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선정 최우수 스타트업이 음란물?
[IT동아 강일용 기자] 2013년 최우수 스타트업으로 선정된 기업의 서비스가 음란물이라며 접근이 차단 당하는 황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웹툰(인터넷 만화) 서비스 '레진코믹스'가 25일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4시간 동안 불법/유해 정보 사이트라며 접근이 차단 당했다. 레진코믹스는 200여편의 웹툰을 유료 또는 무료로 연재하는 웹툰 서비스다. 700만 명 이상의 가입자가 레진코믹스를 통해 웹툰을 구독하고 있다. 미래창조과학부가 주관하는 2013년 글로벌 K스타트업 최우수상을 수상했고, 박근혜 대통령의 런던 순방 행사에 참여했으며, 2014년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국무총리상을 수상하는 등 국내 스타트업의 모범적인 성공사례로 꼽혀 왔다.
불법/유해 정보 사이트 차단은 특정 웹 서비스가 음란물 제공, 도박, 불법 의약품 및 식품 판매, 저작권 위반 등 건전한 사회 미풍 양속을 해칠 우려가 있다고 판단될 경우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가 취할 수 있는 조치다. 일반 사용자에겐 'http://www.warning.or.kr'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음란물 제공 사이트 소OO, 저작권 위반(및 음란물 제공) 사이트 비OOO 등이 방심위의 조치로 국내에서 접근이 차단된 상태다.
레진코믹스의 경우 음란물 제공이 문제가 됐다. 방심위 관계자는 "레진코믹스는 성행위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성기를 노출하는 등 음란물을 독자와 청소년들에게 여과없이 제공하고 있었다"며, "레진코믹스의 성인 인증 시스템은 법에 정해진 절차를 따른 것이 아닌만큼 성인 인증이 아닌 본인 인증에 불과하다"고 레진코믹스를 차단한 이유를 밝혔다. 때문에 24일 통신심의소위원회를 열어 접속 차단조치를 의결하고 9개 인터넷망사업자(ISP)에게 레진코믹스 접속 차단을 요구했다는 것이 방심위측의 설명이다.
레진코믹스는 즉각 반박에 나섰다. 레진코믹스 홍보담당 이성업 이사는 "레진코믹스는 스토리 전개상 필요한 경우에만 노출신이 게재되도록 하고, 그 경우에도 모자이크 처리를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방심위가 권고하는 아이핀 및 이동통신사 공인인증을 통해 성인인증 조치를 취함으로써 청소년의 성인물 접근을 엄격하게 차단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이어 "2012년부터 청소년 유해물에 해당하는 웹툰은 한국만화가협회의 자문을 거쳐 규제 여부를 결정해 왔는데, 이번에는 사전에 어떠한 통지도 없이 접근 차단 조치가 이루어져 당황스럽다"고 말했다.
통지 없이 접근 차단 조치가 이루어진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 방심위의 입장이다. 방심위 관계자는 "명예훼손 문제는 의견 제출 기회를 주도록 법에 규정되어 있지만, 음란물이나 성매매 등은 의견 제출을 받는 것이 의무가 아니다. 사용자 보호가 최우선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레진코믹스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서버가 해외에 있는 만큼 해외 사이트로 분류된다. 때문에 망사업자를 통해 접속을 차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법인과 직원이 국내에 있는 것과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레진코믹스측은 황당하다는 입장이다. 이성업 이사는 "레진코믹스가 구글의 클라우드를 통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만큼 서버가 해외에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이는 수많은 사용자에게 안정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경영상 판단이지, 딱히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며, "게다가 사용자에게 더욱 빠른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LG유플러스의 CDN을 사용하는 만큼 레진코믹스는 누가 뭐라 해도 대한민국의 웹 사이트가 맞다"고 강조했다. (참고: 인프라 구축이 막막한 스타트업, 구글 앱 엔진으로 오라 http://it.donga.com/18461/)
레진코믹스가 차단되자 인터넷 여론이 들끓었다. 언론은 앞다투어 관련 보도를 쏟아냈고, 결국 '레진코믹스'라는 검색어가 포털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차지하기에 이른다. 논란이 일어나자 방심위는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레진코믹스 홈페이지에 대한 전면 차단을 해제하고, 26일 열리는 통신심의소위원회에 사안을 재상정해 접속차단 조치를 유지할지 아니면 특정 콘텐츠와 메뉴만 부분 차단할지 결정할 계획이다.
레진코믹스가 계속 차단될지, 아니면 일부 서비스만 차단될지 아직 결정된 것은 없다. 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레진코믹스측은 "이번 방심위의 조치는 시정 요구 전에 의견진술 기회를 원칙적으로 부여하도록 한 방송통신위원회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에 위반되어 절차적 정당성이 결여되었을 뿐 아니라 음란성 판단도 대법원 및 헌법재판소의 기준에 어긋나는 판단이다. 재심의 결과에 따라 강력한 대응도 고려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한편, 레진코믹스는 자사의 서비스가 처음으로 포탈 실시간 검색어 1위를 한 것을 기념해 유료 구독자에게 추가 마일리지를 제공하는 이벤트를 실시하고 있다.
표현의 자유,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나
건조한 사실 나열은 여기까지 하고, 이제 이번 사건의 쟁점에 대해 얘기해보자. 결국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 번째는 '표현의 자유'다. 레진코믹스가 제공하는 웹툰이 성인이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콘텐츠인지, 아니면 음란물인지를 두고 양측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사실 레진코믹스의 관한 선정성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이는 레진코믹스가 처음부터 성인들을 위한 고품격 콘텐츠를 지향했기 때문이다. (참고: "유료 웹툰 정착의 도화선이 되겠다" http://it.donga.com/14853/) 레진코믹스 연재되는 웹툰 중에 성적 묘사 또는 폭력적 묘사가 섞여 있는 작품이 상당 수 섞여 있는 것이 사실이다. 레진코믹스가 일본의 영 어덜트(청소년) 콘텐츠를 번역 후 제공하기 시작하자 논란은 더욱 커졌다. 결국 구글 플레이스토어에서 성인물 제공을 이유로 앱이 반려당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이번 방심위의 차단 역시 이러한 일본의 작품이 문제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레진코믹스가 제공하는 영 어덜트 콘텐츠의 수위는 어느 정도일까? 성적인 요소가 없다고 부정할 수는 없지만, 어디까지나 양념 수준이다. 작품을 이어 나가는 전체 줄거리 흐름은 따로 있고, 성적인 요소는 부가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뜻. 더군다나 영 어덜트 콘텐츠인만큼 상반신 노출은 있어도, 하반신 노출은 자체적으로 검열하고 있다. 이를 두고 레진코믹스는 단순 성인 콘텐츠에 불과하다고 설명했고, 방심위는 청소년에게 악영향을 미치는 음란물이라고 지적했다. (레진코믹스가 청소년의 접근을 제대로 차단했는지 여부는 이번 논의와 관계 없으니 배제하자.)
표현의 자유를 두고 양측의 의견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둘의 대립이 계속 이어질 경우 결국 판단은 법원이 할 수밖에 없다. 대법원은 '전부 또는 대부분이 성적 흥미를 유발하는 것에만 치우쳐져 있고, 하등의 사회적 가치를 지니지 않는 것'을 음란물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클라우드 서비스를 사용하면 외국 홈페이지? 스타트업 하지 말라는 얘기
두 번째는 '서버를 해외에 두고 있으면 외국 홈페이지라는 방심위의 유권해석'이다. 많은 스타트업이 창업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퍼블릭 클라우드를 활용해 서비스를 구축하고 있다.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IBM 등이 퍼블릭 클라우드를 제공하는 대표적인 회사다. 모두 외국 회사고, 데이터센터 역시 외국에 존재한다. 방심위의 입장에 따르면, 국내 스타트업이 제공하는 웹 서비스의 상당 수가 (국내에 직원이 있고, 국내에서 법인을 세웠으며, 국내에 세금을 내는 대도 불구하고) 해외 사이트라고 해석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방심위는 해외의 유해 사이트를 모두 차단한다는 강경한 입장을 취해왔다. 스타트업의 웹 서비스가 방심위의 결정 하에 언제든지 전면 차단 당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제 막 서비스를 시작한 스타트업에겐 사형 선고나 다름없다. 추후 이의를 제기해서 차단을 해제할 수 있다지만, 그 때까지 경제적 기반이 미약한 스타트업이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다. 방심위의 유권해석이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에 얼마나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내용 추가(26일 오후 4시)
방심위는 26일 통신심의소위원회를 열고 레진코믹스에 대해 24일에 내린 접속차단을 철회하기로 결정했다. 방심위 관계자는 레진코믹스에 음란성
문제가 있는 일본 만화 등이 게재된 것은 사실이지만, 전체 웹사이트 차단은 과잉이라고 보고 차단 범위 설정을 다시 검토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서비스 전체 차단 대신 음란물만 부분 차단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겠다는 설명이다. 방심위는 향후 레진코믹스 콘텐츠 차단 범위와 양을 신중하게
설정한 후 통신심의소위원회에 다시 상정해 재심의를 진행할 계획이다.
글 / IT동아 강일용(zero@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