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임의 세계] 간단한 규칙이 주는 심오함, '쿼리도'
쿼리도(1997) <출처: divedice.com>
일반적으로 체스나 바둑 같은 게임을 '추상전략 게임(Abstract Strategy games)'으로 분류한다. 추상전략 게임은 보통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게임 배경(Theme)이 없으며, 간단하거나 직관적인 게임 규칙을 가지고 있다. 추상전략 게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모든 정보가 공개되어 있다는 점과 운이나 무작위적인 성격이 거의 없는 게임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체스나 바둑처럼 오랜 시간 동안 사랑받는 게임 외에도, 보드게임의 발전과 함께 최근 제작돼 사랑받고 있는 추상전략 게임들도 많다. 그 중 복도를 뜻하는 단어(Corridor)에 'Qu'를 붙인 게임, '쿼리도(Quoridor)'는 현대의 추상전략 게임을 접하는데 아주 좋은 보드게임이다.
게임 방법
쿼리도는 2인 혹은 4인이 즐길 수 있다. 쿼리도의 장점 중 하나는 규칙이 매우 쉽다는 데 있다.
먼저, 게임판을 중앙에 놓고 마주보고 앉는다. 게임판에는 9X9의 칸이 나뉘어 있는데, 각자 게임 말을 하나 선택해 게임 말을 자신에게 가까운 쪽 중앙에 놓는다. 2인일 경우 각각 10개의 장애물을 받아 게임판에 꽂아 표시한다.
게임의 승리 조건 <출처: divedice.com>
게임의 승부는 간단하다. 내 게임말을 상대방보다 먼저 게임판의 반대편으로 이동시키면 게임에서 승리한다.
장애물로 막거나, 1칸을 이동하거나. 둘 중 하나를 고르면 된다. <출처: divedice.com>
플레이어들은 번갈아 가며 2가지 중 하나의 행동을 하면 된다. 게임 말을 전, 후, 좌, 우로 1칸 움직이거나, 게임판에 장애물을 놓으면 된다. 장애물은 게임말의 이동을 막거나 방해하며, 한 번 놓으면 움직일 수 없다.
내 말을 움직이면 장애물을 놓을 수 없고, 장애물을 놓으면 내 말을 움직일 수 없다. 따라서 상대방을 방해할 타이밍과 내 말을 움직일 타이밍을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
_상대방을 가두면 안 된다는 것이 규칙의 핵심이다. 이를 통해 전략을 짤 수 있다. <출처: divedice.com> _
장애물을 놓을 때는 상대방의 말이 아예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가둘 수 없다. 장애물을 설치할 때 최소 1칸의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을 남겨두어야 한다. 이를 이용해 상대방이 만드는 미로를 깨거나, 상대방이 더 복잡한 미로에 빠지게끔 전략을 짤 수 있다.
상대방의 말과 인접했을 때에는 건너뛰면 된다. 1칸 이득을 보는 셈이다. <출처: divedice.com>
이동을 해야 하는데, 상대방의 말이 인접해 있을 경우에는 그 방향 그대로 뛰어넘으면 된다. 인접한 상대방의 뒤에 장애물이 있을 경우에는 대각선으로 이동 가능하다. 이렇게 이동하면 1칸을 더 벌게 되기 때문에 게임 진행이 유리해진다.
규칙은 이것이 전부다. 4인인 경우에는 9X9 게임판의 각 가장자리 중앙 칸에서 시작하며, 각자 5개의 장애물을 가지고 게임을 하면 된다. 다른 규칙은 2인 게임과 같다.
쿼리도의 전략
쿼리도는 규칙은 쉽지만, 이기기는 어려운 게임이다.
쿼리도에서 플레이어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은 2가지다. 장애물을 놓거나 게임 말을 움직이거나. 장애물을 언제 놓아야 할지, 게임말을 언제 움직여야 할지를 판단하는 것이 플레이어들이 당면하는 첫 번째 문제다. 어떤 행동을 할지 선택했다면, 최적의 움직임을 찾는 것이 두 번째 문제가 된다. 장애물 놓기와 이동에 대해 약간의 전략을 소개한다.
장애물 놓기
쿼리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장애물을 놓는 것이다. 2인 기준으로, 게임 중에 사용할 수 있는 장애물의 개수는 10개다. 최대한 장애물을 아끼고, 신중하게 최적의 위치를 골라 놓아야 한다. 게임 후반에 상대방보다 더 많은 장애물을 가지고 있다면 든든해진다.
초심자들이 흔히 하는 실수 중 하나는 상대방을 따라 장애물을 계속해서 놓는 것이다. 하지만 효과적이지 않은 장애물 놓기는 상대방에게 승기를 줄 여지가 더 많으며, 장애물을 아끼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2번째 차례로 시작했다면, 장애물 레이스(Race)는 치명적이다.
실러 오프닝. 내 게임말의 뒤에 장애물을 놓으면 내 게임말의 진로에는 영향을 주지 않아 좋다. <출처: divedice.com>
기본적으로 명심할 것은, 상대방의 이동을 막기 위해 사용하는 장애물이 내 게임 말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데에도 쓰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장애물을 놓기 전에, 이 장애물이 추후 자신의 말에 영향을 주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미국 쿼리도 챔피언, 래리 실러(Larry Shiller)가 제안한 첫 수(Opening)가 있다. 내가 시작 플레이어이고, 상대방과 내가 모두 3칸을 전진했다면, 내 게임 말의 뒤에 세로로 장애물을 세우는 것이다. '실러 오프닝(Shiller Opening)'이라 불리는 이 첫 수는 종종 유용하다.
게임말 이동
게임말의 이동은 기본적으로 무한히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이라 생각하는 것이 좋다. 장애물은 개수 자체가 한정되어 있어 사용을 고심해야 하지만, 이동은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즉, 게임을 하면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그냥 이동하는 게 낫다. 이동을 통해 상대방에게 장애물의 사용을 강요할 수 있다면 더 좋다.
상대방의 이동 경로를 늘리고, 내 이동 경로를 줄이자. 좌측에서 검은색 말은 2가지의 경로, 흰색 말은 1개의 경로를 가진다. 흰색 말이 유리하다. 우측에서 흰색 말은 3개의 경로, 검은색은 2개의 경로를 가진다. 흰색 말은 현재 놓여진 벽을 기준으로 돌아가는 것도 염두에 둬야 한다. <출처: divedice.com>
이동하기 전에는 머릿속으로 몇 가지 확인을 해주면 좋다. 먼저 내가 최종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몇 칸이 남았는지 상대방과 비교해 세어보자. 이를 통해 현재 상황이 내게 유리한지 아닌지 알 수 있다.
두 번째로, 쿼리도에서 승리를 위한 전략 중 하나는 상대방의 이동 경로를 늘리고, 내 이동 경로를 최소한으로 만드는 것이다. 장애물이 있다면 이동경로가 늘어나고, 다양한 이동경로는 불필요한 이동을 야기하기 때문에 이를 줄이는 것이 좋다. 때문에 나와 상대방의 경로의 수를 세어 비교해보면, 누가 우위에 있는지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장애물에 내 경로가 막힐 수 있는 가능성을 따져보아야 한다. 이동한 칸에서 2칸 이내에 위치한 장애물은 언제든 내 이동경로를 방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경계하자.
장애물이 게임판을 양분할 때에는 남은 칸이 홀수인 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유리하다. 홀수인 쪽을 막으려면 장애물이 더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출처: divedice.com>
그럼 게임 말의 이동은 어떻게 해야할까? 게임판은 총 9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말은 2칸을 차지하는 장애물이 게임판을 완벽히 막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4개의 장애물을 한 줄로 놓으면, 1칸은 항상 남게 된다. 따라서, 내 앞에 장애물이 놓여진 경우에는 남은 칸이 홀수인 쪽으로 이동하는 편이 낫다. 1칸을 막기 위해서는 1개 이상의 장애물이 필요하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장애물 사용을 더 압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검은색 말이 아래로 움직이는 것은 위험하다. 한 쪽이 막히면 돌아서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한쪽을 먼저 막는 것이 낫다. <출처: divedice.com>
장애물로 중앙이 막혀 있고, 양 쪽에 공간이 있을 경우에는 말을 움직이는 행동에 대해서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 내가 이동하는 방향에 장애물이 생기면, 게임 판의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게 되어, 이동해야 하는 거리가 늘어날 수 있다. 이럴 때에는 반대편을 막고 전진하거나, 상대방의 장애물 사용을 보고 이동하는 것이 낫다.
규칙의 단순화 과정
쿼리도의 작가 미르코 마르케(Mirko Marchesi)는 이탈리아 밀라노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원래 비디오 게임 개발자였지만 몇 년 동안 게임을 개발하지 못하자, 친구들과 함께 EPTA라는 게임 회사를 차렸다. 그는 이 회사에서 이전에 제작한 보드게임 '블록케이드(Blockade, 1975)'를 바탕으로 '핀코 팔리노(Pinko Pallino, 1995)'라는 게임을 만들었다.
이 게임을 눈여겨보던 프랑스의 게임 제작사 지가믹(Gigamic)은 게임 진행을 보다 빠르게 하고, 4명이서도 게임이 가능하도록 수정을 요청했고, 그 결과 쿼리도가 만들어졌다. 때문에 쿼리도는 이전 게임에 비해 규칙이 더 단순해졌다.
블록케이드. 플라스틱 재질과 색깔로 구분된 장애물이 눈에 띈다. <출처: boardgamegeek.com>
1975년 개발된 블록케이드는 미르코 마르케와 필립 슬레이터(Philip Slater)가 공동 개발한 작품이다. 각자 게임 말을 2개씩 가지고, 11X14의 게임판의 중앙에 말을 놓고 게임을 시작한다. 게임판의 중앙에서 시작해, 자신의 게임 말과 일치하는 색깔 칸으로 2개의 말이 모두 이동하면 승리한다.
쿼리도처럼 대각선 이동은 안되지만, 1개의 말을 2칸까지 이동할 수 있다. 이동 후에 바로 장애물을 놓을 수 있다는 점도 쿼리도와 다르다. 장애물로 게임 말의 이동을 막는 것은 쿼리도와 똑같은데, 재미있게도 장애물은 2가지 색상을 가지고 있다. 9개의 녹색 장애물은 세로로만, 9개의 파란색 장애물은 가로로만 놓을 수 있다. 18개의 장애물을 가진 셈이지만, 놓을 수 있는 방향이 정해져 있어 조금 더 고심해야 한다.
블록케이드는 레이크사이드(lakeside)사의 추상전략 2인용 게임으로 출판돼, 유명한 보드게임 디자이너 알렉스 란돌프(Alex Randolph)의 명작인 '버팔로(Buffalo, 1975)', 후에 '커넥트 4 스택커스(Connect 4 Stackers)'로 이어지는 '스코어 포(Score Four, 1967)'와 함께 판매됐다.
핀코 팔리노. 쿼리도보다 많은 칸이 눈에 띈다. <출처: boardgamegeek.com>
이후, 1995년 발매된 핀코 팔리노는 플라스틱으로 조형된 블록케이트와 달리, 나무로 제작됐다. 쿼리도와 외견상으로 상당히 유사한데, 특히 게임의 목표가 상대방이 위치한 반대편 게임판에 도달하는 것으로 바뀐 것이 가장 큰 변화다. 게임 말의 이동이 1칸으로 변화했다는 점도 쿼리도와 유사하지만, 이 게임에서는 대각선 이동이 가능했다.
11X11의 큰 게임판에 21개의 많은 장애물을 각자 가지고 게임을 하기 때문에, 쿼리도와 비교해 '어른들의 쿼리도'로 불리기도 한다. 이 게임을 바탕으로 1997년 프랑스의 게임 제작사 지가믹이 판권을 얻어 이후 몇 가지 수정을 거쳤으며, 오늘날의 '쿼리도'를 제작해 판매하고 있다.
쿼리도 키드 <출처: boardgamegeek.com>
지가믹은 쿼리도의 인기에 힘입어 2004년 '쿼리도 키드(Quoridor Kid, 2004)'를 발매했다. 이 게임은 쿼리도보다 더 작은 7X7 게임판에 쥐와 치즈를 사용하고 예쁜 이미지를 적용해 인기를 모았다.
쿼리도 포켓 <출처: gigamic.com>
2013년 발매된 '쿼리도 포켓'은 여행용으로 제작된 쿼리도다. 작은 크기로 휴대성이 좋아졌지만, 플라스틱으로 제작되고 게임말이 사각형 박스로 바뀌는 등, 기존 게임과 다른 느낌을 줬다. 이러한 이유로 국내에는 정식 유통되지 않았다. 여담이지만, 2013년을 기점으로 쿼리도를 비롯한 지가믹 클래식 게임 시리즈의 게임 박스가 모던한 디자인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한국에 유통되는 상품은 여전히 클래식한 느낌을 주는 예전 디자인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쿼리도의 이유 있는 인기
1997 Mensa Select Winner
1998 Games Magazine Game of the Year Winner
멘사 셀렉트 로고 <출처: us.mansa.org>
쿼리도는 1997년 멘사 셀렉트 수상작이다. 멘사(Mensa)는 표준화된 지능 검사에서 일반 인구의 상위 2%에 드는 지적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단체다. 멘사는 국제적으로 10만여 명의 회원을 가지고 있는데, 이중 5만 7,000명 정도가 미국 멘사에 소속돼 있다.
미국 멘사는 1990년부터 마인드 게임즈(Mind games)를 설립해 약 200여명 이상의 멘사 회원들이 참여하는 게임 이벤트를 열고 있으며, 이를 통해 매년 멘사 회원들이 즐겨한 게임들을 선정하고 있다.
따라서 멘사 셀렉트는 지적인 게임을 선정하는 것이 아닌, 지적인 사람들이 즐기는 게임 정도로 받아들이는 게 낫다. 독일, 일본 등 다른 지역 멘사에서도 멘사 셀렉트를 선정하고 있어 지역마다 차이가 있는 것도 주의해야 한다. 멘사 셀렉트에 선정이 된 게임 중에서도, 멘사 셀렉트 로고를 구입하지 않아 게임 박스에 별도의 표기 없이 출시되는 게임도 있다.
드라마의 인기로 판매된 쿼리도의 대형판. 중앙에 놓여진 것이 일반적으로 판매되는 쿼리도의 크기다. <출처: divedice.com>
한국 시장에서 쿼리도는 '멘사 게임'이라는 문구보다는, SBS 드라마 '상속자들'에서 조명수 역으로 출연한 연기자 박형식이 게임을 하는 장면으로 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줬다. 드라마가 인기를 끌자 드라마에서 사용된 큰 사이즈의 쿼리도를 요구하는 시청자가 많았다. 이에 관련 쇼핑몰에서 일반적으로 판매되지 않는 쿼리도의 프로모션용 대형판을 판매하기도 했다.
2014년 쿼리도 대회. <출처: IT동아>
그리고 2000년대 초반부터 이 게임을 즐기던 마니아들의 우호적인 평가와 함께 쿼리도의 판매량은 급격히 상승했고, 전국 규모의 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쿼리도 대회는 초등학생,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전국 각지에서 한달 간 예선전을 걸쳐 결승전이 진행될 정도로 큰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TV 드라마의 한 장면으로 쿼리도의 인기를 설명하기란 아쉬운 부분이 있다.
쿼리도는 체스와 장기 등 고전 게임에 비해 규칙이 간단해, 부모가 아이에게 가르쳐 주기 좋다. 게임 시간도 짧다. 어린아이들도 게임을 쉽게 익히고 어른과의 대결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깰 수 있다. 게임의 승리를 분석하는 일조차 재미있을 정도로, 패배를 받아들이기 쉽다는 점도 좋다.
미국 쿼리도 대회의 챔피언이자 수학교사인 래리 실러의 사례가 있다. 레리 실러는 자녀에게 세상살이가 쉽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려는 타입의 아버지였다. 그래서 아이가 자신을 뛰어넘을 때까지 함께 쿼리도를 했고, 아이가 7~8살이 되었을 때 그를 꺾었다고 한다. 그는 두 번째로 아이에게 패배한 순간 머릿속으로 3가지 생각이 지나갔다고 한다.
"내가 바보인가"
"내 딸은 천재야"
"쿼리도는 멋진 게임이다"
쿼리도를 통해 누군가가 천재인지 바보인지를 판별할 순 없을지라도, 쿼리도는 멋진 게임임에 틀림없다. 어른과 아이, 연인 사이, 친구 사이 등, 두 사람만 있다면 앉은 자리에서 푹 빠질 수 있다. 커피 한 잔이 어울릴 것 같은 디자인 또한 마음을 사로잡는다. 집 안에 여분의 공간이 있다면, 채워 넣어야 할 게임은 쿼리도가 틀림없다.
글 / IT동아 보드게임 필자, 코리아보드게임즈 권성현
편집 / IT동아 안수영(syahn@itdonga.com)
※본 기사는 네이버캐스트 게임의 세계: 보드게임의 세계(http://navercast.naver.com/list.nhn?cid=2883&category_id=2883)에 함께 연재됩니다.