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임의 세계] 압도적 공포와의 한 판 대결, '아컴 호러'

안수영 syahn@itdonga.com

아컴 호러(2005)
아컴 호러(2005)

아컴 호러(2005) <출처: divedice.com>

생전에는 소수 마니아 층에게만 지지를 받다가 사후에야 공포문학계의 거장으로 손꼽힌 작가, H.P. 러브크래프트(Howard Phillips Lovecraft, 1890-1937). 그는 자신의 문학 작품에서 공포의 배경이 되는 공간이자 도시를 창조했는데, 바로 '아컴시(Arkham City)'다.

가상의 도시 아컴시
가상의 도시 아컴시

가상의 도시 아컴시 및 러브크래프트 소설의 배경들은 매사추세츠 주에 주로 있다. <출처: Wikipedia.org>

러브크래프트는 자신이 태어난 로드아일랜드주 프로비던스(Providence)시 인근에 이 가상의 도시(아컴시)를 창조했다. 아컴이라는 명칭은 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 신화를 완성한 인물로 꼽히는 어거스트 덜레스(August Derleth, 1909-1971)가 만든 출판사의 이름과도 동일하다. 러브크래프트가 만든 가상 세계는 보드게임으로도 만들어졌는데, 바로 '아컴 호러'다. 아컴 호러는 아컴시에서 일어나는 공포스러운 사건들을 해결해 나가는 게임이다.

게임 방법

아컴호러의 게임판
아컴호러의 게임판

아컴호러의 게임판 <출처: divedice.com>

아컴 호러는 다른 플레이어들과 함께 힘을 합치는 협력 게임이다. 플레이어들은 다양한 능력을 지닌 16명의 캐릭터 중 하나씩을 맡아 게임 속 상황에 대응한다. 겉보기에는 평화로운 도시인 아컴에서 갑자기 다른 세계로 통하는 차원문이 열리고, 그 차원문을 통해 괴물이 쏟아져 들어온다. 플레이어들은 힘을 합쳐 차원문을 닫고 괴물을 소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크툴루, 이그, 아자토스, 니알라토텝, 요그소토스 같은 고대의 악마들이 세상에 풀려 나오고, 이 세상은 종말을 맞게 될 것이다.

아컴 호러의 고대신들
아컴 호러의 고대신들

_아컴 호러의 고대신들은 총 8종류로, 게임 시작시 1개를 골라 시작한다. 다시 말해 최소 8번은 게임을 해야 모든 콘텐츠를 경험해볼 수 있다. <출처: divedice.com> _

게임은 승리 조건을 달성할 때까지 여러 라운드로 이루어지며, 각 라운드는 '유지, 이동, 아컴에서의 조우, 다른 세계에서의 조우, 신화'의 다섯 단계로 이루어진다.

1. 유지 단계

유지 단계가 되면 각 플레이어는 게임판의 현재 상황을 파악하고, 그 라운드에 할 일을 계획하면서 캐릭터의 상태를 조절한다. 지도 상에서 먼 곳으로 가기 위해 이동력을 높여두거나, 괴물을 피하기 위해 은신 수치를 올리거나, 괴물과의 전투에 대비해 의지력과 힘을 조절할 수 있다.

16개의 조사자들 중 원하는 캐릭터를 선택하면
된다.
16개의 조사자들 중 원하는 캐릭터를 선택하면 된다.

16개의 조사자들 중 원하는 캐릭터를 선택하면 된다. 각 캐릭터마다 고유의 스토리가 있다. <출처: divedice.com>

2. 이동 단계

맨디 톰슨은 속도가 2이기 때문에 남부로 내려가 고고학 연구학회로 2칸 이동할 수 있다. <출처:
divedice.com>
맨디 톰슨은 속도가 2이기 때문에 남부로 내려가 고고학 연구학회로 2칸 이동할 수 있다. <출처: divedice.com>

맨디 톰슨은 속도가 2이기 때문에 남부로 내려가 고고학 연구학회로 2칸 이동할 수 있다. <출처: divedice.com>

이동 단계가 되면, 캐릭터는 아컴시의 원하는 공간으로 이동한다. 이동 중 괴물을 만나면 전투에 돌입하거나 회피해야 한다. 차원문이 열린 장소에 도착하면, 해당 차원문을 통해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 이동 단계에 내 캐릭터가 다른 세계에 있다면 아컴으로 돌아올 수 있다. 게임 상에서 이루어지는 괴물과의 전투는 대부분 이 단계에 수행하게 된다.

이동을 하다가 괴물을 만나면, 이동을 멈추고 회피하거나 전투를 해야
한다.
이동을 하다가 괴물을 만나면, 이동을 멈추고 회피하거나 전투를 해야 한다.

이동을 하다가 괴물을 만나면, 이동을 멈추고 회피하거나 전투를 해야 한다. 캐릭터 시트의 능력치만큼 주사위를 굴리고, 주사위 눈이 5 또는 6인 주사위가 몬스터의 체력만큼 나오면 성공한다. <출처: divedice.com>

3. 아컴에서의 조우 단계 & 4. 다른 세계에서의 조우 단계

내 캐릭터가 위치한 구역의 카드를 뽑고, 해당 장소의 텍스트를 읽으면
된다.
내 캐릭터가 위치한 구역의 카드를 뽑고, 해당 장소의 텍스트를 읽으면 된다.

내 캐릭터가 위치한 구역의 카드를 뽑고, 해당 장소의 텍스트를 읽으면 된다. 사진의 경우, '숲'에 있는 텍스트를 읽고 수행하면 된다. <출처: divedice.com>

아컴에서의 조우 단계와 다른 세계에서의 조우 단계는 하나의 단계를 둘로 나누어놓은 것에 가깝다. 아컴시에 위치한 캐릭터는 아컴 지역에 관계된 카드를 뽑아 내용을 수행하고, 다른 세계에 위치한 캐릭터는 다른 세계에서의 카드를 뽑아 내용을 수행한다. 조우 단계에는 항상 특정한 사건이 발생해, 그 결과로 단서나 아이템을 획득하거나 체력이나 정신력을 회복 또는 상실하는 일이 발생한다.

5. 신화 단계

신화 카드
신화 카드

신화 카드. '방문하지 않은 섬'에서 차원문이 열리고, '끔찍한 실험'의 내용에 따라 게임의 상황이 급변한다. <출처: divedice.com>

마지막 신화 단계가 되면, 신화 카드 덱의 맨 위 카드를 뽑아서 그 카드에 나오는 상황을 따른다. 카드에서 제시하는 상황은 게임의 흐름을 일시적으로 혹은 지속적으로 변화시킨다. 카드에 표시된 장소에서 차원문이 열리고(이미 차원문이 열려 있는 장소라면 괴물들이 쏟아져 나온다), 괴물이 등장한 뒤 이동한다. 그리고 플레이어나 게임 속 상황에 영향을 끼치는 특정한 사건이 발생한다.

이런 식으로 5단계를 진행하면 1라운드가 끝나고, 승리조건을 달성할 때까지 혹은 플레이어들이 패배할 때까지 게임을 진행한다.

게임 중 정신력이나 체력을 모두 잃으면, 아컴 정신병원이나 세인트 메리 병원으로 이동하게
된다.
게임 중 정신력이나 체력을 모두 잃으면, 아컴 정신병원이나 세인트 메리 병원으로 이동하게 된다.

게임 중 정신력이나 체력을 모두 잃으면, 아컴 정신병원이나 세인트 메리 병원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때의 패널티는 매우 크니, 체력과 정신력을 적절히 관리해야 한다.

게임을 진행하기 전, 플레이어들은 협의를 통해(혹은 무작위로) 이번 게임에서 대적할 고대의 존재를 선택한다. 이 고대의 존재는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어, 이들이 깨어나면 플레이어들이 싸워 이길 가능성은 매우 낮다. 따라서 플레이어들은 고대의 존재가 봉인에서 풀려나기 전에 아컴시에서 차원문이 열릴 가능성이 있는 장소들 중 여섯 군데 이상을 봉인해야 한다. 특정한 장소를 봉인하려면, 한 플레이어가 그 장소에 열린 차원문을 통해 다른 세계를 탐사하고 돌아와야만 한다. 탐사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플레이어는 차원문을 닫고 봉인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차원문을 닫으려면, 차원문으로 들어가 다른 세계를 여행하고 돌아와야
한다.
차원문을 닫으려면, 차원문으로 들어가 다른 세계를 여행하고 돌아와야 한다.

차원문을 닫으려면, 차원문으로 들어가 다른 세계를 여행하고 돌아와야 한다. 사진은 공동묘지에 열린 차원문을 통해 드림랜드를 여행하며 사건과 조우한 상황. <출처: divedice.com>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한 플레이어가 다른 세계를 탐사하고 돌아오는 데 걸리는 기본 시간은 3라운드다. 이동해서 차원문 너머의 세계로 들어가 첫 번째 조우를 하는 라운드와 두 번째 조우를 하는 라운드, 두 번까지 조우를 끝낸 뒤 아컴시로 돌아와 차원문을 닫고 봉인하는 라운드로 구성된다.

그러나 차원문 하나가 새로 생기는 데는 대략 1.5라운드 정도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으니, 최대한 빨리 움직이려 해도 쉽지 않다. 게다가 차원문 하나가 열리면 반드시 괴물이 등장한다. 도시에 괴물이 일정 수 이상 증가하면 도시의 공포 상태가 점점 증가하고, 공포 상태가 증가하면 조력자들이 도시를 떠나면서 유용한 물건을 살 수 있는 상점들이 문을 닫는다. 차원문을 봉인하려면 도시 곳곳에 뿌려진 단서 마커를 얻어야 한다. 해야 할 일들이 많은 만큼, 모든 플레이어가 각자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해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포가 증가하면 조력자가 떠나고, 가게가 문을
닫는다.
공포가 증가하면 조력자가 떠나고, 가게가 문을 닫는다.

공포가 증가하면 조력자가 떠나고, 가게가 문을 닫는다. 사진은 공포치가 9까지 치솟아 예 올디 매지크샵을 비롯한 모든 상점이 문을 닫은 상황이다. <출처: divedice.com>

고대의 존재가 깨어나는 조건은 4가지다. 첫째는 차원문이 일정 개수 이상 열렸을 경우, 둘째는 괴물 토큰이 다 떨어져서 괴물을 더 이상 뽑을 수 없게 되는 경우, 셋째는 차원문 토큰이 다 떨어져서 차원문을 더 이상 뽑을 수 없게 되는 경우, 넷째는 고대 존재의 파멸 트랙이 다 차는 경우이다. 둘째와 셋째의 경우는 거의 일어나지 않으며, 주로 첫째와 넷째로 인해 고대의 존재가 깨어난다. 그런데 고대의 존재의 파멸 트랙은 차원문이 하나 열릴 때마다 채워진다. 또한, 차원문을 봉인할 때 고대 표식을 사용하면, 파멸 트랙에 올린 파멸 토큰을 내린다. 따라서, 결국 게임의 주목적은 차원문을 봉인하는 데 맞춰져 있다.

차원문을 봉인하려면 차원을 여행한 플레이어가 단서 토큰을 5개 사용해야
한다.
차원문을 봉인하려면 차원을 여행한 플레이어가 단서 토큰을 5개 사용해야 한다.

차원문을 봉인하려면 차원을 여행한 플레이어가 단서 토큰을 5개 사용해야 한다. 고대 표식을 사용하는 방법도 있다. (상)
차원문을 봉인하면 그 장소에서는 더 이상 새로운 차원문이 생기지 않고, 괴물도 나타나지 않는다. (하) <출처: divedice.com>

지도상에 차원문이 열릴 수 있는 장소는 11군데이며, 차원문이 한 번 열렸던 칸에서는 차원문이 다시 열리지 않는다. 따라서 초반 4-5라운드 동안에는 빠른 속도로 차원문이 열리면서 위기 상황이 연출된다. 하지만, 일단 차원문을 봉인한 장소에서는 다시 차원문이 열리지 않고 괴물도 나오지 않는다. 차원문이 열리고 이를 닫기 위한 여정을 계속하다 보면, 고대의 존재가 깨어나기 직전인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손에 땀을 쥐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고대의 존재
고대의 존재

고대의 존재 시트의 파멸 트랙이 모두 차면, 고대의 존재가 깨어난다. 플레이어들은 게임 중 얻을 수 있는 고대의 표식을 사용해 차원문을 닫고, 파멸 트랙이 차는 것을 늦출 수 있다.

러브크래프트와 크툴루 신화

오늘 밤이 지나면 나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에 나는 정신적으로 퍽 긴장한 상태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무일푼에다가 내 삶을 유일하게 지탱해 준 약마저 다 떨어져가는 상태라 더는 고통을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이 다락방 창문에서 저 아래 지저분한 거리로 몸을 던질 생각이다. 모르핀의 노예라고 해서 나를 나약하거나 타락한 사람이라고 생각지 않았으면 한다. 급하게 휘갈겨 쓴 이 글을 누군가 읽게 된다면, 전부는 아니더라도 내가 왜 망각 혹은 죽음을 선택했는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 H.P. 러브크래프트, 소설 <데이곤> 도입.

러브크래프트
러브크래프트

1934년의 러브크래프트

명성을 떨친 많은 작가들이 그러했듯이, 러브크래프트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작가 에드가 앨런 포(Edgar Allan Poe, 1809-1849)가 그러했듯, 러브크래프트 역시 생전에 그의 작품 세계를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48세의 나이에 대장암으로 사망하기까지 60여 편의 단편 소설과 3편의 중장편 소설, 10만 통으로 추산되는 서신을 썼다. 러브크래프트는 에드가 앨런 포의 심리적 공포 소설과 로드 던새니(The Lord Dunsany, 1878-1957)의 환상 문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여기에 화학과 천문학에 대한 지식을 결합해 '코스믹 호러(Cosmic Horror, 우주적 공포)'라는 독특한 장르를 만들었다.

그가 만든 코스믹 호러 장르 소설은 1917년 '데이곤'을 그 시작으로 볼 수 있다. 그가 가장 왕성하게 창작활동을 했던 시기는 1926년 고향인 프로비던스로 돌아간 시점 이후로 보인다. 그는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던 어머니를 1921년 여의었다. 그는 사랑했던 아내와의 이혼까지 경험한 뒤, 그의 대표작인 '크툴루의 부름', '더니치 호러', '광기의 산맥', '인스머스의 그림자' 등의 작품을 썼다.

그의 소설은 대부분 1인칭 시점으로, 기이한 세계를 직간접적으로 접한 화자가 자신이 접한 상황을 회고하는 형식을 지녔다. 그의 소설은 '아무도 내가 본 것을 믿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다'라는 식의 언급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잦다. 러브크래프트식의 공포물은 오늘날의 공포소설처럼 참혹한 살인이나 공포의 존재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를 중심으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음침하고 몽환적인 분위기의 묘사가 두드러지며, 기괴한 피조물이나 신적인 존재는 '형언할 수 없는 공포'라는 수준으로 진술한다.

러브크래프트는 여러 작품을 두루 관통하는 일련의 세계관을 만들었다. 흔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서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인간은 고대의 존재들이 만들어낸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점이 러브크래프트 세계관의 기본 바탕을 이룬다.

그의 세계관에 따르면 위대한 옛 존재(Great Old One), 외계의 신(Outer God)과 같은 신적인 존재들 앞에서 인간은 철저하게 무력하다. 심지어 위대한 옛 존재를 보면 주체할 수 없는 광기에 휩싸이기 때문에 그들 앞에 서는 인간들은 자기 손으로 자신의 눈을 뽑아버린다고도 한다. 그런 존재의 대표격인 신이 바로 크툴루이며, 위대한 옛 존재들이 지배하는 세계를 묘사한 이 신화를 '크툴루 신화'라고 한다.

코스믹 호러의 요소가 잘 녹아있는 영화
'미스트'
코스믹 호러의 요소가 잘 녹아있는 영화 '미스트'

코스믹 호러의 요소가 잘 녹아있는 영화 '미스트'

크툴루 신화에 나오는 이 신적인 존재들은 너무나도 강력해서 이들 앞에 선 인간은 철저하게 무력하다. 우주적 공포란 이들 신이 우주나 다른 차원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붙은 말이기도 하지만, 그런 거대한 미지의 세계 앞에 선 인간의 무력함을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하다. 1914년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을 러브크래프트와 직접적으로 연관 짓는 경우는 별로 없지만, 그 영향력을 부인할 수는 없을 듯하다. 격변의 시대 속에서 개인이 무력해지는 것은 우주적 공포와 유사성이 있다.

크툴루 신화의 세계관의 기본 틀은 러브크래프트가 만들었으나, 그의 소설 속에 파편적으로 거론된 이 세계에 '크툴루 신화'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한 것은 어거스트 덜레스다. 작가인 리차드 L. 티어니(Richard L. Tierney, 1936)는 러브크래프트의 작품과 덜레스의 작품을 구분하기 위해 덜레스 신화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덜레스가 변화시킨 가장 큰 요소는 고대신(Elder God)을 등장시킨 것이다. 이들 고대신은 선을 상징하고, 위대한 옛 존재나 고대의 존재(Ancient One)는 악을 상징해 크툴루 신화를 선악 구도로 구성했다.

이후, 크툴루 신화는 러브크래프트의 팬부터 심지어 후예를 자처하는 많은 공포문학 작가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수정 보완돼 구체적인 세계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는 다시 스티븐 킹(Stephen King, 1947), 클라이브 바커(Clive Barker, 1952) 등의 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러브크래프트의 작품 자체가 영화화된 경우는 지금까지는 팬들에 의해 만들어진 '크툴루의 부름'밖에 없지만, 그의 작품이나 세계관은 여러 영화 속에서 숱하게 거론된다. 그가 만들어낸 가상의 책인 '네크로노미콘'은 샘 레이미(Sam Raimi, 1959) 감독의 '이블 데드(The Evil Dead, 1981)'에 등장하고, 2012년 개봉한 '캐빈 인 더 우즈(The Cabin in the Woods, 2012)'에는 고대의 존재가 직접적으로 언급된다. '헬보이(Hellboy , 2004)', '퍼시픽 림(Pacific Rim, 2013)' 등의 작품을 감독한 기예르모 델 토로(Guillermo del Toro, 1964)는 '광기의 산맥'을 연출하려고 했다가 잠정 중단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로 리들리 스콧(Ridley Scott, 1937) 감독의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2012)'가 자신이 표현하고자 했던 거의 모든 것을 표현했다고 언급했다.

아컴 호러의 재발매

아컴 호러 초판(1987)
아컴 호러 초판(1987)

아컴 호러 초판(1987). <출처: boardgamegeek.com>

아컴 호러를 처음 만든 이는 리차드 로니어스(Richard Launius)다. 워게임과 RPG 게임 제작사, 카오시움(Chaosium)에서 제작한 아컴호러 초판은 1981년 제작된 '크툴루의 부름(Call of Cthulhu)' 롤플레잉 게임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1987년 발매된 보드게임 '아컴 호러'는 그 해에 미국의 게임상인 '오리진 어워드(Origins Award) 최우수 판타지/SF 보드게임 상(Best Fantasy or Science Fiction Boardgame)'을 수상했고 완판됐다. 카오시움은 여러 차례 재판을 논했지만, 실제로 재판되지는 않았다.

이 때 나온 아컴호러는 카드에 흑백 일러스트를 사용했고, 주사위 두 개를 굴려 나온 만큼 이동하는 방식을 취했다. 각 조사자의 능력치는 화술, 전투력, 지식, 은닉 등 4종류로 이루어졌다. 특정 장소에서의 조우는 주사위를 굴려 나온 숫자와 그 장소에 대응하는 조우표를 참고해 처리했다. 차원문이 13개 이상 열리면 플레이어 전원이 패배하고, 차원문을 통해 다른 세계에서 두 번의 조우를 마친 플레이어가 나와 차원문을 공격해서 닫는 방식을 택했다. 차원문을 모두 닫으면 플레이어들이 승리하는 형식의 게임이었다.

초판의 게임판
초판의 게임판

_초판의 게임판. 모노폴리나 인생게임 느낌이 난다. <출처: boardgamegeek.com> _

1999년 설립돼 '러브크래프트 컨트리(Lovecraft Country: Arkham by night)'라는 온라인 게임을 출시한 온라인 게임 제작사 스코토스(Skotos)는 리차드에게 아컴 호러의 판권을 사들인 뒤, 판타지 플라이트 게임즈(Fantasy Flight Games)에 보드게임 출판을 의뢰했다. 이후 판타지 플라이트 게임즈의 케빈 윌슨(Kevin Wilson)이 가담해 리차드와 함께 초판의 상당 부분을 보완했다. 이 과정에서 단서 토큰이 추가되고 카드 덱이 수정됐으며, 주사위를 굴려 이동하는 방식은 없앴다. 이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아컴 호러는 2005년 처음 출간돼 전량 판매되고 같은 해 재판되기까지 했다.

아컴 호러는 다른 보드게임에 비해 어려운 게임으로 평가되며, 특히 세부 규칙이 많다. 괴물 토큰은 다섯 종류로 나누어지며, 종류마다 이동 방식이나 특수효과가 모두 다르다. 게다가 서로 상충되는 효과들이 동시에 적용돼 난감한 상황이 종종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세부적인 규칙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다채로운 상황이 연출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비록 처음에 익히기는 어렵지만, 충분히 게임에 익숙해지고 나면 여러 번 플레이해도 지겹지 않다.

능력치 배분
능력치 배분

능력치 배분. 맨디 톰슨은 집중력이 2이기 때문에 매 라운드마다 능력치를 2칸 조정할 수 있다. <출처: divedice.com>

다른 게임과는 다른 아컴 호러의 특징 중 하나는 능력치의 배분이다. 아컴 호러에는 총 6가지의 능력치가 있으며, 이들은 각각 속도-은둔, 투지-의지, 지식-행운으로 둘씩 짝을 이루고 있다. 짝을 이룬 능력치는 서로 반비례 관계다. 예를 들면 속도 수치를 높이면 은둔 수치는 떨어지고, 투지 수치를 높이면 의지 수치가 낮아진다. 조우를 하게 되면 이들 능력치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결정되기 때문에, 매 라운드마다 실패의 가능성은 어떤 식으로든 안고 가도록 되어 있다.

RPG 게임에 뿌리를 둔 만큼, 캐릭터를 성장시키는 요소도 있다. 아컴 호러에서는 다양한 장비나 조력자를 얻는 형태로 캐릭터가 성장할 수 있도록 했다. 닫은 차원문이나 괴물 토큰을 교환해 단서 토큰, 조력자, 장비, 돈 등을 얻을 수 있다.

다양한 아이템 카드들
다양한 아이템 카드들

다양한 아이템 카드들. <출처: divedice.com>

게임의 조우 카드에는 텍스트가 상당히 많다. 이는 아컴 호러가 세계관에 몰입하는 것을 얼마나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다소 번거롭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아컴 호러에 나오는 상황 설명을 다 읽어가면서 게임을 하는 것이 훨씬 더 재미있다.

아컴 호러는 2010년 한글판이 출시되면서, 게임을 접하는 데 가장 어려웠던 언어 문제를 일거에 해소했다. 368장에 이르는 카드와 게임판이 모두 한글화된 이후, 5년 간 꾸준히 판매고를 올렸다. 한글판 발매는 마니아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이 게임을 즐기는 데 크게 공헌했다.

크툴루 신화의 보드게임

아컴 호러를 비롯해 크툴루 신화의 영향을 받은 보드게임들의 상당수는 판타지 플라이트 게임즈에서 제작됐다. 판타지 플라이트 게임즈는 난이도가 있는 게이머스 게임을 제작하는 회사로, 스타 워즈, 안드로이드, 워해머 등 하나의 세계관을 공유하는 일련의 게임을 지속적인 확장판과 함께 제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판타지 플라이트 게임즈는 크툴루 신화를 바탕으로 총 다섯 종류의 게임을 출판했다. 이들 다섯 게임들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만큼, 동일한 일러스트를 반복해서 사용했다. '아컴 호러'는 그 중 하나이며, 본판과 같은 사이즈의 '더니치 호러(Dunwich Horror Expansion, 2006)', '킹스포트 호러(Kingsport Horror Expansion, 2008)', '인스머스 호러(Innsmouth Horror Expansion, 2009)', '미스케토닉 호러(Miskatonic Horror Expansion, 2011)'의 확장이 출시됐다. 그리고 '다크 파라오의 저주(The Curse of the Dark Pharaoh Expansion, 2011)', '황색의 왕(The King in Yellow Expansion, 2007)', '숲 속의 검은 염소(The Black Goat of the Woods Expansion, 2008)', '문턱의 잠복자(The Lurker at the Threshold Expansion, 2010)'의 작은 확장 4종이 발매됐다.

엘드리치 호러
엘드리치 호러

아컴 호러의 명성을 이어갈 엘드리치 호러. <출처: divedice.com>

아컴 호러의 새로운 확장 출시가 멈추고, 그 뒤를 새롭게 잇는 작품으로 '엘드리치 호러(Eldritch Horror, 2013)'가 있다. 이 게임은 아컴 호러와 같은 협력 게임으로, 규칙이 좀 더 간결해졌다. ‘엘드리치 호러’는 아컴시에서 벗어나 전세계를 무대로 한다. 현재까지 '광기의 산맥'과 '버림받은 지식'의 두 가지 확장이 출시됐다. 기본판은 해외 유명보드게임 커뮤니티인 '보드게임긱'에서 크툴루 신화를 다룬 게임 중 높은 순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심지어 아컴호러보다 높다.

주사위 게임으로 즐기는 공포, 엘더 사인의 iOS
버전
주사위 게임으로 즐기는 공포, 엘더 사인의 iOS 버전

주사위 게임으로 즐기는 공포, 엘더 사인의 iOS 버전. <출처: divedice.com>

아컴 호러를 더 간편하게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진 버전이 '엘더 사인(Elder Sign, 2011)'이다. 이 게임도 마찬가지로 모든 플레이어가 협력해서 싸우나, 기본적으로 주사위 게임이다. 아컴호러와 달리 박물관 안에서 벌어지는 기현상과의 대결 구도로 게임 배경을 축소했다. 이 게임은 '보이지 않는 힘(Unseen Forces, 2013)' 확장에 이어 ‘아컴의 문(Gates of Arkham, 2015)' 확장이 출시되는 등 꾸준히 판매되고 있다.

광기의 저택
광기의 저택

_광기의 저택은 규칙서 상에서 이 게임이 스토리텔링 게임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출처: divedice.com> _

'광기의 저택(Mansions of Madness, 2011)'은 RPG의 요소를 극대화했다. 키퍼(Keeper) 역할을 맡은 한 명의 플레이어와 조사자 역할을 맡은 나머지 플레이어들이 대결하는 형식이 특징이다. 정해진 시나리오 중 하나를 골라서 플레이하는 방식으로, 이야기 요소가 강하고 서서히 달아오르는 공포의 묘사가 특히 뛰어나다. 여러모로 TRPG에 가까운 보드게임이라 할 만하며 추가 시나리오가 있는 확장이 여럿 출시됐다.

콜 오브 크툴루
콜 오브 크툴루

판타지플라이트 게임즈의 LCG 게임 라인 중 하나인 콜 오브 크툴루. <출처: divedice.com>

'콜 오브 크툴루(Call of Cthulhu the card game, 2008)'는 '안드로이드 넷러너'와 같은 '리빙 카드 게임(Living Card Game, 이하 LCG)' 장르의 게임으로 위에서 언급한 다른 게임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느낌을 준다. 지금까지의 게임들은 기본적으로 협력 게임인 반면, '크툴루의 부름'은 일대일 대결 구도에 기반한 영향력 게임이다. 플레이어들이 크툴루나 하스터 등 고대 존재의 진영 중 하나를 맡기도 하는 등 독특한 시점에서 게임이 진행된다. LCG 게임은 확장을 통해 게임을 완성시켜가는 특징이 있는 만큼 가장 많은 수의 확장이 출시됐다.

판타지 플라이트 게임즈는 매년 '아컴의 밤(Arkham Nights)'이라는 이벤트를 진행해 러브크래프트의 게임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팬 서비스를 진행한다. 2014년 아컴의 밤에서는 '크툴루의 부름' 토너먼트를 진행하고, 당시 시장에 공개되지 않았던 엘드리치 호러 확장 '광기의 산맥'을 경험할 수 있게 했다. 또 아컴 호러의 확장팩을 동원해 18명이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시나리오를 제공하기도 했다. 지나치게 확장팩을 빠르게 많이 내놓는다는 점은 좋지 않은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한 게임에 대해 지속적인 확장을 제공하여 끊임없이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는 것은 플라이트 게임즈가 마니아 시장의 지지를 유지하는 중요한 힘이라고 볼 수 있다.

에메랄드색 연구
에메랄드색 연구

_FFG 외에서 나온 러브크래프티안 게임 중 가장 좋은 평가를 받는 에메랄드색 연구. <출처: boardgamegeek.com> _

판타지 플라이트 게임즈가 아닌 다른 보드게임 제작사들도 크툴루 신화를 바탕으로 하는 게임들을 출시하고 있다. 미니어처 게임인 '크툴루 워즈(Cthulhu Wars. 2014)', '에이지 오브 스팀'의 작가 마틴 월레스가 만든 영향력 게임인 '에메랄드색 연구(A Study in emerald, 2013)'가 대표적이다. 또한 '먼치킨 크툴루(Munchkin Cthulhu, 2007)', '크툴루 플럭스(Cthulhu Fluxx, 2012)', '스매시 업(Smash up!, 2013)'과 같은 기존 게임에 크툴루 신화의 테마를 입힌 버전들도 있다.

러브크래프트 팬들을 위한 선물

크툴루의 형상
크툴루의 형상

크툴루의 형상은 수많은 작품에서 차용되었으며 촉수괴물의 모태이기도 하다. <출처: divedice.com>

기본적으로 협력 게임은 패배하는 경우의 수가 승리하는 경우의 수보다 많다. 주어진 시간에 비해 플레이어들이 할 수 있는 활동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각 플레이어들은 서로 역할을 잘 분배해 활동해야 한다. 이를 위해 각 캐릭터에게 서로 다른 능력이 부여되는 경우가 많으며, 플레이어들은 이들 능력을 바탕으로 각자의 몫을 잘 수행해내야 한다. 위기에 대한 몰입감을 높여주는 테마가 명확한 만큼 스토리텔링이 강한 게임이기도 하다.

아컴 호러는 처음에 배우기 어려운 게임임에는 분명하나 테마에 대한 시스템 구현, 적절한 난이도 배분, 캐릭터의 뚜렷한 개성, 다양하게 발생하는 이벤트 등 게임의 완성도와 몰입도를 인정받는 게임이다. 크툴루 신화의 덕도 있겠지만, 게임 자체의 완성도의 측면에서도 독보적인 마니아층을 거느릴 만큼 수준 있다.

플레이어들이 고대 존재의 피조물들과 맞서 싸울 수 있다는 점은 인간의 무력함을 묘사한 러브크래프트의 관점과는 차이가 있지만, 압도적인 공포에 맞서는 플레이어들의 영웅적인 활약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아컴 호러는 러브크래프트 게임의 대표작으로, 러브크래프트 팬들 혹은 코스믹 호러 팬들을 위한 선물이라 할 수 있다.

글 / IT동아 보드게임 필자, 코리아보드게임즈 현 수
편집 / IT동아 안수영(syahn@itdonga.com)

※본 기사는 네이버캐스트 게임의 세계: 보드게임의 세계(http://navercast.naver.com/list.nhn?cid=2883&category_id=2883)에 함께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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