의 두 배인 2 혹은 그보다 조금 더 큰 가치를 얻도록 설정했다. 부패한 관료는 평민의 절반의 가치를 가지며 추가로 페널티를 부여했다.

하지만 밸런스를 맞추는 작업을 계속하다 보니, 명성 점수를 1.5점이나 2.5점과 같이 미세하게 조절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하지만 게임에서 0.5 단위를 사용하기에는 어색했고, 결국 명성 점수를 모두 두 배로 높이게 됐다. 처음에는 명성 점수가 너무 커서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테스트 결과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현재와 같이 1 병력, 1 골드 그리고 2 명성 점수의 밸런스가 탄생하게 됐다.

병력과 골드와 명성 점수의 체계가 갖추어지면서, 각 요소를 통해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을 좀 더 상세히 조절하기 시작했다. 명성 점수는 그대로 승리 조건이 되므로 문제될 것이 없었다. 병력의 경우, 기존 피스크래프트판과 같이 병력을 통해 영토를 늘려 점수를 얻는 방식을 유지했다.

가장 고민했던 요소는 골드였다. 골드를 이용해서도 병력이나 점수와 같이 승리할 수 있는 전략을 만들 것인지, 아니면 건물을 사고 병력을 만들고 시민을 늘리는 데 도움을 주는 정도의 보조적 기능에 머물게 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골드로 승리할 수 있는 전략을 만든다면 이를 어떻게 구현할지도 고민이었다. 골드로 추가 시민을 구매하거나 영토에 시민을 배치하거나 회수하는 아이디어 등 다양한 시도 끝에 개발된 것이 현재의 후원 시스템이었다.

인물 카드와 후원 시스템은 피스크래프트 버전의 잘그락 왕국과 현재 출시된 잘그락 왕국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후원 시스템은 상업 건물만으로도 명성 점수를 얻어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고안된 방식이었다. 골드라는 자원을 어떻게 명성 점수로 연결할 것인지를 고민하다가, 왕국에 영향력 있는 다양한 인물들을 후원한다는 개념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

인물 카드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다양한 캐릭터들이 후보군으로 떠올랐다. 왕국이니 당연히 왕과 왕비, 왕자와 공주들이 있을 것이고, 다양한 귀족들과 대신들도 인물 카드의 후보군이 됐다. 가장 먼저 탈락한 캐릭터는 왕이었다. 영주 역할을 맡은 플레이어들이 활약하려면 왕국은 혼란에 빠져 있는 편이 좋았고, 그러면 아무래도 왕이 없는 것이 나았기 때문이다. 왕이 죽었지만 여전히 나라가 혼란에 빠진 상태를 표현하려면, 왕위를 이어받을 왕자도 없거나 어려야 했다.

이웃집 몬스터의 게임 배경은 잘그락 왕국과 이어질 수도 있었다.

이웃집 몬스터의 게임 배경은 잘그락 왕국과 이어질 수도 있었다. <출처: divedice.com>

그렇게 왕비와 왕자 등 왕궁의 주변 인물들의 설정이 하나씩 완성됐다. 또한, 각각의 인물들의 특징과 어울리게 점수 체계가 만들어졌다. 이런 세부적인 설정은 젊은 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관련된 미스터리 게임의 소재로 사용될 만큼 매력적이었기에, 2015년 좋은 반응을 받고 있는 카드 게임인 '이웃집 몬스터(2015)'에 사용될 뻔하기도 했다.

김기웅 작가는 '이 게임이 주는 재미는 일종의 수학 퍼즐이나 퀴즈에 가깝다'고 말한다. 5개의 시민을 어느 건물 카드에 어떤 순서로 놓아야 가장 높은 병력, 골드, 점수가 나올지 계산해내는 과정은, 마치 x 값에 어떤 숫자가 들어갔을 때 f(x)의 최고값이 나올 수 있는지를 묻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작가는 "액션을 조합해 절묘한 콤보를 발동시켜서 돈과 병력의 한계치를 뽑아낼 때, 최고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재미는 프로토 타입부터 현재 판매되고 있는 게임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같은 시기에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게임들

재미있게도 2014년, 풀 빌딩 장르의 게임이 3개나 독일 에센 박람회에 선보였다. 잘그락 왕국, 오를레앙(Orléans, 2014), 하이퍼보리아(Hyperborea, 2014)가 그 주인공이다. 이들 게임은 서로 비슷하면서도 미묘한 차이가 있어 비교할 만하다.

오를레앙

오를레앙 <출처: boardgamegeek.com>

2015년 7월 현재 풀 빌딩 장르의 게임 중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은 dlp 게임즈(dlp Games)에서 발매한 '오를레앙'이다. 중세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게임은 다른 두 게임들과 달리 평화로운 상업 활동을 다루고 있다.

오를레앙은 20개의 라운드로 이루어져 있어 체감상 게임 시간이 긴 편이며, 각 라운드는 7개의 세부 단계를 가지고 있다. 플레이어들은 게임 말을 개인판에 배치해 명성을 쌓아가며, 각지에 교역소를 세워 큰 점수를 받아야 한다. 다양한 점수 체계가 있어 흥미로운 게임이다.

다른 두 풀 빌딩 게임과는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먼저, 오를레앙은 초판 기준으로 큐브가 아니라 종이 토큰을 사용하고 있다. 일반적인 색깔 큐브를 사용하는 '하이퍼보리아'나 2종류의 모양과 색깔이 다른 게임말을 사용하는 '잘그락 왕국'에 비해, 오를레앙의 종이 토큰은 내구성 및 손맛에서 아쉬운 편이다. 다만 종이 토큰이기 때문에 게임의 분위기를 잘 살리는 일러스트가 예쁘게 인쇄돼, 시각적인 즐거움은 다른 게임보다 큰 편이다.

플레이어들은 라운드마다 4개의 추종자 토큰을 뽑아 사용하는데, 이 토큰을 해당 라운드에 모두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특이하다. 잘그락 왕국의 대기 장소에는 추종자를 남길 수 없지만, 오를레앙은 필요에 따라 추종자 토큰을 남겨 다음 라운드를 기약할 수 있다. 하지만, 시장에 놓을 수 있는 토큰 개수에는 제한이 있어 토큰을 무한정 저장할 수는 없다.

게다가 다른 게임과 달리 '기술 토큰'이라는 재미있는 요소가 있다. 오를레앙에서 액션을 사용하려면 1~3개의 공간에 추종자 토큰을 놓아야 한다. 기술 토큰을 가져와 이 공간 중 원하는 1칸을 막아버리면, 게임이 끝날 때까지 나머지 0~2개의 공간만 추종자로 채워 해당 액션을 사용할 있다.

다른 게임에 비해 오를레앙이 우위에 있는 시스템이 하나 있다. 추종자를 공공 사업에 투입해 주머니 속의 토큰 순환에서 제외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잘그락 왕국이나 하이퍼보리아도 조금이나마 큐브를 제거하는 행동이 있지만, 오를레앙은 더 직접적이다. 공공 사업에 투입하면서 토큰을 제거하고, 그에 따른 이득도 얻을 수 있다. 이에 따라 게임에서 언제 토큰을 제외하는지도 하나의 전략으로 만들었다.

하이퍼보리아

하이퍼보리아 <출처: divedice.com>

하이퍼보리아는 플라스틱 피규어가 들어 있어 다른 게임들에 비해 큰 볼륨을 자랑하며, 중세 시대를 다룬 잘그락 왕국이나 오를레앙과는 달리 판타지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이 때문에 잘그락 왕국이나 오를레앙과 달리 각 플레이어 간 초기 능력을 다르게 설정할 수 있다. 각 종족마다 특별한 능력이 부여돼 있기 때문이다.

하이퍼보리아는 7개의 큐브로 게임을 시작해 한 차례에 3개씩 큐브를 사용하는 게임 방식을 택했다. 주어진 12곳의 공간을 2~3개의 큐브로 채우면 그 공간에 표시된 기술을 사용할 수 있다. 기술은 보통 이동이나 공격, 기술 개발(큐브 획득), 추가 기술 카드 획득, 점수 획득 등이다.

게임판에 명시된 색깔의 큐브를 사용할수록 더 좋은 보상을 받게 되어 있다. 큐브를 한 번에 모두 배치하지 않아도 되며, 큐브 하나만 배치하고 나중에 큐브를 놓아 기술을 완성시킬 수도 있다. 이를 통해 원하는 기능을 원하는 타이밍에 사용할 수 있다.

플레이어들 간 직접적인 공격과 방어가 이루어진다는 점은 잘그락 왕국이나 오를레앙과 확연히 다른 점이다. 다른 두 게임과 다르게 지형에 따른 변화가 있으며, 지형에도 도시나 폐허가 있고, 이를 이용할 수도 있어 지도가 더 세분화된 느낌이다.

다만, 다른 두 게임과 달리 기술 개발을 통한 큐브 획득이 꽤 오래 걸리는 편이다. 또한 한 차례에 사용할 수 있는 큐브의 숫자가 많지 않아, 큐브 조합을 통한 콤보의 재미를 느끼기가 쉽지 않다.

새로운 형식의 게임이 독일(오를레앙), 이탈리아(하이퍼보리아), 한국(잘그락 왕국)에서 각각 개발돼 동시에 선보이는 것을 보면, 세상에 비슷한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들, 그리고 그것을 실행으로 옮기는 특출난 사람들이 참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3가지의 게임들은 각각의 매력이 있어, 모두 한 번씩 해보고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세계를 놀라게 한 게임

앞서 소개한 잘그락 왕국의 사진을 보면, 한국 게임인데도 불구하고 건물이나 인물 카드에 영어가 표시되어 있다. 이는 잘그락 왕국이 기획 초기부터 세계를 노리고 다국어판으로 제작된 탓이다. 언어적 요소를 최대한 줄여 아이콘으로 바꿨지만, 게임 배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건물명이나 인물명은 생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영어로 된 카드만 보고 이 게임을 회피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하지만 이런 기획 덕에, 잘그락 왕국은 독일 에센 박람회 출품 당시 예상외의 호평을 받으며 조기 품절됐다. 독일이나 프랑스 회사가 아닌 먼 나라에서 온 게임이 이렇게 조명 받으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독일 에센 박람회에서 잘그락 왕국을 시연하고 있는 김기웅 작가

독일 에센 박람회에서 잘그락 왕국을 시연하고 있는 김기웅 작가 <출처: divedice.com>

사실 잘그락 왕국의 제작 당시, 국내 퍼블리셔는 하이퍼보리아가 제작 중이라는 소식을 미리 접하고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프랑스의 거대 보드게임 회사인 아스모디(Asmodee)에서 제작하는 게임이 잘그락 왕국과 비슷한 시스템으로 똑같이 판타지 중세 테마를 들고 발매된다는 소식은 제작사를 술렁이게 만들기 충분했다. 이 때문에 제작사에서는 세균전이나 커피숍 운영 등으로 테마를 변경해 차별화하자는 아이디어가 논의되기도 했다.

하지만 2년의 개발 기간을 두고 만들어진 이 게임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이 있었다. 결국 잘그락 왕국은 큰 변화 없이 그대로 출판됐고, 당당히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이 경쟁에서 호평을 받으며 '한국에서 온 보드게임'에 대한 인식을 한층 높이고 있다.

아직 해외에서는 이 게임을 구하기 어려워 많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지만, 언제든 좋은 평가를 받아도 이상하지 않은 게임이다. 국내에서는 구하기 쉬운 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 게임을 즐겨보길 바란다.

글 / IT동아 보드게임 필자 권성현
편집 / IT동아 안수영(syahn@itdonga.com)

※본 기사는 네이버캐스트 게임의 세계: 보드게임의 세계(http://navercast.naver.com/list.nhn?cid=2883&category_id=2883)에 함께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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